남다른 행보
브랜딩의 기본에 대하여
누군가 내게 좋아하는 가수를 묻는다면 나는 주저 없이 김진호를 꼽는다. 그의 음악을 듣고 있으면 노랫말에 담긴 감정이 그의 표정과 몸짓, 목소리를 타고 고스란히 전달돼 설렘부터 슬픔, 회한, 희망까지 감정의 성찬을 경험하게 된다. 2004년 SG워너비로 데뷔한 그를 보자마자 좋아한 것은 아니었다(솔직히 한 번에 빠지기 쉬운 외모는 아닌 것 같다). 그들의 노래를 추천하는 이들이 주변에 하나둘 생겼고, 잉크가 물에 번지듯 나도 그들의 음악에 서서히 매료됐다. 입대 후 나온 3집 앨범 타이틀곡 <내 사람>은 특히 더 듣기 좋았다. 상황실 근무를 서며 몰래 듣던 라디오에서 내 사람이 흘러나올 때, 나는 짝사랑하는 이성을 우연히 마주친 십 대 소년처럼 기쁨에 두근거렸다. 그룹이 아닌 김진호라는 개인에 마음을 뺏긴 때도 그즈음이었다. 내무반 TV로 본 무대에서 그는 자신의 파트가 아닌 부분에서도 리듬을 타며 노래를 불렀고(마이크는 떼고), 나는 그를 보며 사람이 좋아하는 일을 할 때 어떤 모습이 되는지 처음 알게 됐다.
그 뒤로 SG워너비 공백기에 나온 그의 솔로 앨범을 들으며 그가 더욱 좋아졌다. 그룹 활동 당시의 화려함을 줄었지만 담백하고 진솔한 노래에는 힘이 있었고, 그 안에 담긴 생각이 멋졌다. 어느 인터뷰에서 그는 솔로 가수로 성공하기 위해 유명한 작곡가, 프로듀서의 도움을 받으라는 조언을 많이 들었지만, 진심으로 노래하는 가수가 되고 싶었기에 성공 공식을 따르기보다 직접 작사, 작곡한 노래들로 솔로 1집을 채웠다고 이야기했다. 나는 뻔한 길이 아닌 다른 길을 걷기 시작한 그에게 더 큰 애정을 느꼈다. 그는 솔로로 활동하며 병원이나 학교에 무료 공연을 자주 다녔다. 음악이 진정 필요한 사람들이지만 그럴 여유가 없는 이들을 위해 노래하고 싶다면서. 나는 따뜻하고 인간적인 행보를 보며 그에게 더 깊이 빠져들었다.
좋아하는 가수의 이야기로 글을 시작한 이유는 그를 보며 ‘남다른 행보’가 브랜딩의 기본이라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패키지 디자인을 의미하거나, 로고를 만드는 일 정도로 쓰이기도 해서 그 뜻이 헷갈리지만, 내 나름대로 규정한 브랜딩의 정의는 브랜드의 정체성을 세우는 일이다. 브랜드의 철학, 존재 이유를 공고하게 다지고 그것을 기반으로 어떤 행동을 할지, 어떤 스타일을 갖출지 정하는 것 말이다. 마케팅이란 브랜딩 된 브랜드를 바탕으로 소비자를 만나는 일이라고 규정하는데, 그 둘을 칼로 무 자르듯 구분할 수 있는 개념은 아닌 것 같고, 마케팅 활동에는 할인 행사 같은 활동도 포함되기 마련이라 그 범위가 더 넓다고 생각한다.
어쨌거나 브랜딩의 핵심은 정체성을 세우는 것이고, 정체성이란 말에는 남과 구분되는 무언가를 시간 들여 쌓아 왔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그래서 브랜딩에는 ‘남다른 행보’가 필수적이다. 남과 다르다는 것은 차별화 요소가 있다는 것이며, 행보란 말에는 그런 다름이 일회용품 같은 것이 아니라 이어지고 계속되었다는 함의가 있다.
지금 다니고 있는 회사에서는 오랫동안 우리 술 복원 프로젝트를 진행해왔다. 집집마다 술을 빚어 온 과거에는 술 문화도 다양해 문헌으로 전해지는 술만 600개가 넘는다고 하지만, 이 술들은 대부분 일제 강점기를 거치며 종적을 감췄다. 문헌에 남아있는 제법과 당시의 기록을 바탕으로 연구원들이 잊힌 술을 하나씩 복원했고, 그중에 맛과 품질이 뛰어난 제품은 ‘법고창신’이라는 이름으로 출시해왔다. 나는 이것이 전통을 기반으로 좋은 술을 빚는다는 회사의 정체성을 잘 보여주는 행보였다고 생각한다. 그래서인지 이 프로젝트를 주변 사람들에게 소개할 때면 괜히 어깨에 힘이 들어가곤 했다.
