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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의 아이디어

창의적인 사람이 되고 싶어서

by 송정훈


마케터가 되고 이런 고민을 자주 했다. 어떻게 하면 기발한 생각을 할 수 있지? 창의적인 사람이 되고 싶은데, 어떤 노력을 해야 하지? 프로모션 카피를 쓰는데 식상한 문구만 떠오를 때, 명절에 진행할 프로모션 아이디어를 내라는데 ‘나는 지금 아무 생각이 없다. 왜냐하면 아무 생각이 없기 때문이다’ 같은 표정만 지어질 때, 입에 모터 단 듯 유려한 말을 쏟아내는 선배들 사이에서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있다 회의실에서 나올 때, 그 해답은 더욱 간절해졌다.


그래서 창의성에 관한 책을 여러 권 읽었다. 생각의 탄생이나 생각하는 미친놈 같은 책들. 어떤 책은 누군가의 창의적인 생각을 모아 놓은 사례집이라 감탄만 하다 끝이 났고, 또 어떤 것은 내용이 어려워 읽다 덮었다. 연애를 책으로 배울 수 없듯 창의성도 책으로 해결할 수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다 만난 책이 김하나 작가가 쓴 <당신과 나의 아이디어>였다. 그녀는 창의성이란 말은 (외향성이란 말처럼) 개인의 고유한 본성처럼 느껴져 무겁고 부담스러운 단어라며 ‘아이디어’라는 말을 쓰자고 제안했고, 아이디어라는 게 대단한 건 아니고 ‘이러면 좀 낫지’라고 느끼게끔 만드는 것이라 설명했다. 넷이 앉기엔 좁은 테이블을 벽에서 살짝 떼어내 여유를 만드는 것도 아이디어라고 덧붙이면서. 그리고는 일상 속에서 만나는 반짝이는 아이디어를 발견하고 수집하는 것만으로도 한결 창의적인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책을 읽고 블로그에 123 프로젝트라는 카테고리를 만들었다. 때는 8월, 연말까지는 대충 130일 정도가 남아 있었다. 나는 일상에서 만나는 아이디어를 하루에 하나씩 기록해두기로 마음 먹었고, 123이라는 숫자가 있어 보이기도 하고, 또 며칠 빠뜨려도 무방한 개수라는 생각에 그렇게 이름을 붙였다. 2016년의 일이었다.


그렇게 시작한 일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3년이 훌쩍 넘은 시간이다. 제일 처음 올린 건 에코백이었는데, 이름을 누가 지었는지는 모르지만 참 기발하다고 짧게 메모를 남겼다. 그다음 날에는 LG 디오스 김치 톡톡이라는 제품 이름에 쓰인 ‘톡톡’이란 말이 유산균의 느낌을 잘 살리면서 기분 좋은 생동감이 느껴지는 단어라고 적었다. 가장 최근에는 조말론에서 밸런타인 데이 시즌을 맞이해 제작한 하트 모양의 선물 박스에 관해 적었다. 사실 이 박스는 작년에도 만들었던 것으로 그때도 아이디어라고 기록해두었던 것이다. 작년에 메모해 둔 사례를 올해도 다시 만나며 역시 괜찮은 기획은 반복해서 실행해야 한다는 (조금은 뻔뻔한) 메모를 남겼다.


읽으면서 느꼈겠지만, 주로 사소한 아이디어를 적는다. 매일 하나의 아이디어를 기록하기 위해서는 ‘하... 이건 너무 쪼그만한 아이디어인데... 이런 거까지 적어야 하나...’ 하는 것까지 적어야 한다. 몇 주 전에는 신문 기사 타이틀의 리듬감이 좋다며 메모를 해 둔 적도 있다. 제목은 이랬다. 잃을 게 없다는 북한에 잃을 게 뭔지 보여주겠다는 트럼프. 뭐, 그래도 가끔은 굵직하고 유명한 아이디어도 적어 둔다. 버거킹 사딸라 광고나 풀무원 얇은피 만두 같은 반응이 뜨거운 광고나 이슈가 되고 있는 신제품 같은 것들을.



어쨌거나 이런 노력이 쌓여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 정도는 아니지만 나도 좀 달라졌다. 우선 회의 시간에 할 말이 좀 생겼다. 최근에 적어 둔 사례를 언급하며 우리도 이런 걸 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하고, 누군가의 아이디어에 “음... 그건 모 회사의 케이스와 비슷한 방식이겠군요” 하며 말을 덧붙이기도 한다. 또, 가지고 있는 레퍼런스가 여럿 있으니 디자인팀이나 대행사에 주는 가이드도 제법 또렷해졌다. 어리바리한 초짜 마케터 시절에는 ‘난 모르겠으니 알아서 좋은 것 좀 만들어줘요...’ 하는 마음이 짙었다면, 지금은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이고 그와 비슷한 사례는 어떤 것이 있는지, 혹은 어떤 걸 보며 아이디어를 구상했는지 제법 명확하게 표현하게 됐다.


그리고 그간 쌓아온 아이디어들이 나름 내 안에서 발효되고 숙성되어, 제법 쓸만한 기획으로 발전하는 경우도 생겼다. 그중에는 기록해둔 아이디어를 본 따 아주 조금만 바꾼 기획도 있고, 익숙한 것들이 결합을 통해 제법 새롭게 느껴지는 기획안으로 발전할 것도 있다.


배달의 민족 김봉진 대표는 디자이너로 일을 하며 매일 8개의 디자인 사례나 참고 사이트를 네이버 오픈 캐스트에 올렸다고 한다. 그는 755일 동안 반복하며 시안 잘 뽑는 디자이너 이상으로 자신이 크게 성장하는 걸 느꼈다고 한다. 나 역시 이 방법을 통해 마케터로 성장했다고 생각한다. 이전까지는 마케터가 하고 싶던 보통의 직장인이었다면, 이제는 스스로 기획을 할 줄 아는, (대박까진 아니지만) 제법 쓸모 있는 아이디어를 만들어내는 마케터가 되었다.



몇 년간 근육이란 걸 자주 생각했다. 잘하고 싶은 것이 많지만 잘하는 건 별로 없는 내게 필요한 건 근육을 만들 시간과 노력이라고. 늦게 시작한 기타를 독학하며 자주 그런 생각에 젖었다. 악기를 다룬 적 없던 삼십 대 남자가 뻣뻣해진 손가락으로 코드를 잡고 줄을 튕기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매일 몇 분이라도 꾸준하게 하니 근육도 생기고 굳은살도 붙어 기초적인 연주 정도는 할 수 있게 되었다. 그 시간을 통과하며 능숙해지기 위해서는 근육을 만들 시간이 필요한 법이고, 그렇기에 때로는 단련하듯 생활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매일의 웨이트 트레이닝으로 몸의 근육을 키우듯이, 매일 하나의 아이디어를 기록한 것은 생각의 근육을 키우는 일이었다. 그리고 3년 넘게 단련하며 왜소했던 체형은 이제 조금은 단단한 몸매가 된 듯하다. 매주 하나의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글을 쓰며 근육을 떠올린다. 읽는 사람 하나 없는 글이지만 꾸준히 쓰다 보면 사색과 웃음을 함께 줄 수 있는, 제법 단단한 글을 쓸 수 있는 사람이 되리라 기대하면서. 물론 먼 미래의 이야기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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