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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린 Oct 24. 2021

스포츠클럽, 국학 시험

'OO아, 밥 먹으러 가자!'와 같은 수준의 지방방송만 아니라면, 교무실에 있는 방송 장비는 기본적으로 용건이 있는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 학교 전체에 방송해야 할 사항이 있는 사람은 언제든 교무실 문을 열고 들어가 마이크를 잡고 볼륨 믹서를 높이면 된다. 매주 수요일이면 이렇게 마이크를 잡는 학생들의 수가 갑자기 많아지곤 하는데, 그날 하루는 학교를 돌아다니다가 익숙한 친구들의 목소리로 이런 방송이 흘러나오는 것을 심심찮게 들을 수 있다.


"알립니다. 오늘 비가 오니까 요가부는 여자기숙사 로비로 모이시기 바랍니다."

"알립니다. 승마부는 3시 15분까지 농구장 앞으로 나오세요. 말 타러 갑시다."

"오늘 나비골프는 공예관 앞뜰에서 모입니다. 다시 한 번 알립니다. 오늘 나비골프는 공예관 앞뜰에서 모입니다."



스포츠클럽


수요일 오후가 되면 아이들이 뛰어다니는 소리, 공 차는 소리, 잔잔한 음악 소리 등이 온 학교를 가득 채운다. 매주 진행되는 스포츠클럽 활동 시간 때문이다. 아이들은 저마다 하나의 스포츠클럽을 선택하여 가입하고, 정해진 시간마다 해당 부서의 모임 장소로 향해 활동을 하게 된다.


토요인문학을 정하기 위해 강당의 저만치 끝에서부터 반대편 끝까지 죽어라 달렸던 날을 기억하는가? 보통은 스포츠클럽도 같은 날 정하게 된다. 부서 선택에 앞서 이번 학기에 개설되는 스포츠클럽 부서에는 무엇이 있는지에 관해 설명을 들어야 하는다, 우리 학교에서 경험하는 대부분의 일이 그렇듯 처음 몇 분간은 무난하다. 축구, 농구, 배드민턴처럼 대중적인 스포츠는 굳이 자세한 이야기를 듣지 않아도 무엇을 하는 부서인지 너무나 잘 알 수 있다. 그 뒤로는 요가, 방송댄스처럼 상대적으로 평소에 접하기 어려운 종목도 여럿 들려온다. 그런데 그 뒤로 나열되는 부서의 이름을 하나씩 듣고 있노라면 조금씩 '내가 방금 제대로 들은 게 맞나?'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다. 파워워킹이요? 나비골프요? 세상에 그런 스포츠도 있나요?


스포츠클럽 시간에는 아주 보편적인 스포츠부터 아주 독특한 스포츠에 이르기까지 실로 다양한 종목을 만나볼 수 있다. 다른 스포츠 부서에서 뭘 하는지 궁금하다면 스포츠 부서 설명문을 뒤적이고 선생님들께 질문을 던지기보다 해당 부서에 가입되어 있는 친구들에게 넌지시 물어보는 편이 훨씬 빠르다. 스포츠 부서 설명문보다 더욱 강렬하고 인상적이며 핵심만 딱 짚어낸 생생한 증언을 들어 볼 수 있다.


"요가부에서는 뭐 해?"

요가부는 다른 부서들이 바깥에서 흙먼지를 일으키며 이리 뛰고 저리 뛰는 와중에 홀로 여자기숙사의 고요한 로비에 칩거하는 부서인 탓에 늘 신비감에 휩싸여 있으며, 비밀스러운 무언가를 할 것이라는 추측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그렇지만 막상 친구들이 전해 주는 요가부의 실체는 유달리 특별하다기보다는 그저 지극히 평온하고 평화롭기만 하다. 

"우리? 로비에서 요가 매트 깔고 음악 들으면서 요가 동작 따라해." 

"겸사겸사 스트레칭을 같이 하기도 하고."

물론 아이들이 제기하는 '비밀스러운 무언가를 할 것'이라는 추측이 마냥 근거가 없기만 한 것은 아니다. 

"근데 이건 비밀인데, 가끔 단체로 낮잠 자기도 해. 누워서 멍 때리기도 하고. 어디 가서 말하지 마라."


"파워워킹부는 뭐 해?"

다른 부서에 관해 묻는 아이들의 질문이 약간의 사교적인 목적에서 비롯되었다면, 파워워킹부에 대해 묻는 질문은 태반이 말 그대로 '그곳은 정말 대체 뭘 하는 부서냐'라는 강렬한 궁금증을 내포하고 있다. 그 이름부터가 범상치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파워워킹부에 속한 아이들은 대개 이렇게 답하곤 한다. 

"그냥 걸어......."

그러나 실제로 파워워킹부가 활동하는 것을 먼발치에서 바라보면 그들이 꽤나 체계적으로 '그냥 걷는 것' 이상의 운동을 한다는 사실을 금세 알아차릴 수 있다. 파워워킹부의 기본 커리큘럼은 학교 근처의 길을 코스로 정해 일정 시간 동안 도보로 이동하는 것인데, 호흡법, 시선, 자세 등 여러 요소를 충분히 익히고 올바르게 걸어야 한다. 아이들은 선생님께 자세를 거듭 지적받으며 학교 밖 코스를 따라 최선을 다해 걷는다. 물론 선생님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선 풍경을 만끽하며 여유롭게 산책하는 자체 커리큘럼으로 전환하기도 한다.


"나비골프가 뭐야?"