뷰티 브랜드 설화수에서는 매년 전통 장인들과 협업해 실란 메이크업 리미티드 에디션을 출시한다. 금속 표면에 선을 끼워 정교한 무늬를 완성하는 입사 기법의 장인이나 칠보 공예의 대가와 협업해 스페셜 패키지를 만드는 것이다. 그들의 활동을 보며 아모레퍼시픽이 표방하는 아시안 뷰티까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한국의 브랜드로서 전통을 존중함과 동시에 한국적인 아름다움을 브랜드에 잘 담아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많이 알려진 사례지만, 배달의 민족은 매달 잡지에 그들만의 유머와 말장난을 섞은 광고를 진행하고 있다. 음악 잡지에 ‘비올라 파전 먹자’ 같은 문구를 적고, 시계 잡지에 ‘이 집 맛보고 놀렉스’ 같은 카피로 광고를 내보내는 것이다. 몇 년째 계속되는 이 행동에서 유쾌함, 뒷맛 개운한 유머라는 특유의 스타일이 듬뿍 드러난다. 광고에 쓸 카피는 내부 공모를 통해 진행된다고 하니 직원들이 브랜드의 정체성을 경험하고 공유하는 좋은 계기가 될 것도 같다. 배스킨라빈스의 슬로건이 여전히 골라 먹는 즐거움인지는 모르겠지만, 배라 매장에 가면 수많은 아이스크림이 있고 무얼 먹을지 행복한 고민에 빠지게 된다. 어쨌거나 그들은 지치지 않는 에너자이저처럼 매달 하나의 신제품을 출시하고 있고, 나는 그것이 그들이 추구하는 다양성에 부합하는 행보이면서 소비자의 관심을 끌 수 있는 영리한 행동이라고 생각한다. 다르면서 꾸준하고, 또 매력적인 행보인 것이다.
일을 하며 틈틈이 지금 담당하는 브랜드가 가야 할 남다른 행보가 무엇일지 생각해보곤 한다. 그러면 지금 준비하고 있는 쿠폰 행사나 POP 제작 같은 일이 사소하게 느껴지고 ‘정작 중요한 것은 건너 띄고 변죽 울리는 일만 하고 있구나’ 하며 자책도 하게 된다. 새로운 제품을 상상하면서도 그 브랜드의 남다른 행보에 대해 생각해보곤 하는데, 그러고 나면 두루뭉술한 상상의 군더더기가 빠져 혼탁한 기획이 제법 또렷한 계획으로 탈바꿈되기도 한다. 핵심이 딱 잡힌다고나 할까?
10년 전쯤 읽었던 브랜드 잡지 <유니타스 브랜드>는 마케팅은 세일즈를 필요 없게 만들고, 브랜딩은 마케팅을 필요 없게 만든다고 했다. 나는 애정하는 가수 김진호를 보며 이 말이 사실이 아님을 알았다. 나의 가수는 솔로 앨범의 모든 곡을 직접 만들고, 노래가 필요한 이들을 위해 무료 공연을 다니며 진심으로 노래하는 가수가 되었다. 그리고 그런 그를 사랑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하지만 지난 10월에 발매된 그의 3집 소식을 아는 이들이 얼마나 될까? (TOP 100에 단 한 곡도 포함되지 못했다) 타이틀곡 <폭죽과 별> 가사가 얼마나 시적인지, 또 첫 번째 트랙 <낙서>에 나오는 가사 ‘왜 난 지나버린 후에 다시 돌아가고 싶은지’의 멜로디가 얼마나 애잔한지, 대부분 알지 못한다. 나는 그가 음악 예능이라도 출연해 더 큰 관심을 받길 바란다. 더 많은 이에게 그의 노래가 전해지고 그 안에 담긴 생각과 마음이 따뜻하게 전달되길 바란다. 브랜딩은 마케팅을 필요 없게 만들지 못한다. 브랜딩도 필요하고 마케팅도 필요한 법이다. 끝에 붙인 이야기는 아무래도 사족 같지만, 팬심으로 시작된 이야기라 팬심으로 마칠 수밖에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