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학 후 얼마간은 다크서클을 짙게 드리운 눈으로 이렇게 내뱉는 친구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그 말을 들은 아이들은열이면 열 웃음을 터뜨리지만 동시에 속으로는 충분히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하루아침에 바뀌어 버린 생활 터전에 적응해야 하는 것은 남의 이야기가 아니니 말이다.
이사 첫날 맞이하는 아침은 실로 낯설기 짝이 없다. 하물며 그동안 살던 집을 떠나, 생전 처음 보는 사람들에 둘러싸인 채, 낯선 장소의 한복판에서 맞이하게 되는 아침이야 말할 것도 없다. 하지만 여섯 시 반에 일어나 열한 시에 잠드는, 비슷한 듯 조금씩 다른 여러 하루가 한 겹 한 겹씩 더해지고 나면 차츰 이곳에서의 생활에 익숙해지는 스스로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호미를 쥐고 바깥으로 나가 흙을 헤집는 손길이 능숙해지고, 매일 아침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가 흥겹게 느껴지기 시작할 즈음이면 '신입생'이라는 호칭보다 '1학년'이라는 호칭이 더 편안한 느낌으로 다가오게 된다.
이곳에서의 하루는 이렇게 흐른다
학교의 아침은 바깥보다 조금 이르게 시작한다. 기숙사 천장의 채광창으로 햇빛이 비쳐 들어오고 시계가 6시 반을 가리키면, 온 기숙사에 노래가 울려 퍼진다. 일어날 시간임을 알리는 '기상송'이다.
기상송 플레이리스트는 미리 신청을 받는데, 아이들이 경쟁적으로 적어 넣은 신청곡이 무작위적으로 흘러나오기 때문에 잠을 깰 수 없을 만큼 고요한 노래가 나올 때도 있고 반대로 아침 댓바람부터 귀가 찢어지는 비트가 울려 퍼지기도 한다. 기상송은 30분에 걸쳐서 재생되며, 그동안 아이들은 알아서 일어나 세수를 하고 옷을 갈아입는 등 아침 식사를 하러 갈 준비를 해야 한다.
식당의 문은 7시에 열린다. 늦게 도착하면 밥을 먹지 못하게 하는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도 여자 기숙사 아이들은 6시 55분부터 기숙사 입구에 슬금슬금 모여 진을 치고 앉아 있다가 기상송이 뚝 끊기고 시계가 7시를 가리키면 단거리 주자마냥 식당으로 신속하게 달려간다. 얼핏 이 달리기는 필사적이고 간절해 보일 정도인데, 같은 시간에 식당으로 향하는 반대쪽 길목으로 가 보면 아이들이 그렇게까지 열심히 달리는 이유를 알 수 있다. 남자 기숙사와 연결된 길의 저만치에서 마찬가지로 남자아이들이 우르르 몰려오고 있기 때문이다. 가시거리 안에 서로가 들어오기 시작하면"야, 뛰어!"라는 소리가 우수수 튀어나오고 약속이라도 한 듯 발걸음이 빨라진다. 여자 기숙사에서 먼저 식당 문을 선점하는 날이면 남자아이들은 바깥에서 한참을 기다려야 하고, 반대로 남자 기숙사에서 식당 문을 먼저 열어젖히는 날이면 식당 입구 바깥까지 여자아이들의 긴 줄이 늘어서게 된다.
아침식사를 마치면 기숙사로 돌아와 가볍게 아침 청소를 하고, 각자 짐을 챙겨 본관으로 향한다.
아침의 교실은 조용하면서도 분주하다. 전날 하지 않은 숙제를 아침에 몰아서 하는 친구들도 있고, 노래를 들으며 아침부터 감상에 젖어 있는 친구들도 있고, 교실마다 비치된 컴퓨터로 뉴스 탐색을 가장한 인터넷 서핑을 하는 친구들도 보인다.그런데 8시가 되면 돌연 스피커에서 익숙한 3학년 선배들의 목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한다.
"3월 5일 아침 방송 시작하겠습니다."
그럼 방금 전까지의 모든 분주함이 일순간 멈추고, 아이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얌전히 자리에 앉아 눈을 감는다. 매일 아침 5분간 짧게 음악을 들으며 마음을 가라앉히는 '명상 시간'을 위해서다. 고요한 명상 음악이 끝나면 아침 독서 시간으로 접어들게 된다. 각자 원하는 책을 읽고, 학교에서 지급해 준 독서 기록 책자에 마음에 드는 대목이나 짧은 감상을 적는 시간이다. 두레 중 '아침 독서 시간에 독후감 쓰자고 말하기' 담당의 근무 시간이기도 하다.
