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2월 어느 금요일이었다.
금요일이면 마케팅본부 직원들은 8층에 있는 회의실로 모여 본부장님이 <SERI CEO>에서 고른 교육 영상을 두 편 정도 시청한다. 대부분 본부의 이름답게 마케팅 사례나 경영 전략, 케이스 스터디 같은 내용이다. 영상을 보고 나면 본부장님은 영상을 본 소감을 직원들에게 묻고, 회의실에는 절간처럼 고요한 침묵이 흐른다.
그날도 나는 이전에 그랬듯이 고개를 살짝 숙인 채 최대한 본부장님과의 아이 컨택을 피하고 있었다. 그리고 옆통수를 스치는 레이저를 잠시 느끼긴 했지만, 다행히 지목되어 아무 말이라도 해야 하는 불상사는 발생하지 않았다. 하지만 다른 직원들이 그날따라 풍부한 지식을 유려한 언변으로 풀어내는 것과 그 말들이 스페인 국가대표 축구팀의 티키타카처럼 유익한 대화로 이어지는 모습을 보면서 속으로 소외감, 자괴감, 좌절감 같은 것을 느꼈다. 마케팅의 세계에서 다들 저만치 앞서 나가고 있는데, 나만 진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뒤처져 있다는 느낌이었다.
그런 토의에 잘 끼지 못한 건 내성적인 성격 탓도 있을 것이다. 아무래도 나서지 않는 성향이다 보니 가뭄에 콩 나듯 말할 거리가 있더라도 타이밍을 잡으려 주춤대다 재빠르게 치고 들어오는 다른 이들에 밀려 기회를 놓치는 경우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보다 더 본질적인 이유가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건 바로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도무지 모르겠다는 것이었다. 마케터로서 일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나는, 그간 쌓아온 지식, 통찰, 경험이 습자지처럼 얇았고, 바닥난 곳간에서 인심이, 아니 생각이 나올 리가 없었다. 대화에 낄 소재를 아무리 떠올려 봐도 아무것도 잡히지 않던 그 날, 회의실에서 나와 자리로 돌아가면서 내게 나머지 공부 같은 변화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절로 일었다.
그리고 며칠 뒤, 그간 아무것도 올리지 않아 빈 공책 같던 네이버 블로그에 비공개 게시판을 하나 만들었다. 게시판의 이름은 ‘365 project’라고 지었다. 앞으로 그곳에 매일 한 편씩 일기를 써 볼 요량이었다. 회의 시간에 뭐라도 한마디 거들기 위해서는 나름의 경험과 생각을 정리해둘 필요가 있었고, 그건 말하면서 생각을 정리하는 것이 되지 않는, 생각이 정리되어야만 입을 뗄 수 있는 사람으로서 쌓아가야만 하는 경험치 같은 것이기도 했다.
365 project에 올린 두 번째 쓴 일기
2016년 1월 2일(토)
아버지의 퇴직일에 맞춰 선물을 샀다. 앞으로 여유 시간이 많아질 것이기에 일상에서 편히 신을 수 있는 신발을 사려 했고, 로퍼와 컴포트화 사이에서 고민을 하다 컴포트화를 샀다. 나의 취향이 기준이었다면 로퍼를 샀을 것이다. 날렵한 디자인이 슬림한 면바지들과 어울렸을 것이다. 난 아버지의 옷을 떠올렸고, 백화점에서 쇼핑하는 중년의 신발을 관찰했다. 그리고 결정했다. 조금은 투박하지만, 추워 보이지 않고 강직해 보이는 컴포트화를 사기로. 그와 동시에 이런 생각도 했다. 마케팅 업무를 선물하는 마음으로 해야겠다고. 그들의 모습을 관찰하고 상상하고 그들의 눈으로 세상을 본다는 것에서 선물하는 마음과 마케팅에 임하는 자세가 같다고 생각했고, 선물에 진심을 담듯 일에도 진정성을 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매일 써 내려간 일기의 주제는 가지각색이었다. 어떤 날에는 상사 뒷담화를 까기도 했고, 어떤 날에는 일 처리나 상대에 대한 배려가 부족했던 나의 행동을 반성하기도 했다. 마케터로서 인상적인 경험을 했다거나 꽤 괜찮은 레퍼런스를 찾은 날에는 그걸 주제 삼아 써 내려갔고, 일이나 마음에 관한 생각이 제법 그럴싸한 문장으로 풀린 날에는 속으로 ‘오, 내가 이런 글을 썼단 말이야?’ 하며 득의양양하기도 했다. 대신, 무언가를 쓰는 일이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에 일기는 대체로 짧은 편이었다. 조금 길게 써지는 날도 있었지만, 네다섯 문장 정도의 한 단락짜리 구성이 절반 이상이었다.
2016년 1월 1일부터 시작한 일기는 그 해 365개를 모두 채웠고, 그 다음 해에는 ‘730 project’라고 이름을 바꿔 두 배의 양을 써 내려갔다. 하루에 두 개의 일기를 작성하려다 보니 아무래도 들이는 시간이 늘어나야 했고, 때로는 개수를 채워야 한다는 의무감에 ‘짧게 쓴 게 죄는 아니잖아!’라는 핑계를 대며 한두 줄짜리 짧은 일기를 적는 날도 종종 있었다. 그래도 2017년의 마지막 날, 지난 일 년을 돌아보는 729번째 일기와 새해의 계획을 적은 730번째 일기를 쓰며 계획한 숫자를 결국 채웠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시간은 일종의 훈련 같은 것이었다. 매일 퇴근하고 책상에 앉아 한 시간 정도 무어라도 끄적이는 일은, 점심 먹고 남은 자투리 시간에 한 글자라도 써보겠다고 폼 잡고 앉아 있었던 일은, 주말 아침 조용한 카페에 앉아 노트북을 켜고 멍 때리던 시간은 생각을 정리하는 과정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쓰는 근육을 키우는 일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 시간을 통과하자 기초 체력을 키운 사람들이 더 터프한 훈련법을 찾거나 새로운 운동에 도전하게 되듯이, 나도 다음 단계로 넘어가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다. 일기가 아닌 글 같은 걸 쓰고 싶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