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생각타래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위나 Nov 16. 2020

가을색 짙은







 비 오는 휴일 아침이다.

 거리는 젖었고, 젖은 거리를 오가는 우산 속 사람들의 옷깃이 여며지고 있다.

 여며진 옷깃만큼 쌀쌀해진 바람이 젖은 가로수의 나뭇잎들을 흔들고 있다.

 물기를 머금은 나뭇잎들의 색이 어제보다 더 깊어진다.


 "다녀올게."

 "잘 다녀와요. 너무 걱정하지 말고.."

 암 수술 후 회복 중인 어머니가 계신 병원으로 향하는 남편의 뒷모습이 비 오는 가을 날씨처럼 처연하다.






 "어멈아, 네가 붙잡으면 안 갈 것이니, 가지 말라고 좀 해봐라. 응?"

 "제가 얘기한다고 맘이 바뀌겠어요? 얘기는 해볼게요."

 모처럼 어머님이 직장 근처로 나오셔서는 점심을 먹자고 하셨다. 이 집 갈비탕 갈비가 실하다면서 세 아이 뒷바라지와 친정아버지의 병간호가 힘들 테니 몸보신 좀 하라고 하신다. 병간호야 친정어머니가 하시지만, 딸 하나 믿고 고향을 떠나 올라오신 친정부모님은 내가 돌봐야 할 고목이었다. 이런 시기에 남편이 주말부부를 선언했다. 전철을 타고 출퇴근하기가 힘들어서였는데 지금 시기에 분가를 하려는 것을 말려야 하는 건지 지지를 해줘야 하는 건지 나로서는 도통 판단이 서지 않는다.

 친정부모님이 이사 오시기 전 몇 달은 우리 집에서 지내시면서 통원 치료를 하셨다. 그때 묵묵히 불편을 감당한 남편이 고마운 것은 잊지 못한다. 그래도 지금은 집도 얻어서 이사 오신 것만큼 직접적으로 불편한 점은 없을 테지만 굳이 주말부부를 하겠다 한다. 시어머니께서는 중년을 앞둔 아들의 홀아비 생활이 못내 불안하셨는지 설득을 하다 하다 며느리에게 찾아오셔서는 말려보라고 압력을 넣으신다.  

 "저러다 밥집 여자랑 눈이라도 맞으면 어떡하려고 그러느냐.."

 듣는 둥 마는 둥 갈비만 열심히 뜯고 있는 나에게 결국 한 소리 하신다.

 "어머니, 저는 어머님 아들을 믿어요. 저도 말리면서도 얼마나 힘이 들면 그럴까 싶어서, 그냥 한번 나가서 잠깐이라도 가까운 데서 살아보라고 하죠 뭐 ㅎㅎ"

 

 어머님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우리 부부는 1년 반 동안 주말부부로 지내게 되었다.

 백종원 님 덕분에 남편은 혼자 제법 밥을 해 먹었고, 주말에 집에 오면 주중에 해 먹고 맛있었던 음식을 우리들을 위해 만들어주기도 했다. 전생에 나라를 구해야 주말부부를 한다는 아재 유머를 떠들어대면서 그렇게 세월은 지나갔고 주말부부를 시작하고 1년이 무렵 친정아버지는 암 치료 중에 돌아가시게 되었다.


 




 시어머니께서 암수술을 받으셨다. 그리고 1년 6개월이 지난 이 가을에 재발하셨다.

 다시 수술을 하신 어머니는 회복이 눈에 띄게 더디었다.

 항암치료를 안 했던 첫 수술과는 또 다르게 항암 스케줄을 앞두고 있는 상황에서 어머니의 더딘 수술 회복은 가족들을 애타게 한다.


 가을비 속으로 들어간 남편을 뒤로하고 나는 주방에서 뚜닥뚜닥 일을 한다.

 병원에서 쪽잠을 주무시고 낮에 큰아가씨와 교대를 하고 집에서 오후까지 혼자 계시는 아버지에게 갖다 드릴 배춧국을 끓인다. 내가 할 수 있는 게 이것 밖에는 없는 것 같다. 문득 그때 잠시 집을 떠나 있던 남편을 떠올린다.

 아이 셋을 돌보면서 일을 하는 아내가 떠안은 친정부모님, 그 사이에서 그가 할 수 있는 건 독립이었을 것이다. 아내가 해준 음식만 먹고(최강 예민 입맛의 소유자), 벽에 걸어둔 옷마저도 아내를 불러야 찾을 수 있었던 그는 스스로의 입에 들어가야 하는 것까지 혼자 해결하고, 하루하루 쌓여가는 고독을 혼자 감당했으며, 자신이 도와줄 수 없는 부분들을 아내가 해나가는 것을 묵묵히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날, 한걸음에 달려와 함께 장지 답사와 계약을 하고 돌아오던 길, 그동안 억누르고 있다가 북받쳐 오른 눈물을 옆에서 조용히 받아주었다.

 위로나 충고가 섣부를 경우 서로 상처가 될 수도 있지만 당시에 내가 어떠한 고충을 토로를 해도 묵묵히 들어주고 지지해주던 남편을 생각하면 내가 지금 그렇게 할 수 있을까 자신이 없다.

 그 때나 지금이나 가을 색 짙은 이 계절, 이제는 내가 그의 곁에서 조용히 그를 지지해주고 위로해주고 싶다.






 친정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홀로 되신 친정어머니는 길 건너 집을 놔두고 주중에 사위가 없는 딸네에서 지냈다. 아버지가 누워계셨고, 누워계신 아버지 옆에서 지냈던 그 집을 들어가기가 힘드셨다고 했다. 퇴근하고 돌아오면 누워계시는 친정어머니를 보고 있자니 나 또한 집에 들어오기가 힘들었던 시기였다. 그러던 중에 주말마다 오던 남편은 주중에도 왔고, 집에서 출퇴근을 하더니 조금 지나서 분가를 종료하고 다시 집으로 들어왔다. 나는 더 이상 퇴근하고 돌아오면 누워있는 친정어머니를 보지 않아도 되었다. 어머니도 더 이상 나에게 기대지 않고 씩씩하게 일어서셨다.


 "근데, 여보. 왜 그때 다시 들어올 생각을 했어요?"

 "응, 그냥.. 밥 해먹기도 귀찮아졌고, 청소, 빨래도 하기 싫어지고, 무엇보다 밤에 처자식이 생각이 나서.."

 "흥!! 여자가 생겨서 살림 차렸다가 그 여자랑 끝나서 할 수 없이 집으로 들어온 거 다 알아요."

 "아니, 그걸 어떻게 알았지?"

 "당신은 내 손바닥 안에 있다는 걸 모르죠?"

 "하하."

  힘들었던 그 시간을 농담으로 주고받을 수 있는 지금, 우리가 겪었던 지난 가정사는 아직도 잔잔하고 아련하게 마음속을 흐르고 있다.


 




 


매거진의 이전글 나는 너를 계란 한 판 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