약 40분 동안의 아침 독서가 끝나면 비로소 1교시가 시작되고, 각 학급은 해당하는 과목의 담당 교실로 이동해서 수업을 듣게 된다. 이곳은 교육부 인가를 받은 대안학교이기 때문에 기본적인 교과목은 정규 공교육 커리큘럼과 비슷하지만 그 수업 진행 방식이 굉장히 독특하며, 시간표 안에 정규 공립학교에서 쉽게 찾아볼 수 없는 교과목도 적잖이 섞여 있다.
수업의 가장 큰 특징은 교과서가 수업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적다는 사실이다. 물론 모든 수업이 기본적으로 교과서를 참고하기는 하나, 교과서의 내용을 그대로 따라가는 것이 수업의 전부는 아니다. 수업 방식은 해당 교과목 담당 선생님의 재량에 따라 조금씩 달라지기는 하지만 대체로 몇 가지 도드라지는 형태를 띤다.
첫째는 '활동책'을 활용하는 수업이다. 이 활동책은 보통 교과목 담당 선생님이 직접 제작하는데, 학생이 주도적으로 내용을 채워 나가게끔 구성되어 있고 교과서에 등장하지 않는 개념과 배경, 실제 사례를 종합하여 이와 관련한 토론 논제를 제시하게끔 하기도 한다.
또 다른 수업 방식은 이른바 '거꾸로 수업'이다. 학생이 먼저 스스로 지식을 탐구한 이후,선생님과 학급 전체가 한자리에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오류를 정정하며 다음 개념으로 나아가는 방식이다.
그 밖에도 도서관에서 자유롭게 서적을 찾고 해당 서적을 참고하여 글을 조직하는 활동, 영상 및 기타 형태로 컨텐츠를 직접 창작하는 활동, 토론과 발표를 병행하는 활동이 자주 진행되곤 한다.
오후 3시 즈음에 울리는 종소리는 하루 중 가장 밝고 신나게 들린다. 정규 수업이 끝났음을 알리는 소리인 까닭이다. 그 종소리를 기점으로 학교 곳곳에서는 영화 재생 소리, 외국어 회화 소리, 열띤 토론 소리등이 들려오기 시작한다. 바로 '1차 방과후학교'시간이다.
정규 수업 이후에는 방과후학교라는 이름으로 각종 강좌가 제공되는데, 대학에서 채택하는 수업과 비슷하게 학생들이 알아서 수강신청을 하고 공강을 만들 수 있는 방식이다. 1차 방과후학교는 저녁 식사 이전까지 진행되며, 영화 / 철학 / 외국어 / 기타 교과목 등 주로 학술적인 강좌가 주를 이룬다.
1차 방과후학교가 끝날 시간에 맞추어 다시 한 번 종이 울리면, 학교 이곳저곳에서 요란한 소리가 터져 나오며 청소 시간이 시작된다. 앞으로도 거듭 확인하게 되겠지만 우리 학교는 청소를 많이, 그것도 정말 많이 한다. 이른 저녁 나절 진행되는 본관 청소는 실내 청소와 야외 청소의 2가지로 나뉘는데, 실내 청소는 말 그대로 학교 곳곳을 쓸고 닦는 등보다 '청소의 정석'다운 느낌을 준다면 야외 청소는 낙엽을 쓸고 잡초를 캐며 콩을 수확하는 것처럼농촌 체험활동에 조금 더 가까운 업무를 맡게 된다. 자신이 맡은 청소구역으로 가서 청소를 마치면 그토록 고대하는 저녁식사를 할 수 있다. 시간표 상 '빨리 일한 자가 빨리 먹는' 구조가 되다 보니 아이들은 모두 청소를 최대한 신속하게 끝내려 혈안이 되어 있지만, 담당 구역 선생님의 검사를 통과하지 못하면 밥 좀 빨리 먹어 보려다가 도리어 청소만 두 번 하게 되는 상황이 벌어지니 맡은 일을 제대로 끝내야 함은 당연한 일이다.
북적이던 식당에서 아이들이 빠져나가고 운동장에 땅거미가 내려앉기 시작하면, 학교 곳곳에서 온갖 악기 소리가 울려 퍼진다. 이 '2차 방과후학교' 시간에는 주로 피아노, 첼로, 가야금, 해금 등의 악기 강좌와 미술, 재즈댄스, 사물놀이 등의 기타 예체능 계열 강좌가 개설된다. 학교는 1인 1악기를 장려하고 있기 때문에 모든 아이들은 저마다 다룰 줄 아는 악기 하나씩을 지니게 된다.
