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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취란 직선이 아닌 덧대어진 선

by 송정훈


글쓰기 강좌의 여섯 번째 시간은 황희연 칼럼니스트의 시간이었다. 특강 강사로 참여한 그녀는 특유의 조곤조곤한 말투로 자신의 이력과 자신이 생각하는 좋은 글의 정의, 작가가 되는 법 같은 주제로 강의를 해나갔다. 그러다 수강생들과 소통을 하고 싶었는지, 제일 앞자리에 앉아있던 학생에게 질문을 던졌다.


“어떤 글을 쓰고 싶으세요?”


학생이 대답했다.


“제가 여행을 좋아하거든요. 그래서 여행 다녀온 이야기를 에세이로 쓰고 싶어요.”


강사는 꼬리를 물며 질문을 던졌다.


“음, 그럼 여행 에세이 중에서도 어떤 여행 에세이를 쓰고 싶으세요?”


그러자 학생은 나한테 왜 이러냐는 표정을 지으며 머리를 긁적였고, 강사는 살짝 미안한 얼굴로 이런 말을 덧붙였다.


“세상에 수없이 많은 여행 에세이가 있잖아요? 그중에서 내 글이 출판사 그리고 독자의 선택을 받으려면 나만의 다른 점이 필요합니다. 내가 하는 여행은 어떤 여행인지, 컨셉이 분명하고 달라야 좋은 글이 나올 수 있어요. 제가 드리는 말씀을 나중에라도 꼭 떠올리면 좋겠습니다.”


그 말이 퍽 인상적이었던 나는 집에 돌아가 내가 할 수 있는 ‘다른 이야기’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심각하게 고민을 해보았다. 한 시간쯤 골몰하고 나니 나름의 생각이 정리가 됐다.


1. 내 안에 아주 색다른 이야기 같은 건 없다.

2. 그간의 생활이 ‘모험적’이라기보다 ‘모범적’에 가까웠으니 뭐,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3. 그러니 아무거나 쓰자.

4. 내가 역사에 길이 남을 대작을 쓸 것도 아니잖아?


그러고는 마케터로서 그간 쌓아온 생각과 경험을 글로 쓰자고 마음먹었다. 그간 차별화된 제품 컨셉, 카피하고 싶을 정도로 매력적인 카피, 정말 바이럴 하고 싶은 바이럴 영상을 접하면 틈틈이 메모를 해두었던 터라 그걸 소재 삼아 <내가 좋아한 마케팅 아이디어>를 쓸 수 있겠다 싶었고, 일기를 쓰며 마케터로서의 생각, 배움을 정리해둔 터라 나름의 작고 소박한 인사이트(?)를 <위클리 브랜드 에세이>라는 주제로 적어 내려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매주 한 편씩 글을 올리겠다는 다짐은 두 달 정도 순항했지만, 세 번째 달이 되자 갑자기 글이 써지지 않기 시작했다. 나는 퇴근해 집에 들어오자마자 책상에 앉아 보기도 하고, 집에서는 TV의 유혹이 너무 강해 집중하기 어렵다며 카페로 퇴근해보기도 했지만, 글은 써지지 않았다. 이유는 단순했다. 소재가 떨어진 탓이었다. 그간 쌓아온 마케터로서의 경험치와 쓰는 사람으로서의 근육은 탄탄하지 않았기에 열 편 정도의 글이 내가 쓸 수 있는 최대치였다. 나는 세 번째 라운드가 되자 갑자기 다리가 풀린 복싱선수처럼 흰 수건을 던지곤 다시 예전의 일상으로 돌아갔다. 짧은 일기를 끄적이는.


그해 여름이 되었을 때, 한 해를 시작하며 다짐을 했으니 뭐라도 썰어야 하지 않겠냐며 다시 집필에 도전했지만, 결국 썰린 건 결심이었다. 이번에도 소재 부족이 이유긴 했지만, 심드렁한 반응이 또 다른 이유긴 했다. 세상에 하이파이브를 하자고 용기를 내어 손을 내밀었는데, 냉정한 세상은 손은커녕 ‘좋아요’도 눌러주지 않았다. 어쩐지 혼자 떠드는 것 같은 일을 계속하는 건 퍽 지치는 일이었다.


그 뒤로도 글을 써보겠다고 한 번 더 결심을 했지만 잘 풀리지 않았고, 네 번째 시도에서 나름 출판사에 투고할 수 있을 정도의 분량을 갖춘 글을 쓸 수 있었다. 돌이켜보면 중도 포기했던 세 번의 경험은 단단해지는 과정이었던 것 같다. 긴 글을 써보고, 쑥스러워하면서도 글을 올리고, 포기했다 다시 해보는 과정 속에서 쓰는 사람으로서의 경험치는 쌓이고 있었고, 그 시간이 있었기에 주저리주저리 일기를 쓰던 내가 책을 낼 분량의 글을 쓸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었다. 성공을 멀리서 보면 직선이지만 가까이서 바라보면 지그재그라는 말이 있듯이, 첫 책 출판의 과정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한 번에 그려진 말끔한 직선이 아니라 선을 그리다 포기하고, 끊어진 선에 새로운 선을 덧대어 그리며 겨우겨우 연결한 모습이다. 여러 번의 시도와 실패는 목적지에 다다르지 못한 짧은 선을 결과로 남겼지만, 그 안으로는 쌓이는 것이 있었고 그 시간 덕분에 투고할 스무 편 정도의 글을 쓸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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