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원고를 보낸 며칠 뒤, 편집자로부터 답신이 왔다.
“보내주신 원고 잘 읽었습니다. 후루룩 재미있게 잘 읽히더라고요. 한번 뵙고 싶은데 이번 주 금요일에 시간 어떠신가요?”
메일을 다 읽고 나자 서류 합격 통보를 받은 취준생처럼 기쁨과 긴장과 설렘이 섞여 복잡 미묘한 상태가 돼버렸다. 즐거움과 두려움이 시소 타듯 번갈아 오르락내리락하는 며칠을 보내다 약속한 금요일이 왔고, 한층 긴장감이 더해진 마음으로 약속 장소였던 카페의 문을 열었다. 그때 딱 문자가 도착했다.
"작가님, 저는 도착해 있어요. 카페 들어오시면 안쪽 왼쪽에 자리 잡았습니다."
그 말을 따라 카페 깊숙이 들어가 보니 테이블에 홀로 앉아 계신 분이 보였다. 자연스럽게 그곳으로 향한 다음 인사를 나누고 명함을 주고받았다. 회사 명함을 건넸기에 자연스럽게 첫 대화는 다니는 회사 이야기로 흘러갔다. 주류회사에서 일한다길래 어느 쪽일지 궁금했는데, 여기였군요. 회사에서는 어떤 일을 하세요, 같은 대화로. 나는 괜히 잘 보이고 싶은 마음에 그간 회사에서 이룬 조그만 성취를 쥐어짜 내듯 말하기도 했다. 그 뒤로는 신변잡기가 이어졌다. 책 속에 ‘대전’ 이야기가 나와서 반가웠어요. 저도 학창 시절을 거기에서 보냈거든요. 대전에 남녀공학인 고등학교면 어디예요?
대화는 점점 ‘원고’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제가 쓴 글은 어떤 편인가요?”
“편하게 술술 읽히는 게 장점이고, 중간중간 재미난 내용이 제법 있더라고요.”
“특히 어떤 부분이 좋으셨어요?”
“음... 음악에도 노가다가 있을 수 있다는 부분이 재밌었고요, 다한증 에피소드도 무척 좋더라고요. 어쨌든 출간 계약을 할 만하다는 게 제 판단이에요.”
본격적으로 원고 이야기가 시작되자 편집자는 이런저런 메모를 한 A4 용지 한 장을 건네며 말을 이었다.
“제가 이 에세이 시리즈를 기획한 건 몇 발자국 먼저 걸어간 누군가의 이야기가 언젠가를 생각하며 꿈만 꾸고 있는 또 다른 누군가에게 긍정적인 자극이 될 것 같아서예요. 지난 4월에 첫 번째 책이 나왔고, 현재는 작가님 포함해서 세 분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어요. 세 작품을 세네 달 간격으로 출간하는 게 계획이기도 하고요."
그리고 원고에 관한 피드백이 이어졌다. ‘주류회사’라는 게 아무대로 관심과 호기심의 대상이니 그걸 취미와 엮은 글이 한두 편 더 있었으면 좋겠다고도 했고, 취미 생활에서 흔히 쓰는 표현을 인생에 관한 은유로 표현하는 문장이 더러 있으면 더 나은 원고가 될 것 같다고도 했다. 나는 누군가가 나의 성스러운 예술품에 손을 보는 건 용납하지 못하는 작가로서의 완고한 고집 따위는 없다며 주신 피드백을 참고해서 퇴고해보겠다고 말했다.
계약서 작성에 관한 이야기를 잠시 나눈 다음, 이런 질문을 슬며시 던졌다. 보통 이런 미팅에 편집자는 어떤 마음으로 나오냐고. 그러자 대답이 이어졌다.
“글솜씨는 원고로 확인한 셈이고 미팅은 어떤 사람인지 보러 나오는 거예요. 앞으로 몇 달 동안 함께 일할 사람이기에 성실한 사람일지, 결은 맞을지, 출판사의 요청이나 디렉팅에 잘 따라 줄 사람일지, 가늠해보는 거죠.”
조금 뻔뻔하게 제 인상은 괜찮았나요, 라는 질문을 한 차례 더 던졌고, 착실하게 임해주실 것 같다는 억지 대답을 들었던 것 같다.
미팅이 끝나고 나자 문득, 복식 경기를 하러 코트에 오르는 사람이 된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고교 시절, 학교에는 배드민턴 코트가 여럿 있었고 일 대 일 경기를 하는 날도 있었지만 가끔은 짝을 이뤄 시합하기도 했다. 그런 날에는 누군가와 함께 코트에 오르며 혼자일 때보다 더 열심히 해보자는 마음이 일었다. 옆에 선 사람에게 민폐를 끼칠 수는 없지 않겠느냐고 자문하면서.
편집자와 이야기를 나누고 앞으로의 일정을 공유하면서 그때 그 시절 배드민턴 복식 시합에 나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누군가와 함께여서 든든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내 몫 이상을 해내야 한다며 괜스레 주먹이 불끈 쥐어지기도 하는 그런 기분. 지하철역에서 인사를 나누고 각자의 방향으로 헤어지면서 속으로 결심했다. 혼자만의 작업에서 함께 하는 작업으로 바뀌었으니, 이제부터는 파트너의 수준에 맞춰 내가 가진 것 이상으로 최선을 다해보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