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회사에 책 낸 대리님 있잖아? 그 사람이 그러는데 출판사 100군데에는 보내봐야 한대. 그래야 그중에 하나 걸리는 거라고. 그러니까 오빠도 매주 스무 군데씩 한 달 동안 보내보자."
출판사에 원고 투고를 해보겠다는 계획에 여자친구는 따뜻한 조언을 건넸다. 그 마음이 무척 고마웠지만, 다르게 접근해 볼 작정이었다. ‘우리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라는 말을 좋아하고 ‘부러질지언정 휘어지지는 않겠다’라는 좌우명을 멋지다고 생각하는 사람으로서 출판의 과정도 좀 멋이 나길 바랐다. 아무 데나 총을 쏴 대는 초짜 게이머가 아닌 때를 기다려 한 방에 끝내는 스나이퍼처럼 폼나게 일을 성사시키고 싶었다. 타깃을 세심하게 고르는 저격수의 마음으로 서점 에세이 매대를 신중하게 훑어봤고, 개중에 내가 쓴 원고와 주제가 엇비슷한 세 권의 책을 찾아 출판사의 이름과 책 앞부분에 나오는 출판사 메일 주소를 메모했다.
그러고는 집에 돌아와 ‘출간 제안서’를 만들었다. 출간 제안서 양식이 따로 있는 것 같지는 않아 내 멋대로 구성을 짰다. 온라인 서점에 들어가 아무 책이나 클릭해보면 책 이름이 나오고, 책 소개가 나오고, 저자 소개, 책 속의 주요 문장이 나오지 않나? 그 흐름에 맞춰 책의 제목을 쓰고, 책과 내 소개를 몇 문장으로 적고, 원고 중에 마음에 드는 문구를 몇 개를 골라 담았다. 책의 타깃 독자 같은 내용도 있으면 기획안이 그럴싸하게 보일 것 같아 두루뭉술한 내용으로 몇 자 보태기도 했고. 그리고 메모해 둔 출판사 세 곳에 메일을 보냈다.
다음 날, 메일함에는 새로운 메일 하나가 와 있었다. 오랜만에 쿵쾅대는 심장에게 나대지 말라고 다독이며 메일을 확인했더니 본문에는 아주 친절한 메시지가 적혀 있었다.
저희 출판사는 매주 수요일에 기획 회의를 하고 있습니다. 다음 주 회의를 마치고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출판사에서 답장을 하지 않는 경우도 수두룩하다던데, 이렇게 배려심 깊은 메일이 오네? 내 원고가 좀 괜찮은 건가?’ 잠시 자뻑에 빠졌다. 며칠이 지나 기획 회의가 있다는 수요일이 왔고, 합격자 발표를 기다리는 장수생처럼 수시로 메일함을 들락거리면서 결과 통지를 초조한 마음으로 기다렸다. 그리고 도착한 메일 한 통. 읽고 나자 눈가가 살짝 촉촉해졌다.
보내주신 내용은 내부 기획회의에서 출간 여부를 논의하였습니다. 그 결과, 아쉽게도 본 원고는 저희 출판사의 색깔이나 방향과는 맞지 않아 출간이 어렵다는 답변을 드리게 되었습니다. 출간을 반려하게 되어 유감이고, 인연으로 이어지지 못한 점 저희도 아쉽지만, 다음번에 더 좋은 기회로 만나 뵙게 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침통했다. 그런 나를 더 침울하게 만든 건 하루 간격으로 도착한 다른 출판사의 답신이었다. 명절 인사 문자처럼 출판사들 사이에도 공통의 거절 양식이 있는지 메일은 복붙한 것처럼 비슷한 내용이었다. 본사의 출간 방향과는 차이가 있어 원고를 정중히 반려하오니 혜량하여 주시길 부탁드린다는...
