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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린 Oct 23. 2021

하루나들이, 산악등반 준비

이제는 바깥으로 나갈 시간

비록 정해진 하루 일과가 존재하긴 하지만, 그 일과대로 일 년 365일을 똑같이 반복하기만 한다면 결코 대안학교라는 이름을 달 수 없었을 것이다. 우리 학교에 온 이상 모든 학생들은 언제든 자리를 박차고 바깥으로 뛰어나갈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커리큘럼 자체가 '바깥으로 나가기'를 권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3월의 중순에 다다르면 일 년 중 처음으로 전교생이 함께 '바깥으로 나가는' 시간이 찾아온다. 바로 하루나들이다.



하루나들이


하루나들이는 전교생이 여러 개의 조로 나뉘어 학교에서 꽤 떨어진 거리에 있는 저수지 인근의 공원까지 도보로 다녀오는 활동이다. 모두의 달력에 똑같이 낭만적인 이름으로 적혀 있지만 그 이름을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딱 학교에서 살아 온 세월에 비례해 차이가 난다.

하루나들가 처음인 1학년들은 그 이름에 걸맞게 하루 동안 여유롭게 주변을 거닐며 시간을 보내는 산책 기대한다. 하지만 2, 3학년에게 있어 하루나들이란 조금 더 거친 어감의 단어다. 학교 근처는 모두 넓은 논과 시골길, 차가 다니지 않는 도로 등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사실상 코스를 따라 단체로 이동하는 본격적인 트레킹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하루나들이 당일 아침이 되면 전교생이 운동장에 모여서 가볍게 몸을 풀고, 간단한 주의사항을 안내받은 뒤 각자의 조로 투입된다.


모든 학생이 제자리에 모이면 각 조는 서로 다른 코스로 걷기 시작한다. 대개 한 줄 내지 두 줄을 이루어 선두에 선생님과 3학년 학생이 서고, 그 뒤로 1, 2학년들이 따라붙는다. 하루나들이 일정의 대부분은 정말 '걷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수업을 하지 않는다는 것만으로도 두근거려서 지루할 틈도 없이 온 사방의 봄이 너무나 아름답게 느껴지곤 한다. 꽃은 왜 그렇게 예쁘게 피어 있고, 사방에 감도는 연둣빛은 왜 그렇게 아름답고, 하늘은 왜 그렇게 파란지! 봄을 만끽하며 걷다 보면 가끔 지나가는 인근 주민들 - 주로 할아버지와 할머니들 - 과 마주쳐 인사를 나누게 되기도 한다. 선두에 선 아이가 밝게 '안녕하세요'라고 인사를 드리면 흐뭇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던 할아버지와 할머니들께서는, 그 뒤로 길게 늘어선 아이들이 우르르 곁을 지나치며 연달아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라며 끝없는 인사 폭탄을 날리는 광경을 보고 조금 당황하시기도 한다.


한 줄로 나란히 서서 이동한다고 하면 굉장히 정적이고 재미없을 것이라 여기는 사람이 대다수이지만, 아이들은 이 구조를 십분 활용하여 하루나들이를 일종의 레크리에이션 시간처럼 활용하 한다. 이런 레크리에이션은 자발적이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하는 경우가 많다. 가만히 걷다 보면 아주 높은 확률로 앞이나 뒤를 걷고 있던 친구 중 적어도 하나가 조용히 나를 부르는 소리를 듣게 될 것이다.

"야."

"왜?"

"끝말잇기 할래?"

아이들은 앞과 뒤에서 걷는 친구들을 꼬드겨 369 게임을 한다거나, 끝말잇기를 한다거나, 함께 노래를 부르는 등 다양한 방식으로 무료함을 쫓아 버리곤 한다. 한 줄로 서서 가면 말이 잘 들리는 범위는 보통 앞뒤로 3~4명까지가 최대인데, 이것보다 더 크게 '놀이 구역'이 형성되면 앞 사람이 한 말을 뒷 사람이 그대로 전달해 주어야 하며 간혹 의사소통이 막히는 진풍경도 생긴다. 어찌되었건 아이들은 누가 가르쳐 준 것도 아닌데 '알아서 잘 논다'.

길을 가는 도중 한 번씩은 꼭 넓은 공터나 그늘막, 정자 등에 잠시 멈춰 모두가 함께 쉬어 가는 시간을 가지는데, 이 때 미리 가져온 작은 과자와 초콜릿, 과일을 먹으며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순간은 하루나들이만의 묘미 중 하나다. 



산악등반 조 떴다!


하루나들이도 마쳤으니 이제 당분간은 발 뻗고 기숙사에서 잠이나 자면 되겠지, 라고 생각했다면 큰 오산이다. 사실 하루나들이는 더 큰 '뛰쳐나감'을 위한 준비 단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지나가는 선배들을 아무나 붙잡고 물어보자.

"언니, 우리 학교에서 제일 큰 행사가 뭐야?"

그럼 열 번의 질문을 했을 때 적어도 여덟 번은 '산악등반'이라는 답이 돌아올 것이다. 산악등반이라니, 학교 근처 산이라도 오르는 걸까?


