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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두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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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위나 Oct 23. 2020

라떼는 서예반이었지






 "출산하고 100일 지나면 다시 와요. 애는 우리가 봐줄 테니.."

 "아, 네, ㅎㅎ."

 마지막 인사를 하고 문을 나서면서 가슴 한편에 바람이 일었다.

 '내가 다시 올 수 있을까, 아니 못 올 거야. 다시 오게 된다면 언제가 될까..'

 

 초등 1, 2학년 연년생 두 사내아이와 함께 지낸 여름방학은 화염 그 차체였다. 거운 정글에서 한 달을 꽉 채워 보내고 개학이 얼마 남지 않은 어느 날, 뱃속에 있는 딸아이와 나를 위해 백화점 문화센터로 달려가 서예반을 등록했다.  당시 세 남자들에게 시달렸던 나는 태교를 하지 못한 죄책감에 마지막 기회라 여기고 서예반 가을학기를 신청한 것이다.

 '그래, 딱 3개월만 하자.'

 주중에 하루 오전 타임, 애들 학교 보내 놓고 준비하고 다녀오면 바로 학교 끝나는 시간이라 안성맞춤이었다.

 3개월은 금방 흘러갔다. 가을학기가 끝나는 날이 나의 태교이자 취미생활이 끝나는 날이었다. 그다음 날부터는 아이들의 겨울방학과 출산예정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붓 좀 잡아보신 거 같은데요"

 "네, 중학교 중반까지 썼어요. 한글만 주로 쓰다가 한문을 배운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만뒀어요."

 "그럼 기초는 빨리빨리 넘어갈게요."

 강사님의 칭찬에 어깨가 나른해진다. 주변에 나이 지긋하신 어머님들도 나에게 관심 어린 눈길을 보내신다. 쭉 뻗은 허리 앞으로 배는 더욱더 나다. 뱃속의 아이는 편안하고 사방은 고요했다. 붓이 종이를 스치는 소리를 따라, 선지의 먹빛을 따라 어느 한줄기의 기억 번지기 시작했다.






 2분의 1절지를 받아 들었다.  글자 수에 맞춰서 칸을 나누어 접고, 글자 사이사이 간격을 보존하기 위해 테두리를 접는다. 왼쪽에는 학교와 이름을 쓸 수 있도록 여유를 두고 세로줄을 접는다. 손바닥만 하게 접은 화선지를 다시 조심조심 펼친다. 한쪽면은 윤기가 나고 한쪽면은 까슬까슬하다. 맨질 하고 윤기가 나는 쪽이 붓과 만나는 면이다.

 미리 갈아놓은 먹물에 붓을 적시고 칠판에 제시된 명제대로 글을 써 내려간다. 오로지 나와 종이와 붓만 있는 시간을 보낸 뒤 몇 장의 완성품 중에 하나를 골라 제출한다. 얼핏 봐도 어려울 것 같은 한문을 써 내려가는 한 무리의 아이들이 나의 한글 흘림 글씨를 호기심 있게 바라본다. 초등학교 때부터 한글 정자체, 그리고 흘림체만 썼던 나는 중학생이 서야 한문을 쓰기 시작했다. 그러나 휘호대회에서는 익숙한 한글을 써야 했다. 내 생각에는 저 아이들의 한문 글씨들이 훨씬 멋져 보였다.


 

"아니, 네가 전학을 가면 도대회는 어떡하라고.. "

"네?"

"지난번 대회, 금상 발표 났어. 축하한다. 우리 학교 대표로, 우리 군 대표로 나가야 하는데.."

 정든 중학교를 떠나던 날, 미술 선생님의 뜻밖의 소식은 아쉬운 기쁨으로 남아 있다. 다른 지역으로 이사를 하게 되어 다니던 서실을 중단하게 되었고 새로운 곳에서 나의 서예 활동은 이어지지 않았다. 낯선 곳에서 적응을 해나가던 그 시절, 적당한 서실을 만나서 계속 이어 나갔을 수도 있었을 텐데 그땐 지금과 같은 아쉬움이 없었나 보다.




 




 "딸아, 이것 좀 봐봐, 잘 썼지 않아?"

 "응, 잘 썼네."

 "이런 영혼 없는... 라떼는 말이야 붓글씨가..."

 지금은 12살이 된, 엄마 뱃속에서 함께 붓글씨를 썼던 아이에게 일장 연설을 해보지만 스마트하고 글로벌한 이 시대에 영혼 없는 반응을 받기에 마땅하다.



 간단하게 붓펜으로 낙서 아닌 낙서를 하는 이 순간, 그때 백일 된 아이를 데리고 글씨를 계속 썼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무작정 안될 거라고 생각하고 단념했지만, 우는 아이 달래면서 적응을 했을 수도 있고, 나이 지긋하신 수강생 어머님들이 번갈아 봐주셨을 수도 있고, 하다 하다 안되면 중도 하차하더라도 다시 등록을 했어도 되지 않았을까. 할 만했겠다 싶은 게..  지금 돌이켜 보면 애기 때의 딸아이가 참 순했다. 서예로 태교를 한 덕분이었을까 ㅎㅎ



 서예에 대한 애정과 미련이 있다고 하기에는 이것을 너무 오래 멀리해왔다. 하지만 까마득하게 잊은 것처럼 지내다가도 문득 연관된 어떤 것들(최근에는 브런치에서 캘리그라피 작품을 봤을 때)로 인해 그리움이 피기도 했다.

 나는 콘크리트 사무실의 널찍한 책상에 앉아있다. 초록색 모포로 덮인 책상 위엔 벼루와 먹이 놓여있고 한쪽 모서리에는 화선지가 둥글게 말려있다. 벽에는 나란히 걸어둔 붓들이 고개를 떨구고 있고 그 아래 바닥엔  빨간 고무 양동이에 붓을 빨 수 있는 물이 담겨 있다. 차분하게 앉아서 글씨를 쓴다. 이 순간만큼은 시간과 공간은 사라지고 나와 붓과 종이만이 있다.

 어릴 적 서실에 다니던 나의 모습이다. 두 아이를 학교에 보내고 잠시 뱃속의 아이와 함께 태교에 전념하는 나의 모습이다. 그리고 앞으로 언젠가 나만의 시간을 갖는 멀지 않은 나의 모습이다.




 






 




 나의 현재의 세계와 과거의 세계를 돌아보고자 시작한 "두 세계"라는 매거진입니다.

 나의 현재는 결혼 이후의 과거와 이어지지만, 결혼 이전의 세계는 블랙홀에 갇혀있는 암흑의 세계입니다(빈약한 기억력 ㅠㅠ). 기억을 더듬고 더듬어봐도 지푸라기 한올 건져내기 힘이 들고, 막상 건져 올린 지푸라기 한올을 가지고 문장으로 푼다는 게 저에게는 쉬운 일이 아닌 듯하네요.

 그래도 달빛이 어스름하게 비추는 갈대밭을 거니는 심정으로, 나의 과거와 더과거의 여행 천천히 계속하려 합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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