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문제는 중요한 것이 급한 것에 자리를 내주면서 시작되는 것 같다. 오늘 뭐 먹지, 뭐 하지, 뭐하고 놀지에 너무 많은 신경을 쓴 탓에 사람들은 흔히 미래에 어떤 사람이 되어 어떤 도전을 할지, 그렇게 되기 위해 지금 어떤 노력을 쌓아갈지 생각하지 못한다. 회사에서의 모습도 마찬가지라 급한 요청, 급한 회의에 정작 중요한 일에 쓸 시간은 자꾸만 뒤로 밀리고 쪼그라든다. 그렇게 유예된 것들은 보이지 않는 부분부터 곰삭게 만들고 결국은 걷잡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만들곤 한다.
대학에서의 시간을 음주와 축구로 헛되이 보낸 나는 미래에 대한 고민과 탐색 시간을 충분히 갖지 못했다. 별 생각 없이 문과를 택했던 나는 별 이유 없이 경제학과에 입학했고, 별 고민 없이 마케팅을 미래의 진로로 택했다. 시험을 봐야 하는 것들은 준비 기간이 길어 리스크가 커 보였고 무엇보다 합격하고 난 다음에 하는 일이 따분해 보였다. 회사원으로 방향을 좁혔을 때, 재무 같은 분야는 지루한 일처럼 느껴졌고, 사람 관계에 별 재주도, 관심도 없는 탓에 인사나 영업 같은 일에도 별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 그렇게 작대기를 하나씩 긋다 보니 대충 마케팅 정도가 남았다. 마케팅의 사례로 언급되는 것이 보통 일상에서 흔히 접하고 소비하는 것이다 보니 익숙했고, 그 익숙함을 호감으로 오해했던 것 같다. 영화 상영 전에 나오는 광고도 좋아했던 나를 떠올리며 ‘맞아, 나 광고도 꼬박꼬박 챙겨보는 사람이잖아!’라고 자신의 선택을 합리화했었는데, 돌이켜보면 광고가 좋다기보다 극장에서 향유하는 여유로운 느낌적인 느낌이 좋았던 것이었다...
그렇게 방향을 결정하고 나서 나름 취업 준비란 걸 했다. 기업 입장에서는 대학생을 활용해 자신들의 제품을 홍보하는 방법이고, 대학생의 입장에서는 이력서에 쓸 거리 하나 얻는 대학생 마케팅 프로그램에 참여하기도 했고, 작은 기업에서 인턴으로 짧게 있기도 했다. <마케팅 불변의 법칙>, <보랏빛 소가 온다> 같은 고전으로 꼽히는 마케팅 책들도 제법 찾아 읽어보았다.
하버드 대학 맥클리랜드 교수에 따르면 인간의 커다란 세 가지 동기는 성취욕, 친화욕, 권력욕이라고 한다. 모든 사람이 그 세 가지를 두루 가지고 있으면서 개인마다 조금씩 편차가 있는 것일 텐데, 나는 아무래도 성취욕 쪽에 비중이 쏠린 편인 것 같다. 관계에 무심한 성격과 관심사가 생기면 거기에 빠져드는 편이란 걸 떠올리면 그런 결론에 다다르게 된다. 어쨌든 그즈음 마케팅과 관련된 책을 읽고 성공 사례를 접하며 이 성취욕이라는 것이 창작의 옷을 두르게 된다. 크리에이티브한 아이디어로 세상을 바꾼 광고인의 이야기와 시장의 판도를 바꾼 제품 기획자의 인터뷰를 접하며 나는 그들처럼 창의적인 사람이 되고 싶다는 꿈이 생겼다. 이 경향은 프레인을 창업한 여준영 대표를 온라인으로 알게 되면서 더 심해졌는데, 그가 블로그에 쓴 글을 읽으며 나도 그처럼 탁월한 통찰력과 남다른 아이디어로 프로젝트를 이끄는 유능한 존재가 되고 싶어 졌다.