매년 5월이 되면 전교생은 조별로 나뉘어 3박 4일 동안 지정된 코스를 따라 지리산을 등반하게 된다. 능선을 따라 산을 오르고, 직접 밥을 짓고, 대피소에서 잠을 자며 행군을 거듭하는 것이다. 학생들이 가장 힘들어하는 행사지만 동시에 학생들로 하여금 많은 추억을 쌓고 서로 돈독해지게 하는 일 년 중 가장 큰 행사이기도 하다. 규모가 규모인 만큼 산악등반을 한 달 앞둔 4월부터 온 학교가 일찌감치 등반 준비에 돌입하곤 하며 하루나들이는 그 준비 과정의 일환이다.

 

산악등반 준비 과정부터 지리산 완등까지의 모든 과정을 함께할 사람들이 바로 산악등반 조원들이다. 그래서 이 무렵 학생들의 가장 큰 관심사는 바로 산악등반 조 편성 발표다. 이건 단순히 누구와 산을 같이 오르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누구와 짐을 나누어 들게 될 것인가?' '산에서 누구와 함께 밥을 짓고 잠을 자게 될 것인가?' '누구에게 꼬질꼬질한 모습을 여과 없이 보여주게 될 것인가?' 의 문제인 셈이다.

산악등반 조는 전교생을 아홉 개의 '가족'이라는 작은 그룹으로 나누고, 이 '가족'을 세 팀씩 모아 다시 A조, B조, C조라는 큰 팀을 이루는 방식으로 배정된다. 누군가와 같은 '조'에 배정되면, 그 사람과 같은 코스로 지리산을 올라 같은 대피소에서 머물게 되겠군, 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그런데 누군가와 같은 '가족'에 배정되면, 모두가 암묵적으로 이렇게 생각한다: 음, 쟤랑 4월 한 달 동안 꾸준히 얼굴을 맞대고, 같이 체력훈련을 하고, 짐도 같이 나눠 들고, 산악등반 내내 함께 밥을 먹고 잠을 자며 서로의 온갖 초췌한 몰골을 여과 없이 보게 되겠군.

그러니 학생들이 산악등반 조 발표를 목이 빠져라 기다리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사실 중요한 것은 '조'보다 '가족'일지도 모르지만.

누군가 '산악등반 조 떴다!'라고 외치고, 교무실 앞 게시판이 수많은 사람들로 북적이기 시작한다면 산악등반 조 편성이 막 공지된 것이다. 인파를 헤치고 조 배정표를 확인한 뒤에는 사전 모임을 위해 강당으로 향해야 한다.  


사전 모임은 전교생이 강당으로 모여 올해의 산악등반 진행 일정에 관한 안내를 듣고 기본적인 안전교육을 받는 시간이다. 주로 선생님들이 아이들의 경각심을 일깨우고 체력 단련에 보다 진지하게 임하도록 만들기 위해 다양한 말로 '겁을 주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산에서 다리가 부러지는 경우도 있어요. 여기 혹시 다리 부러져 본 사람 있나?"

"산에서 독사를 만날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도 날이 좋으면 산을 오르는데 뱀이라고 산을 안 오를까요?"

선생님들의 실감 나는 묘사를 가만히 듣다 보면 우리가 정말 저렇게 위험 요소가 득실대는 미지의 소굴에 발을 들여야만 하나? 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함이니 너무 겁을 먹지는 않아도 된다.


산에서 발생할 수 있는 각종 사고에 대비한 안전 교육을 받은 이후에는 조별로 둥글게 모여 앉아 조의 이름과 구호를 정하고 상징 깃발을 디자인하는 작업에 돌입한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매년 이 조별 모임 시간은 일종의 쇼맨십 경연대회처럼 여겨져 많은 학생들이 서로 가장 위트있는 조 이름과 구호를 고안해내기 위해 머리를 쥐어짜내곤 한다.

조별로 이름과 구호를 만들고 깃발을 꾸미는 시간이 마무리되면 각 조가 순서대로 단상에 올라 이를 발표하는데, 이때 아이들은 입학식 노래를 부를 때 양껏 드러냈던 뻔뻔함을 다시 발휘하고는 한다. 간혹 조 구호 시연도 시원찮고 목소리도 작아 청중의 반응이 저조하면, 선생님들은 가차없이 손짓한다.

"다시."

그럼 그 조는 처음부터 다시 구호를 외치고 자기네 조 깃발의 미학적 가치에 대해 열변을 토해내야 한다.

이와는 반대로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참신한 이름과 구호를 들고 나오는 조가 있다면, 아이들은 아낌없이 열띤 리액션을 보낸다.






"평소보다 30분 일찍 일어나라고요?"

"운동장을 달리든가 기숙사에서 윗몸일으키기를 하든가 하라구요?"

매일 아침 체력단련을 진행한다는 말을 듣고 나면 1학년 친구들은 한동안 현실을 부정한다. 그러나 기상송이 이전보다 훨씬 이른 시간부터 울려 퍼지기 시작하면, 아이들은 비로소 이 체력단련이 남의 이야기가 아니며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을 것임을 직감하곤 한다. 모두가 운동장을 달리고 각종 트레이닝을 하기 시작하면, 매일 아침 지저귀던 새들도 아직 일어나지 않았을 것만 같은 적막 속에 땀 냄새와 곡소리가 가득 들어찬다. 간혹 운동장에서 남자기숙사와 여자기숙사가 만나기도 하는데, 매일 식당 문을 차지하기 위해 경쟁하곤 하는 사이이지만 이때만큼은 자연 상태 그대로인 서로의 모습을 모르는 척 눈감아 주는 인류애 넘치는 관계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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