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홉 번째 이야기
우리가 몸담은 학교는 인문학이라는 길을 추구하는 곳이기 때문에, 자연히 도서관이 학교의 가장 핵심적인 장소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이곳의 도서관은 그 설계부터가 단순 도서관을 넘어선 일종의 '아고라(agora)'적 성격을 지니게끔 되어 있죠. 지난 체육대회 때에는 콘서트장으로 변모한 것으로 모자라 이번에는 도서관과 아고라가 한 공간 안에 공존한다니, 도서관이 대체 어떤 공간인지 의아하면서도 궁금해지지 않나요?
지금부터는 학교의 심장인 도서관을 한번 살펴보도록 합시다.
'도서관'이라는 단어를 가만히 놓고 보면, 수많은 직각 책장과 그 안에 꽂힌 책들, 가라앉은 정적의 분위기 등이 묻어나는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수많은 도서관과는 대조적으로, 이곳의 도서관은 그 구조에서부터 기존의 '도서관'이라는 단어와 전혀 다른 느낌을 주는 공간입니다.
'지혜의 숲'이라는 이름을 가진 우리의 도서관은 2층으로 이루어진 원형 구조를 택하고 있습니다. 도서관 한가운데에는 학생들이 종종 '콜로세움'이라고 농담 삼아 부르기도 하는 커다란 홀 같은 공간이 있고 원형의 벽을 따라 책장이 마찬가지로 원형 구조로 놓여 있습니다. 천장에는 큰 채광창이 나 있어 항상 자연광이 들어오며, 고개를 들면 하늘을 볼 수 있습니다. 책장 앞에는 마찬가지로 벽을 따라 둥글게 독서를 위한 책상이 한 줄로 배치되어 있고, 주위를 둘러보면 도서관 곳곳에 토론 및 기타 활동을 위한 널찍한 책상이 놓여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더불어 토론실, 동아리 활동실, 영화 감상실과 같은 개별적 공간도 도서관 내에 별도로 마련되어 있습니다. 도서관의 출입문은 여러 군데에 있으며 1층, 2층, 그 밖의 복도 어디에서도 도서관으로 곧장 진입할 수 있는 길이 있어 말 그대로 '학교의 중심'이라는 수식어가 아깝지 않습니다. 실제로 학교의 많은 행사가 이 도서관을 중심으로 행해지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학교의 심장부인 도서관에서 주최하는 행사란 대체 무엇일까요?
지금부터, 도서관 행사의 대표격인 '도서관에서의 하룻밤'에 참가해 봅시다.
도서관을 중심으로 치러지는 큰 행사 중 단연 으뜸으로 꼽을 수 있는 것이 바로 '도서관에서의 하룻밤'입니다. 그 이름에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듯, 도서관에서의 하룻밤이 진행되는 날은 실제로 학생들이 도서관에 모여 하룻밤 동안 다양한 활동에 참여하게 됩니다. 도서관에 주재하는 연구원님이 인문학과 관련된 주제 하나를 택해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공지하면, 참여를 원하는 학생들은 사전 신청 기간에 신청을 한 후 해당 날짜에 도서관으로 향하면 됩니다.
도서관에서의 하룻밤은 주로 저녁 무렵 시작됩니다. 약속된 시간에 학생들이 하나둘씩 도서관 홀로 모여 둥글게 앉으면 연구원님이 나와 이번 행사의 주제와 프로그램을 간단히 설명하십니다. 이후 도서관의 자랑 중 하나인 큰 스크린이 내려오고, 영상이 재생됩니다. 주제와 관련한 영화를 볼 때도 있고, 다큐멘터리나 그 외의 짧은 비디오 클립을 시청하기도 하죠. 이후에는 학생들이 임의로 배정된 소규모의 그룹으로 나누어져 도서관의 내부에 끼리끼리 자리를 잡게 됩니다. 각 그룹은 해당 주제의 하위 분야를 자유롭게 선정하여 이야기를 나눈 뒤 커다란 우드락 보드를 해당 주제에 맞게 꾸며야 합니다. 학술적인 의견을 개진해야 한다는 부담은 전혀 없으므로, 편안한 마음으로 주제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고 미적 감각을 발휘해 보드를 디자인하고 장식하면 됩니다. 이 무렵 다른 친구들은 기숙사에서 자율학습을 하고 있기 때문에, 도서관에 모인 학생들은 자율학습을 하지 않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들떠 있어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곧잘 유지됩니다. 평소 접점이 없었던 선후배들과 다양한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며 친해질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도 합니다.