그리고 이런 경향은 대학 마지막 학기에 입사지원 서류를 작성하며 정점을 찍는다. 자기소개서에는 해당 분야에 지원하게 된 계기와 향후 포부 같은 것을 묻기 마련인데, 한번 써둔 지원 동기와 미래 계획을 여러 기업에 ‘복사하기-붙여넣기’해 지원하면서 마케터의 길은 오랫동안 꿈꾸고 그려온 소명 같은 것이 되어 버렸다. 어떤 자기소개서에는 거창하게 the path for marketing이라는 제목으로 자기소개를 하기도 했는데, 이 글을 쓰며 오랜만에 다시 읽어보니 온몸이 부끄러움에 감전되는 기분이었다...
이후의 여정은 대충 이렇다. 제법 이름 있는 대기업에 입사한다. 그곳에서 나는 원하던 부서가 아닌 영업관리팀으로 배치된다. 그래도 새로 시작한 사회생활인 만큼 최선을 다해보자는 마음으로 임하지만, 점점 큰 회사에서 하는 작은 일에 지쳐 간다. 이대론 안 되겠다는 위기감에 묻지마 퇴사를 강행. 이후에 이곳저곳을 기웃거리지만, 뜻대로 잘 풀리지 않는다. 그렇게 할퀴고 긁히고 상처 입은 채 둥지를 튼 곳이 지금 다니고 있는 주류회사이고 이곳에서 나는 어시스턴트 브랜드 매니저라는 제법 그럴듯한 직함을 달고 6년째 일을 하고 있다.
그 시간 동안 하고 싶던 무언가를 하게 됐다는 기쁨과 잘하고 싶다는 의욕, 능력 부족의 슬픔과 원하는 수준에 다다르지 못하는 좌절감, 일이 잘 풀릴 때의 달콤함과 잘 풀리지 않을 때의 씁쓸함을 온탕과 냉탕처럼 오가며 보냈다. 일이란 애당초 재미없는 것이며 하고 싶은 것도 일이 되면 재미가 반감된다는 사실과 그래도 그런 부류의 일을 할 때 덜 지루하다는 사실을 함께 체감하면서.
누군가가 지나가듯 한 말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경우가 종종 있다. 내게는 2009년도에 교환학생으로 있었던 스웨덴에서 한 누나로부터 들었던 말이 그렇다. 나보다 열 몇 살은 위였던 그녀는 CJ에서 일하다 식약처로 이직했고, 그 후에 휴직한 다음 대학원 석사 과정을 밟다 이곳으로 오게 된 케이스였다. 그곳에서 수학한(정확히는 놀러 온) 몇몇 한국인들이 모여 미래 계획을 이야기하다 내가 마케팅을 언급하자 그녀는 뒷말을 흐리며 이런 말을 했다.
“마케팅이 오랫동안 할 일은 아닌 것 같던데... 회사를 자주 옮기는 경우도 많은 것 같고...”
마음속에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갑자기 차오를 때, 서른 중반임에도 벌써 세상사와 트렌드에 관심이 없어지는 나를 볼 때, 가끔 그녀의 말이 생각난다. 화려해 보이는 일일수록 수명이 짧다는 말도 자꾸 머릿속을 맴돈다.
현대카드 정태영 사장은 마케팅은 엔터테인먼트의 속성을 가지고 있고 마케터는 기본적으로 엔터테이너여야 한다는 말을 페이스북에 남겼다. 흥이라고는 하나도 느껴지지 않는 차분한 성격인 내가 마케팅이라는 일에 썩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할 때가 종종 있다. 무언가에 쉽게 열광하고 그걸 여기저기 떠들고 다니는 성격이 마케터에 적합한 듯한데, 무던한 취향과 과묵한 성향의 내가 이 일을 잘할 수 있나 싶을 때도 있다. 그러면서도 어떤 분야보다 기획과 사유에 많은 시간을 쏟는 이 일이 내 성향과 잘 맞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아주 딱 맞는 옷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에 한숨이 나오다가도 이것저것 기웃거리다가는 이도 저도 아닌 사람이 될 것 같다는 생각에 마음을 다잡곤 한다. 마침 며칠 전 영화 <백두산>에도 이런 말이 나왔다. 극 중 북한 첩자로 나오는 이병헌 배우는 구수한 이북 사투리로 말한다.
“왜 눈깔이 앞에만 있는 줄 알어? 그건 뒤돌아보지 말라는 뜻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