학교에 완연한 어둠이 내리고 2차 방과후학교 시간이 막바지로 접어들면 슬슬 기숙사로 돌아가 보아야 할 때가 온 것이다. 하루 일과를 마치고 들어서면 거대한 기숙사의 로비가 더 아늑하게 느껴진다.
새로운 집, 기숙사
기숙사의 문을 열고 들어서면 가장 먼저 커다란 로비가 우리를 반긴다. 공강인 아이들은 일찌감치 씻고 기숙사에서 여유를 즐기고 있기 때문에, 로비에 드러누워 있거나 옹기종기 모여 앉아서 잡담을 나누는 아이들이 심심찮게 보이기도 한다.
모든 방은 로비와 연결되어 있고 자기 방이 아닌 곳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분위기다. 로비에서 고개를 돌려 주위를 한 바퀴 둘러보면 저마다의 방법으로 시간을 보내는 아이들의 모습을 구경할 수 있다. 불을 모두 꺼 놓고 잠을 청하는 방, 바글바글 모여 앉아 수다를 떠는 방, 매트를 깔아 놓고 운동 삼매경에 빠져 있는 방, 심지어는 음악을 틀어 놓고 춤을 추는 방도 있다.
9시가 되면 로비에 모두 모여 점호를 진행한다. 점호는 '알짬'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이때 인원을 체크하고 사감 선생님과 사생장이 그날의 공지사항을 전달하게 된다. 알짬은 비교적 딱딱하지 않은 분위기이기 때문에 공지사항이나 건의사항이 있는 사람이 자유롭게 손을 들어 발표를 하기도 하고, 잃어버린 물건을 찾아 달라고 모두에게 간청하기도 한다.
알짬의 마지막 순서는 '칭찬합시다' 시간인데, 의외로 경쟁이 치열해서 누구 한 명을 칭찬할라 치면 바람보다 빠르게 손을 치켜들어야 겨우 발언권을 얻을 수 있을 정도다. 그렇지만 그 경쟁을 뚫고 칭찬을 할 수 있는 권리를 쟁취해낸 아이들이 막상 실제로 내뱉는 칭찬은 지극히 사소한 것들이 대부분이다.
"제 지우개를 찾아 준 OO이를 칭찬합니다."
"오늘 간식 당번이 저였는데 무거운 상자를 같이 들어 준 OO이를 칭찬해요."
"볼펜을 빌려 준 OO이를 칭찬합니다. 필기감이 너무 좋더라구요."
그런 칭찬 세례를 계속 듣고 있자면 그 내용이 제법 귀엽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알짬이 끝나면 간식 시간이다. 로비에 둥글게 모여 앉아 빵과 음료수 등을 먹는다. 아주 드문 일이긴 하지만 입맛이나 컨디션을 이유로 어느 한 명이 그날의 간식을 안 먹는다고 하면 그 여분의 간식을 쟁취하기 위한 경매가 벌어지기도 한다.이곳에서 볼펜은 얼마든지 남에게 빌려 줄 수 있어도 간식은 결코 남 주지 않는 것이다.
간식을 먹고 나면 저녁 청소를 해야 한다. 하루에 있는 세 번의 청소 중 가장 몸을 불살라야 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본관 청소는 최소한 사회적인 체면을 차릴 수 있는 옷차림으로 적당히 적당히 청소하면 되었지만 기숙사 청소는 옷부터 다르다. 가장 활동성이 편한 옷을 입고 가장 편안한 자세로 팔과 다리를 있는 대로 쭉쭉 뻗어 청소를 해야만 통과를 받을 수 있다. 청소를 마치면 각자의 방으로 돌아가 자습을 하게 되는데,숙제나 독서는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지만 언제나 몰래 하는 아이들이있기 마련이다. 숙제와 독서뿐일까? 눈썹을 가지런히 정리하는 등 미용에 신경을 쓰는 아이들도 있고, 옆자리 아이와 연애 상담을 하는 아이들도 있고, 아주 대범하게는 콘센트 구멍에다 대고 소근거려 옆방과 의사소통을 시도하는 아이들도 있다.
10시 50분이 되면 참았던 숨을 내뱉듯 순식간에 기숙사 안이 소란스러워지며 세면 시간이 된다. 자유롭게 씻고 자리에 누워 천장의 흙벽을 바라보고 잠을 청하면 비로소 길었던 하루가 끝이 난다.
이렇듯 정해진 일과가 하루를 꽉꽉 빈틈없이 채우고 있지만, 학교에서의 나날이 늘 이렇게 반복되는 것만은 아니다. 3월의 중순으로 접어들면 '하루나들이'라는 새로운 이벤트가 우리를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