각자 조별로 우드락 보드를 꾸민 이후에는, 모두가 홀에 모여 조별 발표를 감상하게 됩니다. 각 조에서 언변이 좋다 싶은 학생들이 떠밀리듯 나와 발표를 맡게 되죠. 처음에 제시된 주제는 모두에게 동일했지만 발표 시간이 되어 각 조가 들고 나오는 하위 주제는 굉장히 다양해지곤 하는데, 예를 들어 '관계의 종류'가 대주제였다면 서로 다른 조에서 각각 '소통의 매개', '사랑과 연애', '친구 관계의 형태', '한국 사회의 가족관계와 서구 사회 가족관계의 비교' 등의 주제를 가지고 오는 식입니다. 자신의 조에서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분야를 다른 조에서 심도 있게 짚어 주기 때문에 한층 더 흥미롭게 다른 조의 발표를 감상할 수 있습니다.
단지 이야기를 나누고 발표만 한다면 도서관에서 굳이 하룻밤을 보낼 필요가 없겠죠. 홀에 모여 발표를 진행한 이후에는, 본격적으로 학생들의 친목을 다지기 위해 도서관이 다시금 콘서트장으로 변모하게 됩니다. 웬만한 수학여행 레크리에이션 뺨치는 조명과 음악이 도서관을 가득 채우며, 즉석에서 장기자랑과 퀴즈 대결, 단체 게임, 노래 경연 대회 등이 펼쳐집니다. 공연을 목표로 미리 열심히 연습하고 무대에 오르는 다른 행사와는 달리 이날만큼은 정말 흥에 겨워 무대로 뛰쳐나오는 즉흥적인 학생들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끼를 발산하는 데 재능이 있는 많은 인재들이 기숙사에서 후줄근한 차림으로 막춤을 추고 노래를 불렀던 경험을 되살려 무대를 빛내곤 하죠. 행사를 진행하는 도서관 연구원님들은 학생들이 가장 격하게 반응하는 '간식'을 적절히 활용하여 게임의 참여율을 더욱 북돋기도 합니다. 차분한 독서와 토론의 장이었던 도서관 홀이 순식간에 박수와 함성 소리로 가득 찬 공연장이 되는 것을 볼 수 있는 몇 안 되는 날입니다. 간혹 닭싸움처럼 학생들이 직접 몸을 쓰는 게임이 진행되기도 하는데, 그럴 때면 도서관은 '콜로세움'이라는 별명 값을 톡톡히 하게 되죠.
행사의 구성은 매번 변하기 때문에 때에 따라 캘리그래피 배우기, 종이 인형 만들기, 공예품 제작하기 등 비교적 정적인 체험활동이 주를 이루기도 합니다.
후끈했던 열기가 한층 가시고 나면 환했던 도서관의 조명이 밤에 적합한 은은한 빛으로 바뀌며 잔잔한 음악이 흘러나옵니다. 홀과 널찍한 바닥 곳곳에 이불이 깔리고, 학생들은 저마다 자리를 잡고 드러눕습니다. 이때부터는 차분하고 아늑한 분위기 속에서 각자 책을 보며 밤을 보낼 수 있습니다. 자유롭게 책을 골라 어느 장소든 관계없이 자리를 잡아 편안한 자세로 책을 보면 됩니다. 너무나 당연한 말이지만, 누워서 책을 보는 것도 가능합니다. 옆의 친구와 대화를 나누어도 되고, 천장의 채광창으로 밤하늘의 별을 보며 음악을 들어도 됩니다. 밤이 깊어 가면 잠들 학생들은 각자의 이부자리를 찾아가 잠들고, 책을 볼 학생들은 은은한 불빛에 의지해 계속 책을 보곤 합니다. 이처럼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밤을 보내면 도서관에서의 하룻밤에 성공적으로 참여한 것입니다.
다른 학생들의 이야기를 지나치듯 들어 보니, 학교에서 도서관이 주체가 되어 진행하는 행사로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분명히 '도서관에서의 하룻밤' 이리라 예상할 수 있지만 나머지 하나는 무엇일지 잘 감이 잡히지 않는군요. 그런데 다음날 아침독서 시간이 되니, 반 친구들 모두가 똑같은 책을 읽고 있는 모습이 눈에 띕니다. 혹시 이 책과 관련이 있는 걸까요?
