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세주 담당자의 사적인 계정
국순당 백세주. 지금 다니는 회사와 담당하는 브랜드의 이름이다. 어디 가서 자기소개를 했을 때, 금은방이냐는 질문을 받거나 빵집으로 오해하는 이들이 없었던 걸 보면 제법 알려진 기업이자 브랜드라고 생각된다. 백세주는 2000년대 열풍이 불었던 제품으로 여전히 존재감은 크며, 많은 슈퍼와 가게에서 판매되고 있다.
그래도 전성기가 지나 “라떼는 말이야”라는 말이 어색하지 않은 상황이 된 만큼, 담당자로서 어떤 일을 벌이기가 어려운 브랜드긴 하다. 새로운 브랜드야 신제품이 나왔다면 무조건 반기고 보는 이들도 있고, 시음 행사를 통해 사람들을 만나 백지상태인 그들의 인식에 무어라도 남기면 성과가 되겠지만, 이미 사람들의 마음속에 어떤 그림이 그려져 있는 백세주 같은 경우에는 그 위로 덧칠을 해야 하는 상황이니 아무래도 난이도는 높아진다. <목어>라는 책에도 브랜드 재활성화에는 열 배의 자원이 필요하다는 내용이 나오지 않던가. 아무튼 그런 쉽지 않은 브랜드의 바통이 몇몇을 거쳐 어리바리하게 서성대던 내게 쥐어졌다.
백세주를 담당한 지는 햇수로 5년이 다 되어 가고, 그 시간 동안 나는 주로 헤맸다. 브랜드가 나아갈 방향성과 그것에서 파생된 활동 계획을 잡긴 어려웠고, 지시를 받아 수행한 일의 결과도 신통치 않았다. 그래도 뒷걸음질 치다 쥐 잡은 격으로 드문드문 성과가 있긴 했는데, 그중 하나가 백세주 인스타그램이다. ‘백세주 담당자의 사적인 계정’이란 이름으로 운영되고 있는 계정은 글을 쓰고 있는 현재 팔로워 수가 8,300명 즈음 된다. 몇만, 몇십 만 팔로워를 보유한 브랜드가 수두룩하기에 이 숫자를 듣고 “에게...” 하며 얕볼지도 모르겠다. 뭐, 나부터도 어디 내놓기에 멋쩍은 숫자라고 생각한다. 그래도 좋아요의 숫자나 댓글의 내용 측면에서 수치와 피드백은 괜찮은 편이라서 나름 건강한 계정이라고 쑥스럽게 덧붙이고 싶긴 하다.
인스타그램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상사가 시켰다거나 디지털 커뮤니케이션에 자신이 있었다거나 한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개인적으로 SNS를 하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그 세계는 두려움의 영역이었다. 그럼에도 발을 떼게 된 건 절박함 때문이었다. 왜 그럴 때가 있지 않은가? 반복되는 실패에 자신감은 떨어지고, 그것이 점점 새로운 도전 앞에서 머뭇거리게 만들 때가. 난파선처럼 침몰하는 것 같다는 불안감 속에서 악순환의 고리를 끊겠다며 발악하듯 시작한 것이 바로 백세주 인스타그램이었다.
SNS 계정을 운영할 때 가장 중요한 질문은 ‘어떤 컨셉, 어떤 스타일의 콘텐츠로 계정을 끌고 나갈 것인가?’이다. 브랜드의 제품 라인이 단순한 경우, SNS 운영은 정말 어렵다. 29cm, GS25 같은 유통 브랜드라면 신제품을 소개하고, 할인행사를 소개하는 것만으로 소비자들이 좋아하는 콘텐츠를 만들 수 있다. 화장품 브랜드처럼 제품군이 다양하다면 그만큼 말할 거리도 풍부하다. 한두 가지 제품만 있는 경우, 좀처럼 이야깃거리를 만들기 어려운 법이고, 그래서 많은 주류 브랜드들이 가을이면 낙엽이랑, 겨울이면 눈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어 올리곤 신통치 않은 반응을 얻게 된다. 백세주만으로 매주 하나의 콘텐츠를 올리는 게 불가능하다는 걸 깨달은 나는 백세주의 이야기와 함께 주류회사에 다니는 마케터로서의 일상을 이야기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직장인이란 소재는 공감대가 높은 키워드였고, 주류 회사의 이야기는 신선한 면이 있었다. 마침 <사람들은 어떤 브랜드에 끌리는가>라는 책에는 유능함 뿐만 아니라 친근함도 중요한 매력 포인트라는 이야기가 적혀 있었고, 이 방향이라면 승산이 조금은 있어 보였다.
그렇게 정한 컨셉이 ‘백세주 담당자의 사적인 계정’이었다. 컨셉을 정한 뒤 어떤 스타일로 콘텐츠를 꾸려갈지 고민했는데, 처음 떠오른 생각은 시조였다. 그 생각의 흐름은 대충 이렇다.
이건 혼자서 끌고 갈 계정이다
→ 나는 사진을 못 찍는다... 글쓰기는 아주 엉망은 아니다.
→ 인스타를 찾아보니 텍스트 위주로 운영되는 계정이 제법 되고 개중에는 계정 규모가 큰 경우도 많다
→ 그럼 나도 글로 써보자
→ 글로써 남들과 좀 다르게 할 방법은 뭐가 있을까?
