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의 실현 가능성을 높이는 한 가지 방법
팀에 인턴이 온 적이 있다. 기간은 한 달 반. 보통 인턴에게 제대로 된 일을 맡기지 않기 때문에 인턴 경험을 통해 무언가를 배우기가 쉽지 않은 법인데, 기간마저 짧았으니 그 시간 동안 그녀가 얻은 건 별로 없었을 것 같다. 게다가 팀이 인턴을 받은 건 처음이라 그 시간을 능숙하게 끌고 가지 못했다. 배움이 아닌 체험의 시간, 그녀가 분명하게 경험한 건 점심 메뉴를 정하는 일의 피곤함과 회식의 즐거움 정도가 아니었을까.
어쨌든 그러던 어느 날, 팀장님이 그녀에게 일 하나를 시켰다. 출시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유산균 막걸리의 장점을 소개하는 콘텐츠 구성안을 짜보라는 업무였다. 그리고 결과물이 괜찮으면 회사 페이스북 페이지에 올릴 거라는 이야기도 덧붙였다. 몇 시간 동안 ‘나는 아무 생각이 없다. 왜냐하면 아무 생각이 없기 때문이다.’라는 표정을 짓던 그녀는 갑자기 아이디어가 떠올랐는지 맞은편에 앉아있던 내게 물었다.
"선배님, 유산균이 장에 좋으니 장 운동을 주제로 영상을 만들면 어떨까요? 장 운동법을 영상으로 찍어서 올리는 거죠."
회사 생활을 하며 느낀 바가 있던 나는 대답했다.
"네, 좋죠. 뭐든 좋으니 구체적으로 구성안을 짜 봐요. 샘플 영상 같은 걸 만들어봐도 좋고. 그렇게 구체적으로 그림을 그려 보면 알게 될 거예요. 이 아이디어가 쓸 만한 건지 아닌지."
마케터가 되고 몇 해 동안은 두루뭉술한 제안을 주로 했다(지금도 그런 편이긴 하지만). 우리도 바이럴 영상 만들어 볼까요? 요즘 스페셜 디자인 많이들 내니까 우리도 해보면 어떨까요, 같은 제안들. 나는 말을 뱉으며 백지에 가까운 도화지를 내놓았고, 디자이너든 연구원이든 대행사든 누군가가 그 도화지에 아름다운 그림을 스케치하고 예쁘게 색칠해주길 바랐다. 하지만 그런 대강의 스케치로 일이 진행되기 어렵다는 것을 날리자마자 고꾸라지는 종이비행기 같은 일들을 마주하며 깨달았다. 기획자의 기획은 아주 구체적이어야 했다. 특히, 예산과 인력이 부족해 다른 이의 도움을 받기 어려운 작은 회사의 기획자라면 더더욱 그래야만 했다. 그림을 대신 그려줄 사람이 없기에 내 상상의 완성도가 곧 결과물의 완성도였다.
그 후로 어떤 기획을 할 때마다 결과물을 구체적으로 상상하며 그려보려고 노력했다. 스페셜 디자인 프로젝트를 시작할 때에는 디자인 의뢰를 하기 전에 생각하는 방향을 대강이라도 그려본 다음 가능성이 있겠다 싶은 것을 의뢰했고(포토샵을 다루지 못하기 때문에 그림판과 파워포인트를 활용해 어설프게 흉내 내본 것이긴 하지만), SNS 계정을 시작할 때는 구체적인 콘티 열 편을 만들어 본 다음 할 수 있겠다 싶어 기획안을 보고했다. 구체적인 상상은 아이디어가 생각처럼 잘 풀릴지 아닐지 가늠해볼 수 있는 잣대가 되었고, 그 과정에서 가능성을 발견했다면 자신이 생겨 일을 추진할 때도 힘이 있었다.
구체적으로 결과물을 상상할 때, 그걸 경험하는 소비자의 반응까지 상상해보는 것도 필요하다. 스페셜 디자인 제품이라면 그걸 본 소비자가 어떤 멘트와 함께 사진을 올릴지 생각해보고, SNS라면 이 콘텐츠를 본 팔로워들이 어떤 댓글을 남길 것인지 예상해보는 것이다. 오프라인 프로모션이라면 그 공간을 경험한 고객이 블로그에 어떤 내용을 적고, 어떤 사진을 찍어 올릴지, 또 어느 부분에서 특히 좋았다는 코멘트를 남길지 미리 추측해 보는 것이다.
아무래도 기획을 하다 보면 자신이 만든 생각의 늪에 빠져 객관적으로 일을 바라보기 어렵다. 나의 기획을 계속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는 건 불편한 일이기 때문에 마음은 재빨리 합리화해버리곤 ‘이 정도면 괜찮지. 훌륭하지!’ 생각하게 만든다. 기획안이 통과된 이후부터는 앞만 보며 뛰어가는 경주마처럼 실행이란 이름의 트랙을 달리느라 바쁘다. 그렇기에 일의 중간중간 반응을 상상하는 일이 필요하다. 다른 사람의 시선으로 기획안과 진행 상황을 살펴보다 보면 힘을 줘야 하는 핵심 아이디어가 무엇인지, 또 보완해야 할 부실한 뼈대는 어디인지 어렴풋이나마 보이게 된다.
실제로 내가 독자라고 가정하고 SNS 콘텐츠에 어떤 댓글을 남길지 상상했을 때, 쓸 말이 쉽게 떠오르지 않는 경우에는 언제나 반응이 신통치 않았다. 또, 이벤트 상품을 준비했지만, 나부터 ‘존예’라는 말이 나오지 않을 때에도 소비자 반응은 절간처럼 고요했다.
예전 어느 다큐멘터리에서 한 회사의 회의실을 보여준 적이 있다. 회의실 한쪽 벽에는 몇 년 후 날짜가 적힌 가상의 신문 기사가 붙어 있었고, 인터뷰 형식으로 된 그 기사에는 매출이 얼마가 됐고 성장을 위해 어떤 전략을 세워 어떤 행동을 했는지 제법 구체적으로 적혀 있었다. 어렴풋한 기억이지만 인터뷰에 참여했던 회사 구성원들은 그 미래 기사가 일종의 가이드 역할을 하기 때문에 일할 때 도움이 된다는 식으로 말을 덧붙였다.
그 방법론이 꽤나 유용해 보여 나도 일을 하며 미래의 성공 기사를 작성해 보곤 했다. 어떻게 이 프로젝트를 기획하게 됐는지, 또 어떤 점이 소비자에게 어필했는지, 그리고 앞으로는 무얼 할 것인지, 워드 프로그램을 열고 두서없이 적어 본 것이다. 그럼 여지없이 막히는 부분이나 앞뒤 논리가 어색한 지점이 보이기 시작했고, 어떻게 수정하고 보완할지 고민하는 시간을 갖곤 했다.
어쩌면 그건 전통 칼을 만드는 과정과 비슷할지도 모르겠다. 불에 달구고 식혔다가 망치로 두들기기를 반복하며 칼이 단단해지듯, 구체적인 미래를 상상하고 글로 적어보는 일은 빈틈을 확인하고 채우면서 아이디어가 더 단단해지는 시간이었다. 물론 그 과정에서 흩어지고 버려지는 생각도 적지는 않았지만, 살아남은 것들은 꽤나 튼튼해져 쓸만한 기획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