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에 메멘토 인수인계론에 관해 글을 쓴 적이 있다. 죽음을 떠올리면(메멘토 모리) 어떻게 살아야 할지 답을 얻기도 한다는 말처럼 현재 담당하고 있는 업무의 인수인계 순간을 상상하면 어떻게 일해야 할지 깨닫기도 한다는 것이 글에 담긴 메시지였다. 오늘 이야기할 내용이 바로 그 인수인계의 순간에, 이룬 성과가 별로 없어 노래 가사처럼 점점 작아질 그 시간에 “그래도 이런 걸 했습니다”라고 조금 힘주어 말하고 싶은 것이다.
지금 담당하고 있는 백세주는 전국 30여 개 지점을 가지고 있는 국내 최대 한정식 브랜드와 꾸준히 라벨 프로모션을 진행하고 있다. 거래처에서 매주 상견례를 치르는 예비 신랑·신부, 생일을 맞은 고객의 이름을 보내주면 우리는 이름과 백년해로 내지는 백세 건강을 기원한다는 문구가 담겨 있는 라벨을 만들어 보내준다. 정성스럽게 한지로 포장된 백세주도 납품하고. 그러면 각 지점에 있는 점장님들은 라벨을 붙이고 케이스에 담아 의미 있는 날을 맞이한 손님들에게 뜻깊은 선물을 건넨다.
주류 회사의 라벨 마케팅하면 '처음처럼'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사람들은 자신의 이름이 들어간 라벨에서 재미와 특별함을 느꼈고, 이벤트를 할 때마다 큰 화제가 됐다. 그 사례를 참고해 영업팀의 한 과장님이 아이디어를 제안했다. 국순당 대박 막걸리에 모임이나 가게 이름을 넣어주자고. 홍대 기타 동호회 ‘대박’ 나세요, 서촌 돈까스 살롱 ‘대박’ 나세요, 같은 메시지로 라벨을 만들어주는 것이다. 이벤트는 반응이 좋았지만, 막걸리 가격대가 낮다 보니 공수에 비해 성과가 크지 않았고, 단체 고객을 위해 맞춤 라벨이 부착된 막걸리를 잔뜩 준비해두었는데 예상보다 주문량이 적어 재고가 많이 남는 등 크고 작은 문제가 생겼다. 그러자 그 과장님은 백세주를 담당하는 내게 백세주 라벨로 한정식 TPO를 공략하자는 제안을 했다.
백세주에 담긴 의미가 건강, 백년해로로 확장될 수 있고, 한정식집을 찾는 상황과 잘 붙는다는 점에서 그 제안이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대상자의 이름이 들어가고 상견례라면 백년해로의 의미가, 생신이라면 건강의 의미가 포함되도록 문구를 짜 디자인 팀과 함께 이벤트 라벨을 만들었다. 그리고 라벨만으로는 아쉬움이 있어 남대문에 있는 지물사를 돌아다니며 외관을 꾸며 줄 한지와 끈을 찾아다녔다. 그 사이 영업팀 과장님은 한정식 브랜드 몇 곳의 문을 두들겼고, 결국 한 매장에서 프로모션 시범 운영을 하게 됐다.
매장에서 매주 수요일에 리스트를 공유해주면, 사무실에서 이름이 들어간 라벨을 만들고 한지 포장된 백세주를 준비해 금요일에 가져다주는 패턴이 반복됐다. 그렇게 두 달 반이 지나자 그간 반응이 좋았는지 거래처에서는 전국에 있는 매장으로 프로모션을 확대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렇게 2017년 4월, 라벨 프로모션은 본격적으로 시행됐고, 4년째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마케터의 일>이라는 책에는 마케팅 ROI를 측정하는 건 어렵기 때문에, 다른 브랜드가 벤치마킹하거나 주변 사람들에게 그 활동이 회자되는 것으로 어느 정도 성공 여부를 가늠할 수 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나도 이 프로모션을 진행하고 주변 지인들로부터 두 차례 피드백을 받았다. 상견례를 했는데, 본인들의 이름이 적혀 있고 백년해로를 기원한다는 메시지가 담긴 백세주를 받아 좋았다면서. 그들의 핸드폰 사진 속에 찍혀 있는 백세주를 함께 보며 이 프로모션이 제법 성공적이었음을 실감하게 된다.
