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의 맛을 더하는 결정적 한 수
지금은 종영한 프로그램이지만, 올리브쇼에는 제법 유명한 셰프들이 출연해 요리를 하다 말고 이상한 포즈를 취한 채 ‘셰프의 킥’이라고 외치곤 했다. 닭의 모습을 CG로 덧댄 채 꼬꼬댁 소리를 내다가 말하는 경우도 있었고, 무술인처럼 다리를 굽혀 자세를 낮춘 다음 앞치마를 좌우로 펄럭이다 조용히 읊조릴 때도 있었다. 돈 잘 버는 오너 셰프들의 우스꽝스러운 몸짓에 ‘저렇게까지 망가질 필요가 있나?’ 싶다가도 방송의 재미를 더하고 개인 브랜드를 키우기 위해 제 한 몸 기꺼이 희생하는 그들의 프로 정신에 감탄하기도 했다. 어쨌든 그들은 요리에 들어갈 중요한 재료나 특별한 조리법을 소개하기 전에 그런 현란한 몸짓을 선보였고, 셰프의 킥은 요리의 맛을 더하는 결정적 한 수, 특별함을 만드는 셰프의 비법을 소개하는 표현이었다. 동남아 음식의 맛을 제대로 구현하기 위해 양념 고기 소스에 레몬그라스를 다져 넣거나, 토마토로 만든 독특한 라면에 식초 한 스푼 더해 산미를 끌어올리는 것 같은 게 그들이 소개한 킥이었다.
그 몸짓이 퍽 인상적이었는지, 그 외침은 내게 흘러와 마케터의 기획에도 셰프의 킥처럼 완성도를 높이는 결정적인 한 방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마케터의 킥이라고나 할까? 그것은 시장 판도를 바꿀 신제품의 차별화 요소일 수도 있고, 핸드폰을 보느라 무심코 지나치게 되는 버스 정류장이나 지하철 광고 속 눈길을 끄는 어떤 장치일 수도 있고, 유튜브 광고를 스킵 없이 보게 만드는 유머일 수도 있다. 또, POP 한 구석에 적혀 있는 유쾌한 멘트나 무사통과를 기원하며 보고서에 덧붙이는 인상적인 그림처럼, 아주 사소한 것일 수도 있다.
마케터의 킥을 생각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풀무원 얇은피 꽉찬속 만두다. 사실 이 제품을 누가 기획했고, 그 과정에 마케팅팀의 기여가 어느 정도인지는 전혀 알지 못한다. 어쨌거나 비비고로 대표되던 냉동만두 시장에서 단숨에 2등 제품이 된 풀무원의 새로운 만두 브랜드와 “우리도 이런 제품을 만들 기술은 있는데 우물쭈물하다 좀 늦었어요”라고 변명하듯 미투 제품을 쏟아내는 경쟁사의 분주함을 보며, 마케터라면 변화의 화두를 던질 줄 알아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그건 마케터가 할 수 있는 가장 화려하고 아름다운 킥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시장 판도 같은 거창한 단어를 운운하지 않더라도 컨셉에 재미와 생동감을 더하는 아이디어도 마케터의 킥이다. 일반적인 소시지보다 더 큰 제품을 기획하며 서장훈 씨를 모델로 한 슈퍼롱 소시지가 바로 그 예라고 할 수 있다. 이 제품을 출시하며 big, long 같은 수식어로 평범하게 소비자에게 다가갔다면 아쉬움이 있었을 텐데, 전 농구선수이자 방송인 서장훈을 모델로 내세우고, 그의 키(207cm)에 맞춰 제품의 크기도 207mm로 맞추니 퍼즐이 딱딱 맞춰진다. 완성된 퍼즐 속 그림도 빈틈없이 훌륭하다.
