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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린 Oct 24. 2021

운동장에 텐트를 치고 자는 체육대회

하루나들이, 취사체험, 산악등반 등의 다른 이름들이 주는 인상에 비해 체육대회라는 이름은 처음에 그다지 신선한 느낌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체육대회, 그게 뭐 별건가? 보나 마나 적당히 줄다리기나 이어달리기 같은 거 몇 개 하고, 응원하는 목소리가 크면 점수 좀 더 받고, 반별로 티셔츠 맞춰 입고 하면 끝나겠지. 초등학교에서부터 이미 체육대회를 경험해 본 사람이 많은 탓에 새로 들어온 1학년들은 체육대회를 앞두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어도 그다지 특별할 것이란 예상을 하지 않고 무덤덤히 받아들인다. 하지만 학교의 달력에 적힌 5월 일정을 확인하는 순간, 1학년 아이들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이렇게 물어 오곤 한다.

"언니, 정말 체육대회를 이틀 동안이나 해?"

그럼 체육대회에서 무엇을 하는지를 간단히 설명해 주면 된다.

"응. 운동장에 텐트 치고 야 해."


우리의 한마음 체육대회는 이틀에 걸쳐서 진행된다. 학생들, 학부모님들, 선생님들, 그리고 인근 지역 주민들까지 한자리에 모여 즐길 수 있는 '모두를 위한 축제'를 지향하기 때문이다. 이틀이라는 긴 시간은 멀리서부터 오시는 학부모님들을 위한 작은 배려인 셈이다. 그래서 본격적인 운동 경기와 각종 게임은 이튿날에 열리고, 첫째 날은 학생들끼리 모여서 즐기는 전야제 느낌의 행사가 개최된다.



길거리 공연과 조별 모임


첫째 날을 여는 것은 길거리 공연과 각종 음식 부스다. 이날에는 야외 곳곳에 무대가 꾸려진다. '길거리 공연'은 학교의 휴일이나 행사가 있는 날에 학생들이 자체적으로 개최하는 무대로, 체육대회가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이면 어김없이 이 길거리 공연이 열리곤 한다. 정식 동아리뿐만 아니라 학생들이 임의로 결성한 팀, 소속이 없는 개인까지 누구나 자유롭게 공연에 참여할 수 있기 때문에 오디션 프로그램을 방불케 하는 수많은 참가자들을 볼 수 있다. 아이들은 음식 부스에서 각자 먹을 것을 하나씩 사들고 공연장 앞에 모여 피켓을 들고 열띤 환호를 보낸다. 공연이 끝자락에 이르고 열기가 조금씩 사그라들 무렵이면 학교의 이곳저곳에서 같은 팀을 애타게 찾는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한다.

"청팀! 지금 피켓 만들어요!"

"녹팀 남자기숙사 로비로 모이세요!"


체육대회를 맞이하면 학교의 모든 사람들이 청팀, 녹팀, 홍팀, 황팀의 4개 팀으로 나뉘게 된다. 그런데 이 '모든 사람들'이라 함은 비단 학생들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선생님들과 학부모님들, 심지어는 학교를 찾은 졸업생들에게까지 해당되는 이야기이다. 그러니 "홍팀 모이세요!" 라고 외치면 홍팀에 속하는 학생들, 선생님들이 모두 우르르 모여든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체육대회 첫날에는 다음날 있을 각종 합동 경기를 위해 미리 팀별 모임을 가진다. 주 목적은 응원가와 응원 구호를 만들고 피켓을 정하는 것이다. 어째서인지 우리 학교의 사람들은 '무언가를 정해라'라는 말만 들으면 자연스레 그 말을 '개그 코드를 겨루어라'라는 뜻으로 바꾸어 해석하기 때문에, 모두가 강렬함과 재미를 동시에 잡을 수 있는 응원가와 피켓으로 다른 팀의 기선을 제압하려고 혈안이 되어 있곤 하다. 


두 해를 연달아 녹팀에 몸담으며 나는 새로운 사실 하나를 알게 되었다. 대대로 녹팀은 이상한 마스코트 하나에 꽂혀 구호며 응원가며 피켓 할 것 없이 모조리 그 마스코트로 도배를 해 버린다는 것이었다. 그날도 어김없이 녹팀이 회의 중인 교실 안에서는 온갖 마스코트의 이름이 언급되고 있었다. 역시 용감함 하면 슈렉 아니겠냐, 끈끈한 생명력을 과시하기 위해 피콜로를 내세우자, 아니면 <몬스터 주식회사>에 나오는 초록 괴물은 어떻냐 등등. 초록색 하면 차용할 상징이 굉장히 많건만 왜 하필 언급되는 이름은 죄다 몬스터 내지는 괴물이라고 불리는 생명체뿐인지 의아해하던 차에, 교실 문 너머로 낯선 형상이 보였다. 문을 열자 홍팀에 속하는 친구가 이곳을 기웃거리고 있었다. 대화 내용을 누군가 엿들었다는 것을 알게 된 녹팀 아이들은 당연히 난리가 났다. '산업스파이다, 당장 내쫓자'라는 주장과 '이왕 이렇게 된 거 우리도 홍팀 기밀을 빼 오자'라는 상반된 주장이 터져 나오는 가운데, 홍팀 아이가 이렇게 말했다. "우리 조는 베낄 것도 없어."

