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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린 Oct 24. 2021

집을 짓고, 희곡을 쓰고, 요리를 하는 가을

새 학기와 토요인문학

가을이 되면 잠시 떠나 있던 학생들이 제자리로 돌아오고, 고요했던 학교가 다시금 시끌벅적하게 변한다.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낯섦과 어색함에 기숙사에서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했던 1학년 친구들은 이제 '오랜만에 학교에서 자니까 몸이 좀 찌뿌둥하네요.' 라는 말도 천연덕스럽게 내뱉을 줄 알게 된다. 어째 학교생활에서 체득하게 되는 덕목으로는 비단 능동성 더불어 살아가는 마음 같은 것뿐만 아니라 '능청스러움'도 포함되어 있는 하다.

 

새 학기가 시작되면 강당에 전교생이 모여 전체 모임을 진행한다. 방학 동안 새롭게 쌓인 공지사항, 방학 동안 미루어 둔 칭찬, 방학 동안 나누지 못했던 이야기를 한데 내어놓는 시간이다. 더불어 이 전체 모임에서는 2학기를 맞아 이것저것 새롭게 정해야 할 일들이 많은데, 방과후학교와 스포츠클럽, 토요인문학 등 다양한 강좌의 수강신청을 확정하는 것이 가장 대표적이다.



토요인문학


토요인문학이란 그 직관적인 이름답게 귀가를 하지 않는 격주 토요일마다 열리는 인문학 강좌다. 매 학기마다 한 과목씩을 선택하여 수강할 수 있다. 1학년들의 경우 입학 첫 학기에는 '인문학 입문'이라는 이름의 지정된 코스를 수강해야 하기 때문에 토요인문학을 고를 수 없지만, 2학기부터는 다른 선배들과 마찬가지로 원하는 강좌를 선택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진다.


인문학이라는 이름 아래에 실로 많은 영역이 존재하기에 토요인문학 시간에 개설된 강좌의 내용도 이루 말할 수 없이 다채롭다. 간혹 인기가 많은 강좌는 수강 인원이 넘쳐 부득이하게 일부 학생들을 잘라내야 하는 경우가 생기는데, 이때 수강 인원을 정하는 방식이 제법 재미있다.


"준비."

선생님의 말을 신호로, 먼저 넓은 강당의 끝에 아이들 일렬로 선다. 이윽고 강당 안에 전운이 감돌고 모두가 침묵하는 찰나의 순간, 선생님들이 이렇게 외친다.

"출발!" 

그럼 아이들은 원하는 강좌의 팻말이 서 있는 곳을 향해 이를 악물고 달려와 줄을 선다. 늦게 도착한 사람은 가차없이 밀려나 다른 강좌를 찾아야 한다. 대학에서의 수강신청이 인터넷 클릭으로 줄을 서는 것이라면, 우리네 수강신청은 정말 몸을 써서 줄을 서야 하는 셈이다. 물론 재미있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구경하는 입장에만 해당할 뿐이고, 강좌를 수강하고 싶은 당사자들에게는 피 말리는 단거리 달리기에 더 가깝다.

올해에는 어떤 강좌에 사람들이 많이 몰릴지를 예측할 수 있는 뚜렷한 기준은 없다. 그렇지만 매년 선배들에게서 후배들에게로 구전을 통해 전해내려와 항상 인기가 많은 코스가 존재하긴 하는데, 사실 코스의 내용보다도 '저 강의에서는 간식을 많이 준다더라' '저 강의에선 영화를 자주 보여준다더라' 하는 알음알음 퍼진 입소문의 영향력이 더 크다고 할 수 있다.  


인문학 수업이 있는 토요일이면, 평소보다 느긋하게 아침을 먹고 느긋한 걸음으로 정해진 강의실을 향해 등교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학교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학교를 한 바퀴 돌아보면 이쪽에서는 영화 소리가 흘러나오고, 저쪽 교실 너머에서는 무언가를 열심히 지지고 볶는 소리가 들려오곤 한다. 각 교실 안에서는 어떤 광경이 펼쳐지고 있을까?

 

인문학 입문

도서관 한가운데의 거대한 홀로 향하면 토요일의 나른한 아침 햇살을 받으며 책을 읽는 학생들을 만날 수 있다. 매 1학기에는 1학년들을 대상으로 제공되고, 2학기에는 신청자를 대상으로 진행되는 인문학 입문 시간이다. 책의 발췌 대목을 읽고 함께 이야기를 나누며 글을 쓰는, 말 그대로 '인문학 수업의 정석' 느낌이다.


