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때 좋은 브랜드란 사명감과 선한 마음으로 세상의 잘못된 관행을 고치고, 따뜻한 세상을 만드는 데 기여하는 브랜드라고 생각했었다. 허나 회사 생활을 하고 다양한 브랜드를 접하고 나니 그런 브랜드는 유니콘 같은 것이란 걸 알게 되었다. 현실에는 없고 상상 속에만 존재하는 가상의 존재. 브랜드의 철학, 사명감은 현란한 수사로 포장되어 홈페이지 속 문구로만 박제되어 있는 경우가 많았고, 이윤을 내야 하는 기업에서 원칙이니 철학이니 하는 것들은 경쟁, 시장 상황, 원가, 손익 같은 이슈로 쉽게 흔들렸다. 이상형의 기준이 너무 높아 아무도 만나지 못하는 사람처럼 손에 좋은 브랜드의 후보는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그래서 그 뒤로는 선함, 사명감 같은 홀리한 단어들은 구석으로 제쳐두고 스타일이 뚜렷한 브랜드가 좋은 브랜드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유머와 위트가 느껴지는 배달의 민족, 차분하면서도 정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무인양품처럼. 남들과 구분되는 스타일에서 선호가 생기고 브랜드와 결을 함께 하는 팬도 생기는 법이니 그것만으로도 충분하고 이미 대단한 브랜드라는 생각이 든다.
몇 해 전, 연차를 소진하려 다녀온 제주에서 특색 있는 브랜드를 하나 만났다. 성산일출봉 근처에 있는 <플레이스 캠프 제주>라는 호텔이었는데, 호텔은 중앙 광장을 중심으로 이층짜리 붉은 벽돌 건물 두 동이 자리 잡고 있었고, 그 건물을 모던하고 심플한 회색 톤의 숙소 3동이 간격을 둔 채 둘러쌓고 있었다. 보통의 호텔이 하나의 건물과 호사스러운 인테리어를 통해 말을 건넨다면, 이곳은 건물과 건물 사이 여백과 공간감으로 먼저 말을 걸어왔다. 여기에서 여유롭고 경쾌한 시간을 보내라고.
플레이스 캠프 제주의 슬로건은 ‘NOT JUST A HOTEL’ 이었다. 그들은 정적인 휴식공간으로서의 호텔이 아닌 놀이터로서의 역할을 추구한다. 그리고 그런 지향점에 맞춰 중앙의 붉은색 벽돌 건물에는 ‘도렐’ 카페와 ‘스피닝 울프’ 펍을 두어 교류와 만남의 장소가 되게끔 공간을 구성했고, 투숙객들이 참여하고 즐길 수 있는 다양한 액티비티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아침에는 요가 수업이 있고, 오후엔 드립 커피, 저녁에는 칵테일 클래스가 진행되며, 틈틈이 재주의 오름을 함께 오르는 행사나 자전거 투어도 진행되는 식이다. 주말에는 플리 마켓이 열리고 종종 공연이나 강연 같은 문화 행사도 개최된다. 이곳의 이름을 처음 알게 된 것도 서점 <북바이북>과 함께 했던 북바이북 투고라는 강연과 여행이 결합된 1박 2일 프로그램을 통해서였다. 그들이 공간을 구성한 방식과 행동에서 정적인 휴식이 아닌 캠프라는 놀이 공간으로서의 지향점과 스타일이 잘 드러났고, 비슷비슷한 숙박 경험 속에서 그들만의 독특하고 확고한 스타일은 기분 좋은 뒤끝을 남겼다.