그 애의 증언에 따르면,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고 자신의 조에서도 원래 기획과는 전혀 다른 생뚱맞은 결과물이 탄생했다고 했다. 그러나 그때까지 우리는 알지 못했다. 의외로 필드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은 바로 그 '생뚱맞은' 응원가라는 사실을. 



도서관은 콘서트장이 되고, 운동장은 캠핑장이 되고


어스름이 내리기 시작하면 체육대회 첫날의 하이라이트인 전야제가 시작되고 전교생이 도서관으로 모여든다. 이때 도서관은 '도서관에서의 하룻밤'이나 다른 행사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화려한 조명과 세팅을 갖춘 훌륭한 콘서트장이 된다. 

전야제에서 펼쳐지는 무대의 종류는 굉장히 다채롭다. 노래와 춤을 선보이는 아이들은 물론이거니와 연극, 콩트, 개인기처럼 평소 길거리 공연에서 볼 수 없었던 분야의 무대 역시 감상할 수 있다. 종종 진행자의 즉흥적인 제안으로 '림보 대결', '과자 많이 먹기 대결' 등의 막간 대회가 마련되기도 하는데, 말 그대로 정말 자기가 지닌 장기를 자랑해야 한다는 점에서 '장기자랑'이라는 이름에 가장 부합하는 것 같기도 하다. 이렇듯 색다른 종목에서의 대결이 성사되면 언제나 예상치 못한 분야에서 선방하는 재야 고수가 등장하는 법이다. 밤이 깊어 갈수록 학생들과 선생님들은 너나할 것 없이 모두 목이 터져라 노래를 따라 부르고 경기를 응원하기도 하며 공연장 안의 열기를 더한다.


밤이 더욱 깊어지고 도서관 천장에 크게 뚫려 있는 채광창 너머로 별이 보일 때쯤 시끌벅적한 장기자랑과 전야제는 막을 내리게 된다. 도서관에서 나와 바깥으로 향하면, 분명 아까까지만 해도 텅 비어 있던 어두운 운동장에 불을 밝힌 텐트들이 한가득 줄지어 있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언뜻 한밤의 캠핑장을 연상시키기도 하는 이 광경은 저녁나절 도착하신 학부모님들의 잠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생겨난 것이다. 별을 바라보며 캠핑을 온 듯한 기분을 느끼고 싶은 사람들은 운동장 텐트에 자리를 잡고, 보다 아늑한 실내의 잠자리를 원하는 사람들은 강당에 마련된 잠자리나 기숙사의 빈 방으로 향하면 된다. 그런데 학부모님들이 하나둘씩 도착하시고 운동장과 강당이 가득 들어차면 아이들은 이런 의문을 가지게 된다. 

"그런데 빈 방이라고? 우리 기숙사에 빈 방이 어디 있어?"


빈 방이 없으면 만들어야 한다. 학부모님들이 머물 방을 내어드리기 위해 기숙사에서는 한바탕 대이동이 벌어지곤 한다. 이날 학생들은 학년별로 짝지어져 원래 자신의 방이 아닌 다른 방으로 밀려나기 때문에 평소보다 훨씬 밀도가 높은 상태에서 친구들과 부대끼며 하룻밤을 보내야만 한다. 어차피 편히 잠들기도 글렀겠다, 아이들은 으레 밤새 떠들고 놀며 뜬눈으로 다음날을 맞을 준비를 한다. 



마당놀이


둘째 날은 '체육대회'의 이름에 걸맞는 각종 행사가 펼쳐지는, 본격적인 대회의 시작이다. 

아침에 식당으로 향하면 평소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복작복작 모여 아침식사를 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오랜만에 한 가족이 마주보고 식사를 하는 테이블도 있고, 학교를 방문한 졸업생들이 모여 수다를 떠는 테이블도 있다. 그날만큼은 식당이 모두 한자리에 모여 인사를 나누는 만남의 광장 역할을 하는 셈이다. 식사를 마치고 전교생이 운동장에 모이면 비로소 둘째 날 체육대회의 시작을 알리는 음악소리가 울려 퍼진다. 학교의 하늘을 가로질러 걸린 만국기가 휘날리고, 모든 사람들이 각자 자신이 속한 팀의 색 조끼를 입고 준비운동을 시작한다. 


