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해를 연달아 녹팀에 몸담으며 나는 새로운 사실 하나를 알게 되었다. 대대로 녹팀은 이상한 마스코트 하나에 꽂혀 구호며 응원가며 피켓 할 것 없이 모조리 그 마스코트로 도배를 해 버린다는 것이었다. 그날도 어김없이 녹팀이 회의 중인 교실 안에서는 온갖 마스코트의 이름이 언급되고 있었다. 역시 용감함 하면 슈렉 아니겠냐, 끈끈한 생명력을 과시하기 위해 피콜로를 내세우자, 아니면 <몬스터 주식회사>에 나오는 초록 괴물은 어떻냐 등등. 초록색 하면 차용할 상징이 굉장히 많건만 왜 하필 언급되는 이름은 죄다 몬스터 내지는 괴물이라고 불리는 생명체뿐인지 의아해하던 차에, 교실 문 너머로 낯선 형상이 보였다. 문을 열자 홍팀에 속하는 친구가 이곳을 기웃거리고 있었다. 대화 내용을 누군가 엿들었다는 것을 알게 된 녹팀 아이들은 당연히 난리가 났다. '산업스파이다, 당장 내쫓자'라는 주장과 '이왕 이렇게 된 거 우리도 홍팀 기밀을 빼 오자'라는 상반된 주장이 터져 나오는 가운데, 홍팀 아이가 이렇게 말했다. "우리 조는 베낄 것도 없어."
그 애의 증언에 따르면,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고 자신의 조에서도 원래 기획과는 전혀 다른 생뚱맞은 결과물이 탄생했다고 했다. 그러나 그때까지 우리는 알지 못했다. 의외로 필드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은 바로 그 '생뚱맞은' 응원가라는 사실을.
어스름이 내리기 시작하면 체육대회 첫날의 하이라이트인 전야제가 시작되고 전교생이 도서관으로 모여든다. 이때 도서관은 '도서관에서의 하룻밤'이나 다른 행사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화려한 조명과 세팅을 갖춘 훌륭한 콘서트장이 된다.
전야제에서 펼쳐지는 무대의 종류는 굉장히 다채롭다. 노래와 춤을 선보이는 아이들은 물론이거니와 연극, 콩트, 개인기처럼 평소 길거리 공연에서 볼 수 없었던 분야의 무대 역시 감상할 수 있다. 종종 진행자의 즉흥적인 제안으로 '림보 대결', '과자 많이 먹기 대결' 등의 막간 대회가 마련되기도 하는데, 말 그대로 정말 자기가 지닌 장기를 자랑해야 한다는 점에서 '장기자랑'이라는 이름에 가장 부합하는 것 같기도 하다. 이렇듯 색다른 종목에서의 대결이 성사되면 언제나 예상치 못한 분야에서 선방하는 재야 고수가 등장하는 법이다. 밤이 깊어 갈수록 학생들과 선생님들은 너나할 것 없이 모두 목이 터져라 노래를 따라 부르고 경기를 응원하기도 하며 공연장 안의 열기를 더한다.
밤이 더욱 깊어지고 도서관 천장에 크게 뚫려 있는 채광창 너머로 별이 보일 때쯤 시끌벅적한 장기자랑과 전야제는 막을 내리게 된다. 도서관에서 나와 바깥으로 향하면, 분명 아까까지만 해도 텅 비어 있던 어두운 운동장에 불을 밝힌 텐트들이 한가득 줄지어 있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언뜻 한밤의 캠핑장을 연상시키기도 하는 이 광경은 저녁나절 도착하신 학부모님들의 잠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생겨난 것이다. 별을 바라보며 캠핑을 온 듯한 기분을 느끼고 싶은 사람들은 운동장 텐트에 자리를 잡고, 보다 아늑한 실내의 잠자리를 원하는 사람들은 강당에 마련된 잠자리나 기숙사의 빈 방으로 향하면 된다. 그런데 학부모님들이 하나둘씩 도착하시고 운동장과 강당이 가득 들어차면 아이들은 이런 의문을 가지게 된다.
"그런데 빈 방이라고? 우리 기숙사에 빈 방이 어디 있어?"
빈 방이 없으면 만들어야 한다. 학부모님들이 머물 방을 내어드리기 위해 기숙사에서는 한바탕 대이동이 벌어지곤 한다. 이날 학생들은 학년별로 짝지어져 원래 자신의 방이 아닌 다른 방으로 밀려나기 때문에 평소보다 훨씬 밀도가 높은 상태에서 친구들과 부대끼며 하룻밤을 보내야만 한다. 어차피 편히 잠들기도 글렀겠다, 아이들은 으레 밤새 떠들고 놀며 뜬눈으로 다음날을 맞을 준비를 한다.