희곡

한편 다른 교실의 문을 열 머리를 맞대고 떠오르지 않는 무언가를 쥐어짜내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이 보인다. 너희 뭐 해?라고 질문을 던지면 아이들 사이에선 으레 이런 답이 돌아오곤 한다.

"말 시키지 마. 대사 써야 해." 

곡 수업은 희곡 대본을 읽고 감상을 나누어 보기도 하고, 희곡의 구성 요소에 대해 배우기도 하고, 직접 희곡을 구상해 보기도 하는 수업이다. 희곡을 작성하는 시간이 되면 교실 안에 마치 극작가들을 모아 놓은 것마냥 '내 대사 좀 봐 줘' '이건 쳐내고 이건 살릴까?'하는 말들이 흘러나오기도 한다.


발표

이따금씩 전산실 앞을 지나가던 아이들은 의미심장한 이야기를 퍼 나르곤 한다.

"야. 전산실 쪽 가 봤어?"

"아니. 거기 뭐 있어?"

"안에서 무슨 프로파간다라도 하는 것 같아."

대체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기에 프로파간다라는 강렬한 수식어가 붙는 것일까? 피어오르는 궁금증에 전산실로 향하면 커다란 스크린 앞에 서서 손짓 발짓 다 써 가며 열성적으로 무언가를 말하고 있는 학생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바로 발표의 기술, 효과적인 화법, 프레젠테이션 방법을 다루는 강좌다. 말을 잘 하고 싶은 아이들, 그리고 말을 잘 하는 아이들의 두 부류가 포진해 있다는 소문이 들려온다. 발표를 하는 아이들의 전략은 꽤나 다양한데, 깔끔하고 미학적인 시각자료로 시선을 사로잡는 아이들이 있는가 하면 별다른 배경자료 없이도 현란한 말솜씨와 웅변으로 듣는 사람의 마음을 낚아채는 아이들도 있다.


요리문화탐구

토요일이면 어딘가에서 풍겨 오는지 모를 맛있는 냄새가 학교의 공기 중을 떠다니곤 한다. 이 냄새의 근원지는 본관에서 조금 떨어진 실습실이다. 실습실에서는 '요리문화탐구' 수업이 한창으로, 수많은 아이들이 분주히 움직이며 각종 요리 재료를 나르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요리문화탐구라. 그 이름은 다분히 학술적이고 거창하지만 사실 세계의 식문화에 관한 탐구는 수업의 일부에 불과하다. 아이들은 '경험해 보지 않으면 알 수 없다'라는 슬로건을 내세워 다양한 음식을 직접 만들어 먹어 보기를 추구한다. 덕분에 매 수업시간마다 마들렌, 오코노미야키, 파스타, 살사 소스를 끼얹은 타코 등 국적도 모양도 다양한 진수성찬을 맛볼 수 있다.


영화의 철학적 이해

얼핏 대학 교양 강좌의 이름 같은 느낌을 물씬 풍기는 이 수업은, 말 그대로 영화를 시청하며 영화의 미장센, 셔레이드 같은 분석적 측면과 영화에 담긴 인문학적, 철학적 상징을 읽어내는 시간이다. 강의 제목에 영화가 들어가 있다고 해서 매주 편안히 영화를 관람하고 끝날 것이라는 생각에 수강신청을 하면 안 된다. 수업의 방점은 '영화'가 아니라 '철학적 이해'에 찍혀 있기 때문이다. 유의미한 상징과 장면이 나올 때마다 영화가 일시정지되고 그에 관한 설명을 이어나가는 탓에 이 수업에서는 영화를 10분 이상 잠자코 보는 일이 없다.


건축

건축은 매 해마다 희망 수강자 부동의 1위를 달리는 수업이다. 강당 저쪽 끝에서부터 열심히 달려오는 아이들을 가장 많이 만들어내는 수업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건축은 말 그대로 건축 양식을 탐구하고 기본적인 건축의 원리를 모형으로 직접 체험해 보는 시간인데, 이 강좌가 매년 명예의 전당을 지키게끔 해 주는 주춧돌은 사실 아이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는 소문이다.

"건축 대박이야. 집 모형을 과자로 지어."

어쩐지 매번 실습은 하는데 결과물은 남아 있지 않더라니. 헨젤과 그레텔에 나오는 과자 집마냥 일단 한 번 건물을 세우고 그걸 먹어서 철거한 모양이다.