파워워킹부와 마찬가지로 나비골프부 역시 그 이름부터 비범해서, '저 부서는 대체 뭐 하는 곳이야?' 라며 학생들의 입에 가장 자주 오르내리는 부서다. 이 부서에서는 골프공을 가볍게 하고 코스 및 규칙을 일부 변형하여 누구나 쉽게 즐길 수 있도록 한 '나비골프'를 진행한다. 따라서 매주 수요일이면 학교의 길목이란 길목은 죄다 골프 필드가 되어 있곤 하다. 장비와 세팅이 가장 전문적인 부서 중 하나기 때문에, 가끔 지나가다 꼭 선수마냥 장비를 갖추고 있는 나비골프부 아이들과 눈을 마주치면 아이들이 꽤나 머쓱해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해당 스포츠의 기본기에 대해 배우는 초반부 수업 몇 회가 지나면 대체로 선생님들은 최소한의 관리감독만을 담당하며 자율권이 자연히 학생들에게로 넘어가게 된다. 비가 오면 많은 부서는 e-스포츠로 전향하거나 영화 관람 부서로 탈바꿈하는데, 가끔 비가 오지 않더라도 남들의 눈을 피해 몰래 영화 감상 부서로 전환하는 경우도 있다. 

여름이 가까워 오고 기말고사를 앞두게 되면 아이들은 자발적으로 스포츠클럽 시간을 자습 시간으로 활용하기도 한다. 이러나저러나 시험은 시험인 셈이다.  



방학을 맞이하기 위한 과제, 국학 시험   


여름이 무르익어 가면 아이들은 여름방학을 맞이하기 위해 꼭 거쳐야 하는 관문인 기말고사를 본격적으로 준비한다. 그런데 사실 아이들이 방학을 맞이하기 위해 치러야 하는 절차로 하나가 더 있다. 

국학 시험이 바로 그것이다.

 

국학은 우리 학교에의 고유 커리큘럼 중 하나로, 외부 전문 강사를 초빙하여 매주 동양 고전을 강독하는 시간이다. 이름만 보면 너무나 고루하고 고리타분할 것 같지만 사실 평소에는 '훈장님과의 만남'이라는 느낌보다는 '강사님과 함께하는 토크쇼'에 더 가까운 느낌이다. 하지만 시험기간만 되면 국학의 악명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기 시작하는데, 바로 ‘과거’ 때문이다. 우리 모두가 생각하는, 조선시대에 뿌리를 두고 있는 그 과거 시험이 맞다. 조선시대에 비해 조금 나은 점이 있다면 직접 답안을 창작하지 않아도 되고 단지 고전 내용 중 일부만 줄줄 읊을 줄 알면 합격할 수 있다는 것인데, 물론 이런 말은 아이들에게 그리 큰 위안이 되지는 않는다.

이맘때면 기숙사 방 곳곳에서 동양 사상가들의 현신을 목격할 수 있다. 학이시습지면 불역열호아, 유붕이 자원방래면 불역락호아. 얼핏 고대의 주문 같기도 한 말들을 초점 나간 눈으로 중얼중얼 외는 아이들이 사방에서 목격된다. 기숙사 깊숙한 곳에서부터 ‘맹자 님 대체 왜 그러셨어요!’ 하는 울부짖음이 들려오기도 한다. 


과거 시험 당일이 되면 국학 선생님이 앞쪽에 앉아 계시고, 아이들은 저마다 교재를 달달 외우다가 준비가 되었다 싶으면 당당히 앞으로 나가서 제비를 뽑는다. 제비 안쪽에는 특정 구절의 이름이 적혀 있고 해당하는 구절을 선생님 앞에서 읊으면 된다. 제대로 읊으면 통과이고, 틀려도 한참 틀리면 '불통'이다. 가끔 자신이 눈 감고 넘어갈 수 있을 만큼 애매한 정도로 틀렸다고 생각하는 아이들은 국학 선생님과 협상을 시도하기도 한다. 매년 그 레퍼토리는 몰라볼 정도로 발전하는데, 국학 선생님과의 대치 아닌 대치를 보고 있자면 꼭 콩트 한 편을 감상하는 기분이다.

"단어 한두 개만 틀렸으니까 맹자 님이 보셔도 이 정도는 괜찮다고 하시지 않았을까요?" 

"불통."

"초성은 똑같았는데, 가산점 같은 거 없나요?" 

"불통."

"제가 어젯 밤에 송나라 유학자로 태어나는 꿈을 꿨어요. 호접지몽이라고 아시죠? 혹시 제가 유학자일지도 모르니까 어떻게 통과 안 될까요?"

"불통."

가끔 일부러 웅얼웅얼 말한 다음 눈치를 보고 답을 바꾸는 아이들도 있다. 이 전략의 관건은 바로 태연자약한 뻔뻔함인데, 자기가 생각하기에도 어이가 없는지 웃음이 터져서 일을 그르치기도 한다. 그럼 선생님도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불통!" 세례를 날린다.

많은 아이들이 피나는 노력 끝에 무사히 통과하곤 하지만 간혹 정말 머리가 안 따라 준다며 시험을 포기하는 아이들이 있다. 이럴 때는 해당 구절을 몇십 번씩 반복해 써서 종이를 제출하면 무마할 수 있다. 머리 대신 몸을 써서 보완하는 셈이다.


국학 시험을 성공적으로 치르고 나면 비로소 완전한 의미의 자유가 된다. 학교는 다시금 여름 휴양지처럼 변하고, 방학식 당일이 되기까지 친구들과 이 여름을 그저 즐기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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