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해 전 읽었던 브랜딩 책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기업에서 자문 요청을 할 때, 제가 가장 먼저 묻는 질문은 언제나 이것입니다. "세상에 이렇게나 화장품이 많은데, 왜 새로운 화장품을 만들어야만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그 기업이 사회에 존재해야 하는 이유, 즉 사명을 묻는 질문입니다. 저 스스로도 책을 쓰며 묻습니다. ‘벤처나 스타트업에 대한 책이 이렇게 많은데, 왜 새로운 책을 쓰려고 하는 거지?' (책 <배민다움> 중에서)
그 부분을 퍽 인상적으로 읽었던 나는, 책을 내고 싶다는 내 마음에도 같은 질문을 던져 보았다. 세상에 무수히 많은 책이 있는데, 그중에서 내 책이 나와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어떻게 살 것인가, 인생이란 무엇인가, 같은 질문에 답을 찾기 어렵듯이 '존재의 이유'를 묻는 물음표에 대답하기란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고, 마음속으로는 옹색한 말들만 떠올랐다. ‘아니, 세상에 꼭 있어야 한다, 까지는 아니고요... 그래도 하나 정도는 있어도 괜찮지 않겠어... 같은 느낌이고요... 뭐, 책 하나 내는 게 세상에 대단한 해를 끼치는 건 아니잖아요...?
책을 내겠다는 다짐이 밀물처럼 힘차게 밀려왔다가 책의 가치, 존재 이유를 묻는 말에 썰물처럼 빠져나가길 반복하며 제자리걸음을 하던 때, 나는 그 답답함을 주로 책으로 풀었다. 이럴 때는 진지하고 무거운 책을 읽기 어려워 가볍게 보기 좋은 에세이 류가 주로 탐독의 대상이 된다. 그때 읽은 여러 책 중에서 유독 눈길이 가는 게 있었는데, 바로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축구>라는 수필이었다. 작가 본인의 성에 세계적인 축구 칼럼니스트 ‘닉 혼비’의 이름을 합친 ‘김혼비’라는 필명으로 쓰인 이 책은 페이지마다 웃음 포인트가 꾹꾹 눌러 담겨 있어 읽다 보면 피식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책에는 K리그를 애정하던 작가가 문득 축구를 직접 해보고 싶다는 욕심이 생겨 여자 축구 클럽을 알아보고, 그 클럽에 가입해 축구를 하나씩 배워가던 여정이 담겨 있었다. 입단부터 기본기 훈련, 첫 연습경기, 첫 공식 시합, 첫 어시스트에 관한 내용이 순차적으로 나오기 때문에 한 편의 스포츠 만화를 보는 것 같이 뭉클하기도 했고, 세련된 아재 개그를 선보이는 작가의 언어유희 덕분에 미소가 절로 지어지기도 했다. 잘 몰랐던 여자 축구의 세계에 대해서 어렴풋이 알게 되기도 했고. ‘여자축구 동호회는 주로 시니어 남자팀과 시합을 하는구나? 멤버 중에는 어쩌다 가입한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네?’
나름 축구를 오랫동안 즐겨온 사람으로서 ‘축구’란 익숙하고 뻔한 이야기라고 생각했는데, 누군가의 입문기를 읽고 있지니 이런 소재가 충분히 매력적인 컨텐츠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에게는 대리 경험의 도구가 될 수 있고, 비슷한 경험을 하고 있는 누군가에게는 공감의 소재가 될 수 있으며,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시작하던 순간의 향수를 불러일으킬 수 있을 테니까.
맛있는 국수 먹듯이 빠른 속도로 책을 읽고 나자 ‘참 재밌다’라는 감상평이 제일 먼저 나왔고, 소화가 됐는지 잠시 후에 이런 생각이 트림처럼 튀어나왔다.
‘어? 나도 이런 책 써볼 수 있지 않을까? 나도 취미로 즐기는 게 있잖아?’
당시 나는 2년 전쯤 시작해 꾸준히 즐겨 온 취미가 있었고, 그 시간만큼의 지식과 깨달음, 경험담을 차곡차곡 쌓아가고 있었다. 나도 김혼비 작가처럼 그 과정을 솔직하고 유쾌하게 푼다면 괜찮은 책이 되지 않을까? 그러고 나서 책의 기획안을 작성해봤는데, 롤모델이 분명하게 있으니 그 안의 내용도 쉽게 채울 수 있었다.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축구>의 컨셉이 내 책의 컨셉이 되었고, 책을 읽으며 좋았던 구절, 밑줄 치고 고개를 끄덕인 부분이 책의 가치로 연결되었으며, 내가 책을 구매하고 읽은 이유가 역으로 책의 타깃 독자 프로필이 될 수 있었다.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책의 초고를 가장 쉽게 완성하는 방법, ‘따라 쓰기’다. 세상에 이 책이 존재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같은 어려운 질문으로 시작하면 첫 대답을 적는 것부터 버거워진다. 내가 좋아하는 책, 롤모델로 삼고 싶은 책에서 출발해야 방향을 세우기도 쉽고 글을 쓰다 막힐 때 도움을 받을 수도 있다. 게다가 글이란 롤모델이 있더라도 내가 보고 겪고 생각한 걸 담는다면 자연스럽게 결이 바뀌고 톤이 달라지게 마련이라 결과적으로 다른 글이 탄생하게 된다. 책이란 반복해서 구매하는 만두나 라면 같은 것이 아니라 비슷하면서도 다른 글을 찾는 것이기에 이런 접근법은 책이라는 상품의 구매 패턴과도 썩 잘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김혼비 작가의 책을 읽고 난 이후, 본격적으로 ‘나의 취미 입문기’를 쓰기 시작했다. ‘아무튼 시리즈’ 같은 얇은 에세이도 스무 꼭지 정도의 이야기는 필요한 것 같아 스무 개의 글을 목표로 하나씩 써 내려갔다. 시작할 때는 분량을 채울 수 있을지 겁이 나기도 했지만, 그간 이야기가 제법 쌓인 덕분인지 두 달 만에 초고를 완성할 수 있었다. 물론, 처음 써 본 긴 글이고, 분량을 채우겠다며 이 말을 여기에도 하고, 저기에도 하고, 혹시 몰라 한 번 더 떠들기도 했던 터라 손 봐야 할 부분이 넘쳐나긴 했지만... 그렇게 쓴 글을 한두 달 묵힌 후에 몇 주의 시간을 들여 다듬었고, 그러자 투고해볼 만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는 대형서점을 찾아 에세이 섹션을 돌아보며 원고를 보낼만한 출판사를 탐색해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