토요인문학은 성적 산출과 무관한데다가 평소 쉽게 접하기 어려운 흥미로운 분야를 다루기 때문에 아이들이 가장 가벼운 마음으로 편안하게 임할 수 있는 활동 중 하나다. 여유로운 오전을 여는 토요인문학 시간이 끝나면, 누군가 이렇게 외치는 소리를 시작으로 비로소 학교에서 맞이하는 주말이 열린다.


"로비로 모이세요!"



학교에서 보내는 주말


토요인문학이 끝나면 모두 본관 로비로 모여 자신의 자리에 주르륵 앉는다. 자유로운 주말을 맞이하기 위한 마지막 관문인 '인원점검 및 식사 수량 체크시간이기 때문이다. 주말이 되기 이전 아이들은 반별로 주말 상태표를 미리 작성해서 제출하게 되어 있는데, 귀가를 할 건지 / 외출을 나갈 건지 / 학교에 머물며 밥을 먹을 건지를 적어내야 한다.

모두가 로비로 모이면 그날의 당직 선생님이 앞에서 각 반별로 한 명씩 이름을 부르는데, 자신의 이름이 불리면 아이들은 귀가/외출 여부를 말해야 한다. 

"저는 귀가요." "일요일 외출이요." "토요일 외출이요."

이는 아이들이 말한 내용과 미리 제출한 표의 내용이 일치하는지를 확인하기 위한 절차다. 모든 인원 점검이 끝나면 그때부터는 완전한 자유시간이다. 아이들은 기숙사에 드러누워 잠을 자기도 하고, 책을 읽기도 하고, 바깥으로 나가 놀기도 한다.


"너네 왜 다 여기 있어?"
주말 당직 선생님은 교무실 문을 나설 때마다 깜짝깜짝 놀라며 이렇게 외치곤 하신다. 그도 그럴 것이 주말만 되면 교무실 앞 의자와 복도 바닥에 자리를 잡고 드러누워 있는 아이들이 한둘이 아니기 때문이다. 도서관에서도 비슷한 모습을 포착할 수 있다. 아이들은 저마다 이어폰 하나씩을 끼고 도서관 곳곳에 자리를 잡아 하루 종일 그곳에 뿌리를 내린다. 마치 양떼처럼 도서관과 교무실 앞에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 있는 이유는 간단하다. 거기가 학교에서 가장 인터넷이 잘 되는 와이파이 존이기 때문이다. 외부와 비교적 교류가 없는 이곳에서 아이들은 문명의 이기를 조금이라도 더 누려 보고자 기꺼이 와이파이 유목민이 되기를 자처한다. 


외출은 토요일과 일요일 중 하루를 정해 나갈 수 있다. 도시 중심부로 가려면 한적한 시골길 바깥으로 한참을 나가야 하기 때문에, 아이들은 '조금 더 많이 걷는 대신 돈을 아낄 것인지' 아니면 '돈을 더 내는 대신 편하게 갈 것인지' 사이에서 고민을 거듭하다가 버스를 탈지 택시를 탈지 결정한다. 외출 코스는 아이들의 성향에 따라 달라지는데, 평소 먹지 못했던 '바깥 음식의 맛'을 최대한 만끽하고자 식당, 카페 등을 위주로 돌아다니며 짧은 시간 안에 몇 끼니를 먹고 오는 아이들도 있고, 우르르 몰려가 몇 시간 동안 원없이 게임을 하다 나오는 아이들도 있고, 평소 보고 싶었던 영화를 보는 등 문화생활을 즐기는 아이들도 있다. 시내 곳곳에서 다른 친구들 무리를 심심찮게 마주치기도 한다.

주말의 저녁 풍경은 평소보다 훨씬 한가롭다. 기숙사 로비에 삼삼오오 모여 간식을 먹고, 이불을 깔고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들으며 자신만의 시간을 만끽할 수 있다. 귀가를 간 아이들 덕분에 방을 넓게 쓸 수 있다는 건 또 다른 장점 아닌 장점이다.



야외청소: 호미질을 하고, 콩을 털고, 낙엽을 쓸자


앞서 말했듯, 우리 학교의 청소구역은 실내 청소구역과 야외 청소구역으로 나뉜다. 한 달을 주기로 야외 청소 담당과 실내 청소 담당 아이들은 각각 청소 구역을 재배정받는 과정을 거치는데, 가을에 접어들면 야외 청소구역에 배정된 아이들 사이에서 각자 원하는 청소 구역을 따내기 위한 피 튀기는 경쟁이 벌어지곤 한다. 가을의 야외 청소 구역에는 큰 변동이 생기는 탓이다.