→ 음, 시...시조?
시조라는 형식은 전통에 기반을 둔 백세주와 어울리는 형식이었고, 무엇보다 남들과 달랐다. 그렇게 나는 <백세주 드’시조’>라는 타이틀로 시조 몇 편을 어쭙잖게 써서 올렸다. 적자니 부끄럽지만 대충 이런 내용이었다.
국순당가 : 술 마시길 좋아하여 국순당에 입사했다 / 하지만 아침부터 술 시음이 웬 말인가 / 공복에 마신 한 잔 술에 아침부터 저녁 같다 하노라
시조를 올리고 신선하다, 새롭다, 응원한다는 댓글을 받기도 했지만, 몇만 원어치 광고를 해보고 깨달았다. 이 방향으로는 쉽지 않다는 걸. 시조는 달랐지만, 다르기만 했다. 힘이 약했다. 텍스트라는 형태와 시조라는 형식은 재미 면에서 임계치를 넘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또, 근본 없이 시조를 쓰고 있는 나의 얕음을 생각했을 때 지속성을 담보하기 어려웠다. 머잖아 좀처럼 나아지지 않는 반응에 스트레스를 받고, 또 시조가 잘 써지지 않는다며 한 번 더 스트레스 받을 미래의 모습이 상상됐다.
그때 눈에 들어온 것이 인스타툰이었다. 인스타그램에는 일상의 이야기를 짤막하게 그려 올리는 작가들이 많았고, 그것이 가진 짧은 길이와 보기 편한 가벼움은 플랫폼과 제법 잘 어울렸다. 이 형식이 주류회사 직장인으로서 경험한 이야기를 올리겠다는 계정의 방향성과 잘 어울리는 듯했고, 사람들의 반응을 봤을 때도 가능성이 있어 보였다. 적어도 시조보단 낫겠다 싶었다… 마침 따뜻한 이야기를 담백하게 그려 올리는 원동민 작가를 알게 되었고, DM을 보내 그와 강남역에 있는 커피숍에서 만났다. 그에게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말을 건넸고, 미리 짜둔 구성안도 10편 정도 보여줬다. 다행히 그는 기획안에 관심을 보였고, 이후 회사에 SNS 계획을 보고해 결국 허락을 받아내게 된다.
우리의 작업 방식은 대충 이렇다. 우선 내가 파워포인트로 콘텐츠 구성안을 만든다. PPT 슬라이드에 컷 별로 들어갈 글과 대사를 적는다. 그림은 전혀 못 그리기 때문에 등장인물은 원으로 표시한 다음 거기에 ‘백세주 담당자’, ‘팀장님’ 같은 구분 값을 적어둔다. 때로는 어떤 표정을 짓고 있다는 설명을 써놓기도 한다. 그렇게 짠 구성안을 메일로 보내면 원동민 작가가 그림으로 구현해준다. 어떤 콘텐츠에는 공감대가 별로라며 보완을 요청하기도 하고, 어떤 구성안에는 중간에 설명하는 컷 하나가 추가되면 좋겠다고 제안하기도 하면서. 이런 식으로 그와 함께 2년 동안 100편의 콘텐츠를 함께 만들어 올렸다. (그와 협업을 하며 길게 통화를 한다거나 서로 짜증 내는 일 없이, 원활하게 일을 해왔다는 것에 나름 자부심을 느낍니다)
퇴사한 회사 선배 하나는 백세주 인스타그램을 보고 “드디어 네 재능을 찾았구나.”라고 말했다. 직장인으로서 재능 운운하는 말을 들어본 건 처음이라 기쁜 마음이 들기도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재능 같은 건 있을 리도 없고, 있다 하더라도 만화방에서 쌓은 얄팍한 경험치라 큰 도움이 됐을 리가 만무하다.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건 절박함 덕분이다. 처음에는 무어라도 시도를 해야 마케터로서 성장할 수 있다는 절박함이 있었고, 시작하고 난 다음에는 계정의 흥망성쇠를 홀로 짊어진 사람으로서 어떻게든 잘 돼야 한다는 절박함이 있었다. 스스로의 기획으로 벌인 일이기에 뒷수습도 내가 감당해야 할 몫이었다. 누군가가 시켜서 했다면 “해보니까 잘 안 되네요. 이런저런 문제가 있어요.”라고 실패의 말을 뱉을 수도 있을 것이고, 함께 하는 누군가가 있었다면 ‘나 좀 쉴래. 피곤해... 누군가 대신해주겠지.’ 하며 회피의 마음이 슬금슬금 생겼을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이 일만큼은 그럴 수 없었다.
며칠 전 2020년 첫 번째 콘텐츠를 올렸고, 역대 가장 적은 수의 ‘좋아요’를 받았다. 이런 저조한 반응을 겪고 나면 위기감이 엄습한다. ‘2년 동안 비슷한 결의 내용을 올렸으니 사람들도 슬슬 지루하겠지? 그럼 난 어떻게 해야 하지? 어떻게 변화를 주고, 어떤 새로움을 더해야 하지?’ 계속 고민한다. 느슨해진 끈을 조여 열심히 해보자는 각오도 다진다. 늘 뾰족한 답을 찾아내는 건 아니고 항상 나아지는 것도 물론 아니지만, 적어도 이런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지금까지 올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이런 마음이라서 앞으로도 조금씩은 나아갈 수 있으리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