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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린 Oct 24. 2021

다시 찾은 지리산

체육대회를 마쳤다면, 슬슬 기억 속에 묻어 두었던 옛 친구를 다시 만나는 마음으로 지리산에 오를 준비를 해야 한다는 뜻이다. 긴장과 걱정 속에 하루하루를 보냈던 작년과는 달리 2학년쯤 되면 제법 능동적으로 산악등반 준비의 전 과정에 참여하게 된다.



티켓팅? 피켓팅


지리산국립공원의 대피소는 마음씨 좋은 주인이 운영하는 산장처럼 모두에게 언제나 열려 있는 장소가 아니다. 지리산 대피소의 나무 바닥에 몸을 누이고 잠드는 것은 오직 피 튀기는 예약 전쟁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에게만 주어지는 승자의 특혜나 마찬가지다. 대피소에서 하룻밤을 머물기 위해서는 지정된 기간에 홈페이지에서 미리 예약을 해야 하는데, 산을 사랑하는 산악인들이 워낙 많은 탓에 조금이라도 늑장을 부리다가는 모든 자리를 남들에게 빼앗기기 십상이다. 

지리산을 한 달 정도 앞둔 시점이면 우리는 조금은 비장하고 조금은 독특한 사전 훈련을 받게 된다. 이를 '지리산 대피소 티켓팅'이라고 해도 좋겠다. 유명한 가수의 콘서트를 예매하는 것처럼, 예약 웹사이트가 활성화되는 그 순간을 기다렸다가 그 누구보다 빠르게 마우스를 놀려 자리를 쟁취하는 전쟁이다. 


"야, 그런데 대피소에 자리가 없으면 산악등반 안 가도 되는 거 아냐?"

예약 방법에 대한 설명을 듣는 자리에서, 가끔 산악등반을 체력적으로 부담스러워하는 아이들은 이렇게 소곤거리기도 한다. 그러나 실낱 같은 희망을 품기가 무섭게 선생님들은 그 마음을 기가 막히게 꿰뚫어 보시고는 이렇게 덧붙이신다. 

"여러분 얼굴에서 혹시나 하는 기대감이 엿보이는데, 대피소 예약에 실패했다고 해서 지리산을 안 가는 건 아니에요. 대신 하루에 3시간만 걸어서 도착할 수 있는 대피소를 지나치고 굳이 굳이 반나절을 더 걸어서 다른 대피소까지 가야 하는 상황이 발생합니다."

원하는 대피소의 자리를 확보하는 데 실패해도 학교는 어떻게든 남는 자리를 악착같이 모으고 모은다. 다만 그 '남는 자리'란 굳이 가지 않아도 되는 험준한 코스에 위치한, 굳이 방문하지 않고 싶은 대피소라는 것이 문제다. 그러니 보다 편안한 잠자리를 확보하고 싶다면 게임과 콘서트 티켓팅으로 갈고닦은 발군의 마우스 조작 실력을 살려 최선을 다해 참전해야 한다. 


'결전의 날' 당일이 되면 단체로 전산실에 앉아 해당 웹사이트의 서버 시간을 알려 주는 시계를 화면 한쪽에 띄워 둔다. 처음엔 여유롭게 웹서핑을 즐길 수 있지만, 예약 시간이 점점 15분 앞, 10분 앞, 5분 앞으로 서서히 다가오면 사방에서 초조함이 가득 담긴 마우스 딸깍이는 소리가 들려오곤 한다. 예약 시간을 10초쯤 남겨 두면 그때부터는 전산실이 고요한 가운데 오직 미친 듯이 마우스 커서를 누르는 소리만이 들리기 시작한다. 시계가 정각을 가리키는 순간, 예약 버튼을 마구 눌러야 한다. 


모두가 예약에 성공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지만 간혹 충분한 자리 확보에 실패하기도 하는데, 그럴 때면 일부 조의 코스가 변경되기 마련이다. 자신의 조에 속한 아이들 중 얼마나 많은 아이들이 예약에 성공했는지에 따라 희비가 갈리게 된다. 예약 결과를 알려 주는 선생님의 입에서 어떤 말이 흘러나오는지에 따라 아이들의 표정이 변한다. 

"우리 조는 예정대로 장터목에 머무른다."

성공이다. 그날은 두 발을 편히 뻗고 잠들면 된다.

"얘들아....... 우리는 세석 대피소에서 연하천 대피소로 옮겨 가게 되었어......."     

'옮겨 간다'는 단어를 듣자마자 아이들은 머리를 쥐어뜯는다. 내 손이 조금만 빨랐더라면 하루에 몇 시간을 더 걸어야 하는 일은 없었을 텐데. 

물론 어느 대피소가 객관적으로 좋고 나쁘다 하는 것은 아니다. 원래 계획된 코스가 어디였는지에 따라 달라지는 셈이다. 