둘째 날은 '체육대회'의 이름에 걸맞는 각종 행사가 펼쳐지는, 본격적인 대회의 시작이다.
아침에 식당으로 향하면 평소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복작복작 모여 아침식사를 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오랜만에 한 가족이 마주보고 식사를 하는 테이블도 있고, 학교를 방문한 졸업생들이 모여 수다를 떠는 테이블도 있다. 그날만큼은 식당이 모두 한자리에 모여 인사를 나누는 만남의 광장 역할을 하는 셈이다. 식사를 마치고 전교생이 운동장에 모이면 비로소 둘째 날 체육대회의 시작을 알리는 음악소리가 울려 퍼진다. 학교의 하늘을 가로질러 걸린 만국기가 휘날리고, 모든 사람들이 각자 자신이 속한 팀의 색 조끼를 입고 준비운동을 시작한다.
마당놀이 이후에는 학생들이 단체로 참여하는 경기도 열린다. 모두가 단체줄넘기, 공 튀기기, 줄다리기, 가족 마라톤 등 자신이 맡은 경기에 출전하게 된다. 이때 비단 경기 점수뿐만 아니라 '참신한 응원'으로도 점수를 얻을 수 있기 때문에, 학생들은 이 순간을 위해 오랜 시간 머리를 맞대고 준비한 응원 피켓을 들고 목에 핏대를 세워 가며 구호를 외친다. 간혹 '저런 노래가 응원가가 된다고?' 싶을 만큼 의아한 노래, 이를테면 고요한 합창곡이나 생전 듣도 보도 못한 즉석 창작 노래가 응원가로 변해 어디선가 들려올 때도 있다. 그러나 그 어떤 노래도 홍팀의 응원가만큼 강렬한 인상을 남기지는 못했다. 그날 홍팀 덕에 모든 학생들은 '저런 노래가 응원가가 된다고?' 의 끝을 보게 되었다.
청팀, 녹팀, 황팀이 열심히 준비한 응원가와 구호를 외쳐 댈 때 홍팀은 별다른 응원가를 내세우지 않았다. 모두가 잠시 지쳐 목소리를 낮출 즈음, 그 짧은 공백을 치고 홍팀이 꺼내든 노래는 다름아닌 '교가'였다. 교가를 응원가로 쓴다고? 모두가 의아한 눈초리로 홍팀 응원석을 바라보기가 무섭게, 홍팀은 교가의 모든 빈틈에 "홍!"이라는 한 음절을 집어넣기 시작했다. 홍! 홍! 홍!
거기에 한 술 더 떠서, 홍팀은 이제 다른 팀의 응원가에도 "홍!"을 침투시키기 시작했다. 다른 팀에서 목이 터져라 응원가를 부르고 있으면 어느새 곁으로 다가와 그 노래의 사이사이마다 "홍!"을 외치기 시작한 것이다. 덕분에 그날 그 어떤 참신한 응원가도 사람들의 기억 속에 오래 남진 못했다.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이 기억할 수 있던 것은 오직 때와 장소를 불문하고 귀를 파고드는 "홍!" 세례였던 것이다. 이런 엉뚱한 응원가는 몇 년이고 학생들 사이에 회자되며 그 응원가를 실제로 접해 보지 못한 먼 후배들의 귀에까지 들어가기 일쑤다.
모든 경기가 끝나고 점수 합산이 완료되면 비로소 우승 팀이 결정된다. 우승 팀에게는 각종 간식을 비롯한 큰 상품이 주어지지만, 우리의 학교에서 '혼자 맛있는 것을 먹는 일'이 터부시되리라는 것쯤은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을 때도 되었다. 당연히 우승하지 못한 팀에게도 아이스크림 등의 간식이 주어지곤 한다. 더불어 가장 많은 가족과 지인이 참여한 학생에게도 특별 상품이 전달되는데, 평소에는 형제자매와 서로 투닥거리던 학생이라도 특별 상품을 받게 되면 혈육을 따뜻한 눈길로 바라봐 주고는 한다. 시상식이 끝나면, 우승 팀은 축하를 하고 다른 팀들은 내년을 기약하며 다들 아이스크림 하나씩을 손에 든 채 뒷정리를 하고 시끌벅적했던 하루를 마무리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