블로그나 인스타그램, 웨딩 카페에는 상견례 후기가 자주 올라오고, 백세주도 많이 언급된다. 센스 있고 특별한 선물이었다는 멘트와 함께. 후기를 읽다 보면 괜히 마음이 따뜻해지기도 한다. 누군가의 인생 변곡점에서 백세주가 조금이나마 힘을 더한 것 같기 때문이다. 얼마 전에는 상견례 시장을 평정한 백세주라는 말까지 들었다. 그런 흔적들에서 지난 노력이 흩어지지 않고 잘 쌓여 왔음에 안도하게 된다.
백세주 라벨 마케팅이 왜 잘 풀렸을까, 자문해본다. 백세주가 가진 의미가 매장을 찾는 고객들의 상황과 잘 맞아떨어졌다. 소중한 가족의 건강을 바라는 순간, 새로운 가족을 맞이하고 새로운 출발을 하는 그들이 오래 행복하길 바라는 마음과 백세주가 잘 어울렸다. 또, 서로 득이 되는 구조였다. 매장에서는 좋은 서비스를 제공함으로써 입소문이 나 예약이 증가하는 효과가 있었고, 우리는 백세주 판매가 늘었으니 꾸준히 진행될 수 있었다. 거기에 하나 덧붙이자면, 해보고자 하는 이들이 모였기에 잘 풀리지 않았나 싶다. 테스트 매장의 점장님은 의욕적인 분이었고, 당시 매출이 하향세였기에 무엇이든 해보고자 하는 의지가 강했다. 나 역시도 마케터가 되긴 했는데, 하는 것마다 잘 풀리지 않아 성취의 경험이 간절했다. 영업팀 과장님은 회사에서 성실하기로 유명했으니 시작점에 모인 사람들의 구성이 좋았다.
프로모션 진행에 크게 기여한 과장님의 이야기를 좀 더 해야 할 것 같다. 나는 그를 되게 만드는 사람이라고 칭한다. 쉽지 않은 오더가 떨어져도 곧잘 성과를 만들어 내는 그를 보면 저절로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 그가 좋은 결과를 만드는 건 어떻게든 되게 만든다는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인 것 같다. 그는 성과를 위해서 이런 것까지 해야 하나 싶은 것까지 한다. 사실 라벨 프로모션을 처음 테스트한 곳은 한 일식 브랜드의 매장이었는데, 나는 그가 매장과 좋은 관계를 쌓기 위해, 또 매장이 돌아가는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주말에 그곳에 출근해 온종일 설거지를 도운 걸 알고 있다. 보통의 직장인이라면 ‘내가 이런 거까지 해야 해?’라고 짜증 낼 법한 것까지 하는 그는 한다. 그래서 그가 맡으면 일이 풀린다. 백세주 라벨 프로모션도 그런 그의 성실함에 큰 빚을 지고 있다.
글을 쓰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왜 많은 일이 잘 안 되고 마는 것일까? 그건 하고자 하는 마음이 모이지 않았기 때문 아닐까? 회사에 다니며 ‘전략’, ‘브랜드’ 같은 대단한 단어가 붙은 팀에서 계획을 내리지만, 실행 부서에서 현장과 동떨어진 얘기라고 불만하며 일이 틀어지는 모습을 많이 보았다(내 이야기이기도 하다...). 기획과 실행의 괴리를 보며 공감을 이루는 사전 작업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또, 안 되는 이유만 찾는 사람들과 그 과장님을 함께 떠올리며 어떻게든 해내겠다는 자세가 커다란 차이를 만들어낸다는 사실 또한 깨닫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