지리산아, 잘 지냈니?


2학년이 되면 체력단련에서도 제법 선배 티가 난다. 학교 바깥으로 나가 긴 코스를 따라 달리기를 반복하는데, 이때 행렬의 사이사이에 1학년들을 배치하고 상태를 잘 신경써 주어야 한다. 등산배낭 버클은 어떻게 채워야 하는지, 가방 끈을 어떻게 조여야 편한지, 등산화 끈은 어떻게 매어야 하는지를 알려 주는 것도 윗 학년의 몫이다. 간혹 입학 전에 밥 먹고 드러누워만 지냈나 싶을 정도로 체력이 약한 후배들이 보이는데, 너무 답답해하지 말고 인내와 배려로 도와주자. 뒤를 돌아보면 3학년들이 '너희도 작년에 그랬어' 하는 인자한 미소로 바라보고 있을 테니 말이다.  


산악등반 당일 아침이 되면 작년에 신기하다고 생각했던 선배들의 화법을 어느새 우리가 그대로 따라하고 있다. 이맘때 세석평전 철쭉이 진짜 멋졌는데, 노고단에서 아래 내려다보면 진짜 절경이지 않니, 나는 개인적으로 장터목 취사장이 제일 편하더라....... 성인 산악회 회원들이 꺼낼 법한 이야기로 담소를 나누며 버스에 오르면, 그 뒤로 잔뜩 긴장한 1학년들이 오르고 버스가 출발한다. 

내 한 몸 건사하기 급급했던 1학년 때와 달리, 올해의 산은 다른 사람들도 챙기며 함께 올라야 한다. 산에 오르기 직전 마지막으로 몸을 풀고 주의사항을 되새기는 시간을 갖는데, 이때 같은 조 1학년 아이들의 복장과 장비를 점검해 주어야 한다. 모두가 준비를 끝마치면 비로소 작년보다 조금 더 무거운 배낭과, 작년보다 조금 더 무거워진 책임감을 이고 산에 발을 들인다. 


고작 한 번 다녀왔다고 산에 오르는 것이 전혀 힘들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산 속에서만 맡을 수 있는 특유의 향이 코끝에 닿으면 이유 모를 반가움과 익숙함이 마음 저편에서 고개를 빼끔 내밀곤 한다. 

2학년은 3학년의 지시를 따르고 1학년을 잘 챙길 수 있도록 일부러 행렬의 사이사이마다 배치되곤 한다. 등반 중 선두에 선 3학년이 큰 소리로 신호를 외치기도 하는데, 그럴 때면 2학년들이 신호가 맨 뒤까지 전달될 수 있도록 큰 소리로 복창해야 한다. 더불어 앞과 뒤로 따르는 후배들의 상태를 잘 확인했다가 아이들이 지칠 대로 지쳐 힘들어하면 적당히 때를 보아 쉬었다 가자고 제안해야 한다. 같은 학년 아이들이 묵묵히 산을 오르고 다른 아이들을 챙기는 모습을 보면 괜스레 기분이 이상해진다. 친구들은 어느새 키도 마음도 훌쩍 자라 있구나. 우리가 과연 일 년을 살긴 했구나. 


저만치 산등성이에 나무로 지어진 거대한 집의 외관이 보이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대피소가 시야에 들기 시작하면 선생님과 조장이 '얼마 안 남았다, 힘내자!'라고 외치며 모두를 독려하고, 절로 행렬의 걸음이 빨라진다. 작년에 다녀왔던 대피소에 다시금 방문하게 되는 경우도 있는데 그럴 때면 으레 취사장, 수돗가, 심지어는 화장실의 위치까지 눈에 훤하다. 무거운 배낭을 대피소 안에 내려놓고 서둘러 취사장에 모이면 하루의 마지막 일과인 '저녁식사 준비'가 시작된다. 밥 담당이 가장 먼저 내리는 지시는 대개 이런 것이다. 

"얘들아, 가서 돌 주워 와."

지상에서 진행했던 취사체험 때와는 달리, 높은 산에서 밥을 지을 때는 무조건 무거운 돌을 냄비 위에 올려야 하는 까닭이다. 밥 담당의 지시에 따라 몇몇 아이들은 커다란 돌을 찾아 대피소 이곳저곳을 헤매고, 다른 아이들은 수돗가로 달려가 시리도록 차가운 물에 열심히 그릇을 헹궈 온다. 인고의 기다림 끝에 먹는 밥은 그야말로 눈물겨운 맛이다.


자리를 잡고 복작복작 밥을 지어 먹다 보면 해가 순식간에 지고, 하늘에는 쏟아질 것 같이 많은 별들이 걸린다. 각자 담요를 챙긴 채 대피소의 나무 바닥에 일렬로 누워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면 어느새 하루가 지나가 있곤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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