한책읽기는 도서관에서의 하룻밤과 함께 도서관이 주체가 되어 진행하는 쌍두마차 행사 중 하나입니다. 직관적인 그 이름답게, 매년 책 한 권을 선정하여 전교생과 선생님들, 그리고 참여를 원하는 학부모님들이 해당 책을 읽은 후 함께 다양한 후속 행사에 참여하는 일련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책읽기를 앞두고 도서관 연구원님들은 인문, 사회, 과학 등 다양한 분야를 아우르기 위해 많은 조사를 한 후 '올해의 선정 도서'를 발표합니다. 선정 도서가 발표되면 책을 읽기 위해 일정 기간이 주어지므로, 모두가 그 기간 동안 자신의 속도에 맞춰 책을 읽으면 됩니다. 이 기간에는 아침독서 시간에 해당 책을 읽는 학생, 강의가 없는 시간에 책을 읽는 선생님 등 학교 곳곳에서 선정 도서를 붙잡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간혹 귀가 주에 집으로 돌아갔는데, 자기가 아침독서 시간에 읽던 책과 똑같은 책을 부모님이 읽고 계셔서 놀랐다는 학생들의 이야기가 들려오기도 합니다.
책 읽기 기간이 끝나면 '토론 카페'라는 큰 행사가 개최됩니다. 토론 카페 개최 전 부스 개설을 원하는 학생들에게 미리 팀별로 신청을 받아, 해당 도서의 내용과 관련하여 자유롭게 토론 주제를 선정하도록 하고 카페 부스의 운영을 맡깁니다. 부스 운영 팀이 선택한 주제가 곧 해당 토론 카페 부스의 이름이 되기 때문에 부스 리스트를 살펴보면 마치 방송사의 드라마 편성표를 보는 듯한 느낌도 받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선정 도서가 철학과 관련된 책이라면, '데카르트가 오늘날의 학교를 본다면?' '니체의 아카이브' '에피쿠로스가 우리에게 말한다' 등의 이름을 내건 카페 부스들이 생겨나는 것이죠.
토론 카페 개최 당일이 되면 강당, 도서관 홀 등 학교의 넓은 공간에 수많은 토론 카페 부스가 개설됩니다. 학생들과 선생님들은 지정된 시간 동안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각자 원하는 부스를 방문하여 간단한 다과와 함께 토론을 진행하게 됩니다. 토론장에서는 소속과 학년에 관계없이 모두 존칭을 쓰며, 운영진의 진행에 따라 해당 주제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말하고 필요에 따라 타인의 의견에 코멘트를 붙이는 등 토론을 이어 가게 됩니다. 이때 개진된 의견들은 각 토론 카페 부스의 게시판에 기재되어, 토론 세션이 끝나고 전교생이 모이는 자리에서 부스 운영팀에 의해 발표될 예정입니다. 토론 카페에서 나온 의견을 큰 보드에 정리하여 토론 카페 종료 이후 도서관에 전시하기도 합니다. 간혹 자신은 간식에 정신이 팔려 대충 생각나는 대로 말한 의견이 대문짝만하게 도서관에 전시되어 수치스럽다는 학생들의 익명 증언이 나타나기도 하는데, 이런 일이 없으려면 토론에 열심히 참여해야겠죠?
초청 강연 역시 한책읽기의 중요한 프로그램 중 하나입니다. 한책읽기 대상 도서로 선정된 책의 저자 또는 관계자를 초청하여 책의 내용과 관련한 강연을 듣는 것입니다. 텍스트로 접했던 내용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간 강연 내용을 통해 보다 생생한 지식과 관점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 초청 강연의 가장 큰 장점입니다. 학생들은 강연 이후에 도서와 관련하여 궁금했던 점이나 추가로 알고 싶은 사항을 자유롭게 질문할 수 있습니다. 저자에게 사인을 받아 '사인 단행본'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초청 강연만의 또 다른 메리트라고 할 수 있죠.
도서관은 언제나 누구에게든 열려 있기 때문에 항상 사람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습니다. 정규 수업 시간에도 필요한 자료를 탐색하기 위해 도서관에 방문하는 학생들이 많고, 주말에도 책을 읽거나 도서관에서 상영하는 영화를 보러 도서관을 찾는 학생들을 여럿 볼 수 있습니다. 한편 주말에 도서관의 구석진 곳을 찾아가 보면 늘 핸드폰을 잡고 쪼그려 앉아 있는 학생들이 한두 명씩은 꼭 발견되는데, 그들은 와이파이를 쓰기 위해 이곳을 찾는 유목민이라고 할 수 있죠.
6월이 막바지로 치닫고 7월을 목전에 두면 자유시간에 도서관을 찾는 학생들의 수가 부쩍 늘고 있다는 것을 체감하게 됩니다. 아마도 곧 다가올 시험기간의 영향일 것입니다. 7월에는 또 어떤 일을 겪게 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