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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린 Oct 24. 2021

산악등반: 하늘을 이고 잠드는

"얘들아. 삶이 힘드니?"

"아뇨......."

"그럼 왜 얼굴이 그렇게 어두워?"

"저희가 곧 산을 올라야 한다는 게 거짓말 같아서요."


산악등반이 일주일 앞으로 훌쩍 다가온 시점이 되자, 밤에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하는 아이들이 속출하기 시작했다. 산과 담을 쌓은 채 살아 왔던 열네 살짜리에게 '지리산'이라는 이름은 실로 험준하고 가혹하게만 느껴지는 탓이다. 살면서 내가 올라 본 산이라고는 동네 뒷산이 전부였는데, 그마저도 힘들어서 걷다 앉았다 걷다 앉았다를 겨우 반복했는데, 내가 과연 조난당하거나 부상당하지 않고 무사히 내려올 수 있을까, 내 몸만한 등산 가방을 들고 어떻게 산길을 오르지....... 수많은 걱정이 매일 밤 꼬리에 꼬리를 물고 허공을 떠다니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시간은 야속하게 흘러만 간다.


산악등반이 코앞으로 다가오면 학교의 분위기도 사뭇 달라진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담소와 웃음소리가 심심찮게 들려오던 체력 단련 시간은 언제 그랬냐는 듯 웃음기가 쫙 빠진 건조한 시간이 된다. 누군가 조금이라도 실수를 하면 선생님들의 가차없는 불호령이 떨어진다.

"산 올라가서도 이런 식으로 할래?"

이런 식. 산에 올라가서는 단 한 번의 '이런 식'도 순식간에 큰 사고로 이어질지 모른다. 그 말의 무게를 너무도 잘 알기 때문에 모두가 정신을 바짝 차리려고 노력한다.


산악등반을 앞두고 모든 '가족'들은 저마다의 체계를 갖춘다. 조별로 담당 선생님과 학생들이 모여 조장, 부상자 담당 팀장, 후발대 등의 직책을 배정하고, 산을 오르며 선두부터 후발대까지 짧은 시간 안에 의사소통을 할 수 있도록 미리 신호를 정한다. 더불어 산에서 고립되었을 경우, 부상자가 발생했을 경우, 경로를 이탈했을 경우처럼 등반 중 발생할 수 있는 각종 안전사고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를 배다. 지혈하는 법, 붕대를 매는 법, 골절이나 기타 부상을 입은 환자에게 해야 할 처치 등에 관해 들으면 들을수록 우리는 울고만 싶어졌다. '혹시 저게 내 미래가 되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렇지만 그 울고 싶은 기분도 잠시, 메뉴 선정 시간이 되면 아이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평정심을 되찾곤 한다. 메뉴 선정은 산악등반 준비에서 빼놓을 수 없는 가장 중요한 절차다. 각 가족별로 3박 4일의 일정 동안 산에서 어떤 음식을 어떻게 해 먹을 것인지를 정하는데, 평소에 대답을 두 마디 이상으로 하는 법이 없던 친구도 "첫날 저녁 메뉴는 양식이고, 양식은 마지막 날 하산한 뒤 해 먹기로 했으니까, 무거운 재료를 미리 산장으로 보내고 산 위에서는 이걸 해 먹는 게 합리적이라고 생각해요." 라고 명료하게 자신의 의사를 밝히는 놀라운 광경을 볼 수 있다. 그만큼 밥은 중요한 것이다.

조리가 복잡하고 많은 재료를 필요로 하는 메뉴는 가져가야 할 짐을 늘리기 때문에, 소위 말하는 '특식'은 마지막 날 하산한 뒤 펜션에서 먹는 저녁식사로 배치하는 경우가 많다. 물론 꼭 산 위에서 무언가 특정한 메뉴를 먹어야겠다면, 자신이 원하는 메뉴를 관철시키는 마법의 대사도 있긴 하다.

"재료는 제가 다 들게요."


등산배낭을 꾸리기 시작하면 처음 산악등반을 경험하는 친구들은 챙길 게 이렇게나 많냐며 혀를 내두르곤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아주 기본적인 것만 챙긴다 해도 버너, 냄비, 쌀, 김치, 물, 각종 그릇과 조리 도구, 비상 의약품, 여분의 등산복, 손전등에 이르기까지 실로 많은 물품을 구비해야 하기 때문이다. 건강상의 이유로 등반을 할 수 없는 학생들은 별개의 조에 편성되어, 다른 학생들이 하산 후 도착할 펜션으로 미리 향하게 된다.


결코 오지 않을 것만 같았던 그날이 밝아 오면, 1학년들은 너나할 것 없이 약속이라도 한 듯 한숨을 쉬며 눈을 뜬다. 산악등반 당일에는 평소보다 훨씬 이른 시간에 일어나 아침식사를 하고 장비를 챙겨야 한다. 아침식사를 마치고 바깥으로 나가면 학교 운동장에 세 대의 큰 버스가 주차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2, 3학년들은 그 버스에 여유롭게 몸을 실으며 마치 전문 산악인 같은 느낌을 물씬 풍기는 대화를 나누곤 다.

"아, 지금쯤 세석에 철쭉 피어 있을까?"

"이맘때 거기 진짜 절경이지."

"나 장터목은 눈 감고도 다니는데, 이번엔 다른 곳이라 아쉽네."

그러나 불쌍한 1학년들은 담소를 나눌 여력도 없이 오직 한 가지 생각만을 반복할 뿐이다.