 체육대회가 시작되면 '마당놀이'라는 행사를 가장 먼저 진행하게 된다. 마당놀이는 학교 곳곳마다 열리는 코너 게임으로, 운동장, 교실, 기숙사, 기타 야외 공간 등 학교의 장소란 장소마다 작은 경기장이 설치되어 각 경기장에서 서로 다른 종목의 게임과 놀이를 체험할 수 있다. 마당놀이가 시작되면 모두가 삼삼오오 모여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원하는 경기에 참여하고, 이 경기 점수가 전체 팀의 점수에 합쳐지게 된다. 말하자면 동네 오락실이란 오락실을 죄다 돌아다니며 게임 기록을 세워서 자기 팀 이름을 순위에 집어넣고 오는 느낌이랄까. 투호 던지기, 굴렁쇠 굴리기, 제기차기 등 전통의 향기가 물씬 풍기는 종목도 있고, 흙 높이 쌓기와 종이 빨리 뒤집기, 콘에 링 던져서 꽂기처럼 경쟁의 열기가 굉장히 후끈한 종목도 있다. 마당놀이에서는 스탬프 투어와 비슷하게 각 경기장을 방문할 때마다 책자에 도장을 모을 수 있고, 이 도장을 일정 수 이상 모은 사람에게는 상품이 주어진다.


마당놀이 이후에는 학생들이 단체로 참여하는 경기도 열린다. 모두가 단체줄넘기, 공 튀기기, 줄다리기, 가족 마라톤 등 자신이 맡은 경기에 출전하게 된다. 이때 비단 경기 점수뿐만 아니라 '참신한 응원'으로도 점수를 얻을 수 있기 때문에, 학생들은 이 순간을 위해 오랜 시간 머리를 맞대고 준비한 응원 피켓을 들고 목에 핏대를 세워 가며 구호를 외친다. 간혹 '저런 노래가 응원가가 된다고?' 싶을 만큼 의아한 노래, 이를테면 고요한 합창곡이나 생전 듣도 보도 못한 즉석 창작 노래가 응원가로 변해 어디선가 들려올 때도 있다. 그러나 그 어떤 노래도 홍팀의 응원가만큼 강렬한 인상을 남기지는 못했다. 그날 홍팀 덕에 모든 학생들은 '저런 노래가 응원가가 된다고?' 의 끝을 보게 되었다.


청팀, 녹팀, 황팀이 열심히 준비한 응원가와 구호를 외쳐 댈 때 홍팀은 별다른 응원가를 내세우지 않았다. 모두가 잠시 지쳐 목소리를 낮출 즈음, 그 짧은 공백을 치고 홍팀이 꺼내든 노래는 다름아닌 '교가'였다. 교가를 응원가로 쓴다고? 모두가 의아한 눈초리로 홍팀 응원석을 바라보기가 무섭게, 홍팀은 교가의 모든 빈틈에 "홍!"이라는 한 음절을 집어넣기 시작했다. 홍! 홍! 홍! 

거기에 한 술 더 떠서, 홍팀은 이제 다른 팀의 응원가에도 "홍!"을 침투시키기 시작했다. 다른 팀에서 목이 터져라 응원가를 부르고 있으면 어느새 곁으로 다가와 그 노래의 사이사이마다 "홍!"을 외치기 시작한 것이다. 덕분에 그날 그 어떤 참신한 응원가도 사람들의 기억 속에 오래 남진 못했다.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이 기억할 수 있던 것은 오직 때와 장소를 불문하고 귀를 파고드는 "홍!" 세례였던 것이다. 이런 엉뚱한 응원가는 몇 년이고 학생들 사이에 회자되며 그 응원가를 실제로 접해 보지 못한 먼 후배들의 귀에까지 들어가기 일쑤다.






모든 경기가 끝나고 점수 합산이 완료되면 비로소 우승 팀이 결정된다. 우승 팀에게는 각종 간식을 비롯한 큰 상품이 주어지지만, 우리의 학교에서 '혼자 맛있는 것을 먹는 일'이 터부시되리라는 것쯤은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을 때도 되었다. 당연히 우승하지 못한 팀에게도 아이스크림 등의 간식이 주어지곤 한다. 더불어 가장 많은 가족과 지인이 참여한 학생에게도 특별 상품이 전달되는데, 평소에는 형제자매와 서로 투닥거리던 학생이라도 특별 상품을 받게 되면 혈육을 따뜻한 눈길로 바라봐 주고는 한다. 시상식이 끝나면, 우승 팀은 축하를 하고 다른 팀들은 내년을 기약하며 다들 아이스크림 하나씩을 손에 든 채 뒷정리를 하고 시끌벅적했던 하루를 마무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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