또, 편의점 도시락을 먹다 보면 반찬이 부족해 밥을 남기곤 했는데, 그런 아쉬움을 알았는지 GS25에서는 반찬이 많은 담긴 도시락을 내놓았다. 이때도 반찬이 이것저것 많이 들어 있어요, 푸짐한 도시락이에요, 라고 어필했다면 힘이 약했을 텐데, 이름에 ‘찬’이 들어가고 투머치 토커로써 과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박찬호를 모델로 내세워 ‘찬 많은 도시락’이라고 명명하니 특별함이 생긴다. 도시락 겉면에 붙어있는 그의 얼굴과 반찬을 소개하는 길고 깨알 같은 수식어를 보며, 화룡점정이 어떤 느낌인지 실감하게 된다.
광고에서도 작지만 맛깔스러운 아이디어가 오래도록 인상을 남기곤 하는데, 최근에 본 정관장 광고가 그렇다. 명절에 유명 배우들이 나오는 정관장 광고를 보는 일은 명절 어르신들로부터 이런저런 잔소리를 듣는 것처럼 반복되는 일이지만, 이번에는 한 끗이 달랐다. 2020년 설 광고에는 숫자 2020 앞 두 글자를 좌우로 뒤집어 데칼코마니처럼 겹쳐진 숫자 2로 하트 모양을 만들고는 “20년 설에는 정관장으로 사랑의 마음을 전하세요”라고 말한다. (마케터라서 더 그런 것이겠지만) 생각지 못했던 기발한 센스에 감탄해 이번 명절에는 왠지 정관장 선물세트를 사야 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간 일을 하면서 많은 기획안을 작성했고, 대부분 한두 번 물수제비를 일으키고 사라지는 조약돌처럼 별 성과 없이 끝이 났다. 그런 경험을 통해 배운 것은 차이를 만드는 한 방, 한 끗의 필요성이었다. 뻔한 포스터를 제작하고 재미도 감동도 없는 프로모션을 진행하며 일상 같은 평범함에 변화를 줄 다름에 대해 자주 생각했고, 그것이 마케터의 킥이라는 생각에 다다랐다. 그래서 요즘 보고서를 쓸 때면 이번 기획에서 내가 내세울 킥이 무엇인지 고심하곤 한다.
유명한 대중가요 작곡가 김도훈이 쓴 <김도훈 작곡법>이란 책에는 ‘이름 붙이기’라는 말이 나온다. 이름 붙이기란 그가 기존 음악이론에 자신만의 이름을 별명처럼 붙이는 행위를 뜻하는데, 그렇게 나만의 이름을 붙일 때 책 속의 이론이 활자로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지상계로 내려와 실제 작업에 적용될 수 있다고 그는 설명한다. 마케터의 킥이라는 용어 역시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며, 브랜드 이론에서 말하는 Core Value나 커뮤니케이션 기획서에 적힌 Key Idea와 같은 의미이다. 어쩌면 그것보다 더 유연하고 포괄적이어서, 귀에 걸면 귀걸이고 코에 걸면 코걸이인 표현일 수도 있다.
그렇게 나는 두루뭉술한 나만의 이론 하나를 만들어 두고, 신제품을 구상하고 프로모션 기획서를 쓰며 이번에 내세울 마케터의 킥이 무엇인지 생각한다. 남과 다르게, 전보다 낫게 할 아이디어가 없을지 머리를 쥐어짜 본다. 물론 늘 비법이 있을 순 없고, 솔직히 지난 방식을 반복하며 ‘허허 마케터의 킥이란 게 있어야 하는데...’라며 머리를 긁적이는 게 대부분이긴 하다. 그래도 마케터의 킥에 대한 생각만큼은 놓지 않고 꾸준히 쥐려고 하고 있다. 사소한 아이디어라도 더하려는 노력이 쌓이면 뇌에도 근육이 생겨 언젠가는 제법 빛나는 기획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으면서. 그렇게 제법 커진 근육으로 유려한 곡선을 그리며 골문을 향하는 멋진 킥을 때릴 날이 올 거라고 희망 섞인 상상을 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