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멘토 인수인계론?!!
일하는 마음이라고 거창하게 제목을 붙였지만 사실 별생각 없이 일한다. 스트레칭하면서 무슨 생각을 하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무슨 생각을 해요. 그냥 하는 거죠.” 라고 답하는 김연아 선수의 짤처럼 멍한 얼굴로 내게 배달된 일들을 숙제하듯 처리한다. 사회생활을 시작할 때는 나름 포부 같은 것이 있었다. 유능한 기획자가 되어 세상에 이름 좀 날려봐야겠다는 그런 야심이. 일을 하며 자아실현 따위를 운운하기도 했다. 시간은 흐른 지금, 자아라는 것은 회사라는 공동의 작업장에서 채울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고, 회사 생활에 너무 큰 의미를 둘수록 그만큼 상처 받고 다친다는 것도 알게 됐다. 환상이란 독이 되기도 하기에, 회사 생활도 이상의 필터를 덧대어 바라보기보다 밥벌이라는 현실 정도로 치부하는 것이 오히려 마음 건강에 좋은 것 같다.
어쨌든 무덤덤하게 일하면서도 가끔 마음을 다잡을 때 떠올리는 것이 있는데, 바로 인수인계의 순간이다. 하던 일을 다음 담당자에게 넘겨줘야 하는 상황이 됐을 때 나는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그리고 그 말에 다음 타자는 어떤 인상을 받을까, 가끔 상상한다. 죽음을 떠올릴 때 반대로 삶의 답을 얻게 되듯이, 인수인계의 순간을 상상할 때 어떻게 일을 해야 할지 힌트를 찾게 되기도 하는 것 같다. 굳이 이름을 붙인다면 메멘토 인수인계랄까…?
사회생활은 업무 인수로 시작된다. 조직의 새로운 구성원이 되어 누군가로부터 일을 물려받는다. 첫 회사에서 내게 업무 인계를 해준 사수는 유능하고 똘똘한 사람이었다. 성품도 유쾌하고 활발해 사내에서 인기도 많았다. 그런 그에게 나는 하나씩 꼼꼼하게 배웠다. 그가 다른 부서로 옮기는 것이 아니라 같은 부서에 함께 근무하며 인수인계가 이루어졌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사수가 다른 팀으로 가게 되면서 짐짝 내던지듯 일을 넘겨주는 경우가 많다는 걸 생각해 보면 그렇게 오랜 기간 과외받듯이 일을 배울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었다.
회사에 다닌 지 2년 6개월이 조금 넘게 지났을 때, 건네받은 일에 스스로 기획한 조그만 업무를 더해 인수인계해 줄 상황이 생겼다. 퇴사를 앞두고 있던 순간이었다. 처음 인수인계를 받을 때처럼 정성스럽게 지금 하고 있는 일들의 목적과 배경, 진행 과정을 정리했고, 자세한 업무 현황과 소소한 노하우를 파워포인트 열 장 정도로 정리해 하루 두 시간씩 사흘에 걸쳐 인수인계를 했다. 컴퓨터에 저장된 파일들도 정말 쓸데없는 경우가 아니라면 최대한 넘겨주었는데, 사회생활 초기 부침이 심해 이 팀 저 팀으로 옮겨 다녔던 6개월 후배는 이렇게 말했다. “이 정도까지 자세하게 인수인계를 해주는 사람은 처음 봤어요. 고맙습니다.” 그 말이 떠나는 사람의 마음을 더 가볍게 만들었다. (퇴사를 앞두고 충분히 신난 상태이긴 했지만…)
인수인계를 짧은 미팅과 파일 몇 개로 퉁 치는 경우도 많다는 것을 회사를 옮기고 몇 번의 인수인계를 경험하며 알았다. “넘겨줄 자료 별로 없어요.”, “엑셀에 다 정리되어 있으니 그걸로 확인하세요.”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마주하고, 공갈빵처럼 속이 텅 빈 파일을 확인하며 인수인계는 일하는 자세에 있어 중요한 키워드가 된다. 마치 결핍에서 갈망이 탄생하듯이.
다음 사람에게 일을 넘겨줄 때 건네받은 사람으로부터 ‘그래도 이 사람이 뭔가 꾸준히 쌓아가려고 노력했구나.’라는 말을 들었으면 좋겠다. 일회용품처럼 일을 벌인 것이 아니라 매년, 매 시즌 반복하며 어떤 뼈대를 만들려고 애썼구나, 라는 평을 듣길 바란다. 번뜩이는 아이디어로 통렬한 어퍼컷 한 방을 날릴 수 있는 마케터가 되면 좋겠지만, 아직 그럴 힌트나 방법을 찾진 못했다. 그래서 나는 할 줄 아는 것이 잽밖에 없는 복싱 초보가 부지런히 원투를 날리는 마음으로 일을 해왔다. 계속되는 연타에 데미지가 쌓이듯, 매주, 매 시즌, 매년 반복하는 것에서 계획한 연상이 생기고, 긍정적인 이미지가 덧대어지길 바라면서.
지금의 회사에서 업무 인계를 한 적은 아직 없다. 처음 팀에 배치받고 나서는 기타 브랜드라고 구분되는 자투리 제품들을 담당했었는데, 해야 할 것이 별로 없기도 했고 그마저도 5개월쯤 담당하다 다른 팀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 몇 달 동안 주로 한 것은 전산 시스템을 익히고, 다른 부문과 동행하며 회사가 굴러가는 모습을 보고 배우는 일이었다. 그 후에 옮긴 부서는 브랜드 장기 계획을 짜는 신규 부서였는데, 일 년 후에 그 팀이 해체되었기 때문에 인수인계를 해야 하는 상황은 발생하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다시 브랜드 담당이 되었고, 같은 일을 5년째 하고 있다. 아직 때가 오진 않았지만, 그래도 어떤 일을 오랫동안 해왔기 때문에 슬슬 변화의 순간이 다가오고 있음을 느끼긴 한다.
그날을 상상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는 부끄러운 성적표를 들고 귀가한 자식처럼 머쓱해하는 나의 모습이다. 부모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점수를 받아 온, 착실하지만 명석하진 않은 자식의 마음으로 지난 일들을 늘어놓으며 고개가 자꾸 숙여질 것 같다. 그래도 몇몇 과목의 점수는 평균을 넘었다거나 옆집 누구보다는 나은 점수를 받았다며 힘주어 말할 것 같긴 하다. 브랜드의 활동 자산을 쌓으려고 애써온 마음과 화려하진 않지만 나름 견고한 몇몇 성과들을 말할 때는 목소리도 좀 커질 것 같다. “당신이 잘한 게 뭐가 있어?”라는 아내의 질문에 했던 이야기를 또 하고 또 하는 남편의 심정으로 조그만 성과 몇 개를 여러 번 반복해서 말할지도 모르겠다.
어쨌거나 이 글을 쓰고 나니 다가올 그날에 대비해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부끄럽지 않게. 당당할 수 있도록. 위에 썼던 메멘토 인수인계라는 말이 아주 우스갯소리만은 아닌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