'나 진짜 산 오르나? 내가 정말 지리산을 오른다고?'

정말 산을 오르는 게 맞다. 버스를 타고 한참을 달려 저만치에 지리산 능선이 보이기 시작하면, 산악등반이 남의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결국 받아들이게 된다.


목적지에 도착하면 조별로 대형을 갖추어 여러 단계의 준비운동을 끝마치고 복장과 장비의 상태를 최종적으로 점검한다. 맨 앞사람부터 맨 뒷사람까지 모두 등산화 끈을 단단히 묶은 것을 마지막으로 확인하면, 조장과 담당 선생님을 선두로 행렬을 이루어 본격적으로 산을 오르기 시작한다. 나무 발판과 비교적 평탄한 계단을 오르는 처음 얼마간은 그저 집 근처 야산의 산책로를 오르는 기분이라 예상 외의 수월함에 당황할 수도 있지만, 우리의 학교에 어김없이 적용되는 '평범하다 싶으면 반전이 시작된다'라는 원칙은 산악등반이라고 예외가 아님을 명심해야 한다. 제법 견딜 만하다고 생각하기가 무섭게 선두에 선 조장 선배와 선생님이 '정말 이게 길이라고?' 싶은 곳으로 들어서는 모습을 보게 될 것이다. 방금 여기로 가야 한다고 하셨나요? 제 눈앞에는 험준한 바위밖에 없는데요? 정말 여기가 길이 맞나요?

도무지 길 같지 않은 길을 마주하고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겠을 땐, 그저 앞을 걷는 선배의 등과 발에만 집중해서 선배가 밟은 자리를 똑같이 골라서 따라 밟으며 한 걸음씩 한 걸음씩 떼면 된다. 숨이 턱끝까지 차올라 지치기 일보직전이 되면 1학년들의 상태를 주시하고 있는 선배들이 적당히 휴식을 취하자는 신호를 보내곤 한다.


저 멀리 대피소의 지붕 끄트머리가 보이기 시작하면 그날의 행군은 끝이다. 대피소에 도착해 어깨를 짓누르는 무거운 가방을 내려놓고 나면 다들 표정이 한결 밝아진다. 이제 밥을 지어 먹는 중요한 과업만이 남았다.



하늘 가까이에서 먹는 밥, 하늘을 이고 자는 밤


모든 조원은 가방을 내려놓자마자 그 안에서 자신이 도맡은 식재료와 취사 도구를 꺼내들고 취사장으로 모여야 한다. 취사는 일몰 전까지 마쳐야 하는데 산 위에서는 해가 훨씬 빨리 지니 서둘러야 한다. 주로 1학년은 물을 긷고 설거지를 하는 등 특별한 전문 기술 없이도 할 수 있는 '뒤치다꺼리'를 맡게 고, 밥의 물을 세심하게 맞추고 국과 반찬의 간을 조절하는 막중한 임무는 2, 3학년들이 맡는다. 무거운 돌을 냄비 위에 올리고 말로만 듣던 '뜸 들이기'를 지켜보면, 간절한 시선들에 화답이라도 하듯 냄비 사이로 하얀 연기와 함께 갓 지은 밥 냄새가 피어오른다. 깎아지른 듯 높은 산의 꼭대기에서 뉘엿뉘엿 지는 노을을 바라보며 먹는 밥은 별다른 반찬 없이도 감동적인 맛을 내곤 한다.


대피소의 밤은 동화 속에서 보던 '겨울 산장'의 느낌과 놀랍도록 닮아 있다. 모두가 자기 몫의 담요 두 장씩을 받고 나무로 된 바닥 위에 일렬로 누워 잠들기 전까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눈다. 이전까지 별다른 접점이 없던 선배와 친구들이더라도 한바탕 수고스러운 등반을 거치고 나면 훨씬 가까워진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다. 일찌감치 불이 꺼진 대피소 안에 누워, 별이 쏟아질 것 같은 하늘을 이고 잠에 들면 순식간에 다음날이 밝아 온다.


그렇게 산 위에서 무사히 사흘째 아침을 맞이하고 나면 다시금 땅을 향해 내려가야 할 시간이 다가온다. 세 개의 조로 나누어졌던 전교생은 저마다의 하산 속도에 맞추어 하나둘씩 다시 지리산 아래의 펜션으로 모이게 되고, 반가운 얼굴들이 한자리에 모이면 3박 4일 간의 대장정을 마무리하는 마지막 밤이 시작된다.

지난 3일 동안 제대로 씻지 못했던 몸을 뽀드득 소리가 날 만큼 깨끗이 씻고, 각자 조에서 야심차게 준비한 '특식'으로 저녁식사를 마치고 나면 세상에 잘 씻고 잘 먹는 일만큼이나 행복한 것이 또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후 각 가족별로 등반 과정에서 느꼈던 감상이나 특별한 일들, 어깨 너머로 전해들은 지리산 관련 이야기를 모두의 앞에서 발표하곤 하는데, 대개 이런 '발표'는 직접 고안한 노래를 부르거나 대피소에서 미리 짜낸 연극을 보여주는 등 다양한 방법으로 진행된다. 


모두의 발표가 끝나면 무사히 산악등반을 마치는 것을 자축하는 의미로 바깥에 둘러 앉아 피자와 치킨을 나누어 먹으며 떠들썩한 밤을 보내는 일만이 남았다. 지리산 아래에서 위를 올려다보면서 불과 몇 시간 전까지 우리가 있었을 자리를 가늠해 보며, 산에 잠시 안녕을 고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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