우리의 교정은 자연과 더불어 산다는 가치관에 맞게 온갖 꽃과 나무, 풀이 건물과 조화를 이루어 자연을 물씬 느낄 수 있는 편이다. 그런데 뒤집어 생각해 보면, 이는 곧 학교를 빙 둘러싸고 심어진 나무들이 조만간 엄청난 양의 낙엽을 떨어뜨릴 예정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따라서 1학기 때는 단순히 잡초를 뽑고 빗자루로 길을 쓸기만 하면 되었던 야외 청소 담당은, 2학기가 되면 학교 곳곳의 낙엽을 책임지고 쓸어야 하는 전담반으로 거듭나게 된다. 이 무렵 청소 시간에 운동장을 내다보면 한쪽에는 큰 싸리빗자루를 들고 있는 아이들이 우르르 서서 열심히 낙엽을 모으고 있고, 그 건너편에는 다른 아이들이 자기 키의 절 반이 넘는 커다란 마대를 든 채 재빨리 낙엽을 담고 있는 모습을 구경할 수 있다.


가을의 야외 청소 담당은 비단 낙엽을 쓸고 치우는 것뿐만 아니라 다른 중요한 임무도 도맡아야 한다. 학교 소유의 밭을 관리하는 일이 그것이다.

분명 오리엔테이션과 입학식 첫 주에 선생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어렴풋이 듣기는 했지만, 사실 실제로 밭과 맞닥뜨리기 전에는 그 밭의 존재에 대해 떠올리지 않는다. 그러다 야외 청소구역에 배정되고 자기 차례가 다가오면 아이들은 그제서야 한 가지 사실을 알게 된다. 밭이 정말 있구나, 그것도 아주 넓은 밭이.


생활을 스스로 꾸려 가는 것을 추구하는 우리의 학교는 그 가치관에 부합하게 식자재 중 일부도 가능하면 직접 키워내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래서 학교 바깥으로 나가 논길을 조금 걸어가다 보면 학교 소유의 밭에서 콩을 비롯한 여러 작물이 자라나는 모습을 두 눈으로 직접 볼 수 있다. 


야외 청소 담당의 업무는 다음과 같다. 잡초를 제때 뽑아 주며 밭을 잘 관리하고, 수확 철이 되면 수확을 돕고, 수확이 모두 완료되면 수확한 콩을 데크에 널어 놓고 두들겨 터는 일을 돕는 것이다.

밭을 관리하는 날에는 각자 장갑과 호미를 챙겨 논길을 따라 학교 밭으로 향한다. 뉘엿뉘엿 지는 해를 바라보며 밀레의 그림처럼, 이삭 대신 바닥에 떨어진 마른 이파리와 잡초들을 주워 정리하면 된다. 가끔 학년마다 '영농 후계자'라는 영예로운 별칭을 얻게 되는 아이들이 생겨나는데, 이 호칭을 얻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잡초 찾기에 남다른 재능을 보이거나, 그냥 밀짚모자가 잘 어울리면 된다. 누구의 작품인지 알 수는 없지만 영농 후계자라는 영예를 얻은 친구의 호미에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그 별칭이 대문짝만하게 적혀 있기도 하다. 

수확 철이 되면 장갑과 호미를 챙겨 밭으로 오기까지의 과정은 동일하지만, 선생님들의 시범을 보며 잘 자란 콩들의 수확을 도와야 한다는 것이 이전 작업과의 차이라고 할 수 있다. 열심히 콩 수확을 돕고 있노라면 가끔 아이들 사이에서 이런 대화가 들려오기도 한다. 

"누가 우리 학교 보고 '귀족 학교' 아니냐고 물어보던데. 이것저것 많이 한다니까 돈 많은 애들만 갈 수 있는 거 아니냐면서." 

"지금 이걸 보고도 그런 말이 나와? 귀족이 아니라 농민 학교겠지." 


수확 이후에는 학교의 운동장과 야외 데크에 일렬로 앉아 막대기로 콩을 마구 쳐서 알맹이를 떼는 '콩 털기' 작업에 동원된다. 콩을 터는 소리는 실내 청소를 하던 아이들까지 모조리 창가로 나와 콩 터는 장면을 구경하게 만들 만큼 요란하게 주의를 끌곤 한다. 콩 털기 작업까지 모두 끝나면, 이제야 야외 청소 담당이 드디어 숨 돌릴 틈이 나지 않겠냐고? 글쎄, 가을이 지나면 눈 깜짝할 새 겨울이 찾아와 야외 청소 담당이 더욱 강인해져야 하는 시기가 온다. 눈이 내리면 학교를 잔뜩 뒤덮은 눈을 쓸고, 쓸고, 또 쓸어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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