원샷 원킬을 노렸던 고상하고 우아한 스나이퍼는 메일 두 방을 역으로 맞고는 냉혹한 현실에 대한 감각을 되찾았다. 나는 서둘러 서점에 나가 열 군데의 리스트를 추가로 만들곤 다시 출간 제안 메일을 보냈다. 하지만, 메일은 회신 없는 공허한 외침이 되는 경우가 많았고, 가끔 ‘Re:’로 시작하는 메일이 있었지만 속상한 말뿐이었다. 선생님의 원고는 당사의 출판 방향과 맞지 않아... 양해 바라며... 뜻이 맞는 출판사를 만나시길 기원한다는... 나는 “아니, 서점에 가보니까 내 원고랑 비슷한 내용으로 책도 여러 권 냈더구먼. 뭔 방향이 달라, 다르긴! 돌려 말하지 말고 솔직한 피드백을 달라고!” 하며 소리치고 싶었다. 실제로는 네, 알겠습니다. 답변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 같은 뻔한 답장을 보냈지만...
몇 번의 반려 메일에 의기소침해진 나는 ‘내가 아직 책을 낼 수준은 아닌가 보다.’ 하는 생각이 들어 도전을 멈추기로 결심했다. 지금 쓴 원고는 묵혀뒀다가 내년이든 후년이든 다시 써보면 되지 않겠나 싶었다. 그사이 에피소드는 더 풍성해졌을 것이고 글쓰기 솜씨도 조금은 늘었을 테니 그때 가면 글에도 힘이 좀 붙겠지?, 하는 마음이었다. 그렇게 지난 몇 달의 노력은 컴퓨터 속 폴더 하나에 묻어두고는 새로운 주제를 정해 글쓰기를 이어나갔다.
그렇게 두세 달가량 꾸준히 써 내려갔지만, 내용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재미도 감동도 없었고, 정보나 공감 같은 것도 하나 담겨 있지 않은 것 같았다. 상심한 나는 예전에 썼던 글도 이렇게 별로였는지 확인해보자며 몇 달 전 원고 폴더를 열었는데, (재미없는 글을 읽다 봐서 그런 건지) 그 안에 담긴 원고가 너무 재밌고 유익하게 느껴지는 거다. 이걸 내가 쓴 게 맞나 싶기도 하고. 이런 원고를 나만 보는 건 세상에 죄를 짓는 일일지도 모른다는 어처구니없는 생각마저 들었고, 의심의 흐름은 결국 출판사 투고를 다시 해봐야겠다는 결심까지 다다랐다.
그때 마침 여자친구가 카톡으로 책 링크를 하나 보내왔다. 새로 나온 책이었는데, 내가 쓴 원고와 비슷한 컨셉의 책이었고 출판사에서는 시리즈로 출간을 준비하고 있는 듯 보였다. 나는 기대하는 마음 반, 기대하면 그만큼 상처도 크다는 두려움 반으로 제안서와 샘플 원고를 보냈고 며칠 뒤 답장을 받았다.
“샘플 원고 잘 읽었습니다. 혹시 전체 원고를 보내주실 수 있을까요?”
나는 2주 정도의 시간을 들여 원고를 한 땀 한 땀 고친 다음 메일을 보냈고, 긍정적인 피드백을 받아 편집자님과 미팅을 하고 난생처음 출판 계약이란 걸 맺었다. 그리고 그 결실이 곧 세상에 나올 예정이다.
돌이켜보면 출판의 과정은 취업의 과정과 비슷했던 것 같다. 오지 않는 메일에 속은 상하고 반복되는 탈락에 자존감은 쪼그라든다. 한편으로는 이유를 설명해주지 않는 불합격 통보에 무척 답답해지기도 하고. 신기한 건 무수히 많은 어긋남 속에서도 묘한 인연이 하나 정도는 숨어 있다는 것이다. 취업 준비를 할 때도 면접만 가면 ‘어버버’하던 내가 왠지 모를 편안함을 느끼며 할 말, 못 할 말 다 하고 나오는 자리가 하나 정도는 있었다. 그리고 그런 곳은 최종 합격 명단에 내 이름이 꼭 포함되어 있었다. 출판의 과정 역시 대부분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이었지만, 개중에는 같은 방향으로 걷는 누군가가 있었다. 인연이라는 말 외에는 달리 뭐라 부르기 어려운 그 만남 덕분에 컴퓨터 속 원고는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있었고 그간 글에 쏟아 온 노력도 나름의 결실을 맺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