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에 선생님이나 다른 학부모님들이 앉아 계시면 그나마 괜찮지만, 2, 3학년 선배들이 앉아 있으면 시선이 마주칠 때마다 웃음이 터져 나오는 것을 참을 수가 없다. 평소에 차는 고사하고 농담이나 주고받으며 떠들던 사이인데 한순간에 예의있고 우아한 체 하며 차를 대접하려니 웃음이 흘러나오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그래도 선배들은 우리가 따라 준 차를 천천히 음미하며 맛있다는 칭찬을 건네 주곤 한다. 창문 너머로 흩날리는 눈발을 구경하며 따뜻한 찻물을 들이켜면 그 해의 겨울을 제대로 만끽하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공연 당일 아침이 되면 모두가 마지막 연습을 하고 공연을 준비하느라 눈코뜰 새 없이 바빠진다. 악기 연습에 더해 축제가 진행될 강당을 미리 청소하고, 의자를 나르고, 학부모님들의 방문을 위해 기숙사의 물품을 정리해 두는 것 또한 우리의 몫이다. 오후에 접어들면 모든 부서가 공연을 위한 메이크업을 하고 무대 의상을 갖춰 입기 시작하는데, 이때 학교를 돌아다니면 마치 예술의 전당 한복판에 와 있는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다. 이쪽에는 오케스트라 단원 복장을 한 현악부 친구가 서 있고, 저쪽에는 화려한 의상을 겉옷 안에 감추고 어디론가 바삐 걸어가는 재즈댄스부 친구가 있고, 고개를 돌려 보면 한복을 차려입은 가야금부 친구가 있고....... 아주 힘주어 꾸민 친구의 낯선 얼굴을 보면 아이들은 이때다 싶어 온 힘을 다해 놀리기도 한다.
저녁 무렵이 되면 학교로 수많은 사람과 자동차가 들어서기 시작한다. 이따금씩 누군가를 발견하고 부리나케 뛰어가는 아이들도 있는데, 그곳으로 가면 작년 내지는 재작년에 졸업한 선배들이 손을 흔들고 있기도 하다. 학교에 일찍 방문한 학부모님들과 졸업생들은 학교 안을 돌아다니며 학생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미술부가 준비한 전시회를 감상하며 공연이 시작되기를 기다린다. 저녁식사 시간에 식당을 방문하면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수의 사람들이 식당 안에 빼곡히 들어차 저마다 담소를 나누며 식사를 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공연 시작이 코앞으로 다가오면 학교 곳곳에서 보이던 친구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일제히 사라진다. 다들 어딜 갔나 궁금할 때 대기실의 문을 열어 보면 온갖 무대 의상을 갖춰 입은 아이들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몇몇 아이들은 슬며시 무대 뒤쪽으로 나가 동선을 체크하기도 한다. 아침까지만 해도 텅 비어 있던 의자들이 수많은 사람들로 가득 차면 문화축제 시작 시간이 초를 다툴 만큼 가까워졌다는 뜻이다.
장내의 모든 불이 꺼지고, 웅성거리는 소리가 사방을 가득 메우고, 일순간 사회자 테이블 쪽에 환한 조명이 켜지면 비로소 문화축제의 막이 오른다. 사회자 두 명이 서로를 바라보며 미리 준비한 진행 멘트를 읊으면, 다음 차례를 기다리며 대기하던 친구들이 입을 막고 필사적으로 웃음을 참기도 한다.
공연의 시작은 주로 사물놀이부가 장식하게 된다. 사물놀이패 의상을 갖춘 학생들이 우렁찬 목소리로 무대를 열면 모두가 무대에 시선을 고정하고 박수를 친다. 흥겨운 가락으로 사물놀이부가 첫 공연을 마치고 나면, 뒤를 이어 수많은 팀들이 차례로 무대에 오르게 된다. 순식간에 장내를 오케스트라 공연장으로 바꾸어 버리는 현악부, 한복을 입고 장구 장단에 맞추어 연주하는 가야금부 등 많은 부서가 정해진 순서대로 공연을 펼친다. 자기 순서가 끝나고 관객석 한쪽에 옹기종기 모인 아이들은 입학식 때 열성적으로 호응하던 경력을 살려 친구들이 무대에 오를 때마다 소리를 지르고 분위기를 띄우곤 한다.
이런 열띤 리액션이 가장 고조되는 순간은 바로 재즈댄스부의 차례가 다가왔을 때다. 매번 파격적인 음악과 안무를 선보이는 재즈댄스부의 공연은 모두가 가장 큰 목소리로 환호하며 박수갈채를 보내는 무대다.
1부와 2부로 나뉜 긴 공연의 마지막 순서는 전교생의 합창이다. 모든 학생이 무대에 올라 미리 연습한 합창곡을 부르면, 마침내 그 해의 문화축제가 막을 내리게 된다.
공연이 끝나면 모두가 바삐 장내를 정리하고 악기를 도로 가져다 놓는다. 무대를 감독하기 위해 학교를 찾아 주신 방과후학교 강사 선생님과 내년을 기약하며 올해의 마지막 인사를 나누기도 한다. 늦은 밤 뒷정리가 마무리되면 아이들은 삼삼오오 모여 기숙사로 돌아가, 학교에서 보내는 올해의 마지막 밤을 지새우곤 한다.
문화축제 다음날 아침이 밝아 오면, 전교생이 모두 강당에 모여 겨울방학식을 진행하게 된다. 분명 어제 저녁까지만 해도 화려한 분장과 의상 때문에 못 알아볼 만큼 번쩍번쩍하던 친구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예의 그 맹한 모습으로 돌아와 자리를 지키게 된다. 학생회에서 만든 영상을 보고, 시상식을 진행하고, 교장 선생님의 짧은 연설까지 모두 끝나면 비로소 한 해가 마무리된 것이다. 모두가 미리 챙겨 둔 짐을 바리바리 들고 눈이 내린 학교 운동장을 가로질러 집으로 돌아가면, 학교는 다시 길고 고요한 잠에 빠져들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