마포에 위치한 카페 <프릳츠>에서 보내는 시간은 언제나 만족스럽다. 내부 원목 인테리어가 주는 푸근함도 좋고, 무대에 오른 배우처럼 가게 중앙에서 열정적으로 커피를 만드는 바리스타의 에너지도 좋다. 물론 빵과 커피의 맛 또한 훌륭하다. 미각이 둔감해 섬세한 맛의 세계를 이해하지 못하긴 하지만, 내게도 나름 커피 기준이 있다. 원두를 너무 세게 볶아 커피에서 탄 맛이 느껴지면 아쉽고, 끝에 고소한 맛이 은은하게 느껴지면 만족스럽다. 산미가 있는 커피도 곧잘 마시지만, 너무 과하면 불편하다. 매장과 집에서 내려 마신 프릳츠의 원두는 어느 종류를 선택해도 나의 소소한 커피 기준 정도는 가볍게 충족시켰고, 맛도 참 좋았다.
<프릳츠에서 일합니다>라는 책은 지식 콘텐츠 플랫폼 폴인에서 프릳츠의 김병기 대표를 비롯하여 여러 명의 프릳츠 구성원들과 진행한 인터뷰를 정리한 책이다. 그 안에는 그들이 일하는 방식, 조직 문화, 복지 제도 같은 내용도 다루지만 그들이 추구하는 맛에 관한 이야기도 적혀 있다. 프릳츠가 지향하는 맛은 깔끔한 단맛이다. 원두가 가진 미세한 단맛을 살리면서, 마치 물을 마신 듯 깔끔한 끝 맛을 구현하는 것에 모든 프로세스가 맞춰져 있다고 한다. 그래서 커피 고유의 당도를 최대한 끌어낼 수 있는 생두를 고르고, 그에 알맞은 방법으로 로스팅과 추출을 한 다음 매일 에스프레소 테이스팅을 하며 품질 관리를 한다고 한다. 그들이 이야기하는 깔끔한 단맛을 둔감한 미각의 소유자인 내가 충분히 느꼈는지 자신 있게 답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언제나 만족스러운 경험을 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그들이 자신만의 기준을 만들고 꾸준히 유지해 온 덕분이라는 생각은 어렴풋이나마 하게 된다.
먹고 나면 항상 기분이 좋아지는 브랜드가 있는데, 내게는 아이스크림 브랜드 <젤라티 젤라티>가 그렇다. 서교동에서 시작해 지금은 이태원, 고속터미널, 스타필드 하남 등 다양한 곳으로 확장한 젤라티 젤라티의 아이스크림은 무척이나 맛있다. 아이스크림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맛을 내기 위해 어떤 요령과 기술이 필요한지 알지 못하지만, 젤라티 젤라티의 아이스크림을 한입 베어 물면 진한 맛이 느껴지고 재료를 아낌없이 넣어 진하고 풍부한 맛을 구현했다는 것이 입 안 가득 전해진다. 진함으로 대표되는 그들의 스타일은 십여 가지 정도 되는 아이스크림 종류에 일관성 있게 적용되어 어떤 맛을 선택해도 크게 실패하거나 실망스러운 경험을 하는 일이 없다.
일관된 스타일을 갖춘 브랜드, 기분 좋은 경험을 했던 공간에 관해 글을 적다 보니 결국 그 스타일을 만들고 유지하게 만든 최초의 생각, 철학으로 사고의 주제가 옮아가게 된다. ‘우리는 누구이며, 무엇을 지향하는가?’에 관한 대답에서 결국 스타일이 시작되는 법이니까. <매거진 B> 무인양품 편에도 비슷한 생각을 하게 만드는 내용이 있어 그 문구를 적으며 글을 마치려고 한다.
“브랜드가 스타일이 만든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이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무엇을 하고자 하는지 명확한 의지가 있는 기업은 흔들림이 없죠. 굳은 신념으로 사업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고유의 스타일이 형성되고요. (중략) 가장 기본적인 생활환경을 제공하려는 자세에서 '이것으로 충분해'라는 개념이 태어날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차분함이나 믿음직스러움 등으로 표현되는 무인양품의 분위기는 그런 굳건한 사상을 통해 자연스럽게 형성되죠.” (프리랜스 바이어 야마다 유 인터뷰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