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학식 다음날부터는 평소처럼 교실에 앉아 학교 바깥으로 나들이를 떠나는 신입생들의 뒷모습을 부러워하며 일과를 시작하면 된다. 그러나 조만간 우리도 함께 '바깥으로 뛰쳐나가는' 이벤트가 생기니 너무 시무룩해하지는 말자.
취사체험: 저 학교는 애들이 운동장에서 밥을 짓던데?
이맘때쯤 발표되는 산악등반 조 편성은 작년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다. 이미 아이들은 서로의 체력이 어느 정도인지, 저 애가 요리를 얼마나 잘 하는지, 저 애가 얼마나 예능감이 강한지 등의 각종 능력치를 모두 파악하고 있다. 선생님들이 계신 곳에서는 함구하기 마련이지만, 심지어는 담당 선생님의 성향까지도 기가 막히게 파악하고 있다. 서로의 특성에 빠삭한 탓에 일부 아이들은 가끔 축구 대표팀의 감독마냥 조원 트레이드를 시도하기도 한다. 예를 들자면 이런 식이다.
"저희 조에는 요리를 잘 하는 애들만 몰려 있고, 이 조에는 체력 좋은 애들이 너무 몰려 있잖아요. 이 친구랑 이 친구랑 조를 바꾸는 건 어떻게 생각하세요?"
물론 협상은 언제나 실패할 수 있다. 같은 가족으로 묶인 이상 서로에게 충실하도록 하자.
조가 발표되고 예년처럼 하루나들이를 다녀오면, 취사체험이라는 또 다른 행사가 기다리고 있다. 학교 야외 곳곳에 조별로 자리를 잡고 '실제로 지리산에서 하는 것처럼' 밥을 짓는 연습을 하는 것이다. 산악등반을 위한 예행연습의 일부라고 볼 수 있겠다.
산에서 맛있는 식사를 하기 위해서는 두 대들보가 튼튼해야 한다. 바로 밥과 국이다. 그래서 조의3학년들 중 에이스 두 명이 나서서 각각 밥과 국을 도맡게 된다.
조에서 밥 물 맞추기에 재능이 있는 3학년은 ‘밥 담당’이 되어, 자신과 함께할 2학년을 모집한다. 마찬가지로 음식의 간을 기가 막히게 맞추는 3학년은 ‘국 담당’이 되어 같이 국을 끓일 2학년을 데려온다. 나머지 학생들은 자리 선점 팀, 설거지 및 뒷정리 팀 등으로 알아서 역할을 배분하게 된다.
자리 선점 팀은 다른 조보다 먼저 적당히 그늘이 있고 적당히 앉기 편하며 적당히 평지인 자리를 선점해야 하는데, 언제나 이 '적당히'라는 것이 가장 어려운 법이다. 대개 미술실 앞 데크, 야외 나무 테이블 등의 장소가 인기가 좋다. 만일 좋은 자리 선점에서 밀려나면 농구장이나 돌길, 흙 위에 자리를 깔고 앉아야만 한다.
밥을 잘 짓기로 소문난 인재들이 학년별로 한 명씩은 반드시 있기 마련이다. 그 명성이 대단한 경우 다른 조에서 구경을 오기도 한다.
우리 조에는 '인간 쿠쿠'라는 별명을 가진 3학년 선배가 있었다. 말로만 들어 왔던 그 선배의 취사 과정은 정말 대단했는데,쌀의 양을 슥 보고 1학년들이 떠 온 물을 슥 보더니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과감하게 물을 붓고는 별도로 확인조차 하지 않고 곧장 뚜껑을 닫아 불 위에 올리는 것이었다.
인간 쿠쿠가 거침없이 밥을 준비하는 동안 나머지 아이들은 다른 반찬을 담고, 그릇과 수저를 미리 준비하고, 국 담당이 시키는 대로 간을 보라면 간을 보고 물을 떠 오라면 물을 떠 오며 충실히 보조의 역할을 다한다. 모든 준비가 마무리될 즈음이면 밥이 끓고 있는 냄비에서 김이 솟아나온다. 뚜껑을 열라는 신호와도 같다.
이 순간만큼은 모두가 침묵한 채 마른침을 삼킨다. 자칫 아래로 갈수록 짙은 커피 색을 띠는 3층 밥을 만나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인간 쿠쿠 선배가 조심스레 뚜껑을 열자, 모두의 이목이 한데 집중되었다.
"야, 됐다, 됐어."
그 말을 시작으로 모두가 감탄사를 내뱉었다. 윤기가 잘잘 흐르는 고슬고슬한 흰 쌀밥이 모습을 드러냈다. 맨 아래까지 탄 부분 없이 고른 빛깔을 보이면 그날의 취사는 대성공이다.
직접 밥을 지어 보면, 만들기 쉬워 보이는 밥과 국 단 두 가지만 하는 데에도 이렇게나 많은 시간이 걸리는구나, 하며 새삼스레 평소 먹는 밥에 감사함을 느끼게 된다. 저 멀리 불어 오는 한 줄기 바람을 맞으며 조원들이 함께모여 앉아 밥을 먹으면 꼭 봄 소풍을 온 듯한 기분을 느낄 수 있다.
짧고 즐거운 식사를 마치면 설거지 팀이 수돗가로 모여 어깨를 맞대고 열심히 그릇을 씻는다. 설거지까지 모두 마무리되면 학교 운동장에 커다란 천이 깔리고 그 위로 깨끗이 세척된 캠핑용 식기가 일렬로 늘어서, 햇빛을 받으며 낮잠을 잔다.
취사체험까지 마치면 찰나의 여유를 즐기며, 조만간 다가올 산악등반을 고대하면 된다. 그런데 그 전에 중요한 행사 하나가 더 있다. 바로 한마음 체육대회다. 체육대회가 뭐 별 건가, 대한민국에 있는 모든 학교가 체육대회는 하는데. 하지만 우리의 행사가 늘 그렇듯 체육대회 역시 '범상치 않은 캠프'가 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