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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린 Oct 24. 2021

인문체험학습과 김장

'나를 찾아가는 여행'은 뭐죠? 저희가 먹을 김치는 저희가 담근다고요?

낙엽을 줍고, 잡초를 뽑고, 콩을 털다 보면 어느새 가을이 한껏 무르익어 슬슬 인문체험학습을 준비할 시기가 다가온다. 1학기의 '바깥으로 뛰어나가는' 행사 중 가장 규모가 큰 것이 산악등반이었다면, 2학기에는 인문체험학습이 그 자리를 꿰차게 된다. 전교생이 함께했던 산악등반과 달리 인문체험학습은 학년별로 여행의 테마와 코스가 달라진다. 선배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2학년과 3학년은 각각 도보여행과 농촌봉사활동을 떠난다고 하는데, 그럼 우리는 어떤 여행을 떠나게 될까?



나를 찾아가는 여행이라고요?


1학년들의 인문체험학습은 다름아닌 '나를 찾아가는 여행'이다. 수식어나 별칭이 아니라 정말 여행 이름이 그렇다. 그래서 1학년 아이들은 처음 인문체험학습의 이름을 확인하고는 입이 쩍 벌어지며 대체 뭐 하는 여행이기에 이름이 그렇게 거창한가, 싶은 생각을 하곤 한다. 선배들에게 대체 1학년 인문체험학습에서는 뭘 하는 거냐고 질문을 던지면 이런 답이 돌아온다.

"아, 거기? 밥 맛있어. 우리 학교 밥도 맛있는데 거긴 진짜 말도 안 돼."

"가면 무슨 연극 같은 거 시킬 거야. 재미있어."

"거기 큰 나무 같은 거 있지 않아? 뭐 하나 잘못하면 선생님들이 거기 빙글빙글 돌게 시켰는데."

"별 구경하면 돼. 거기 별 많아."

증언을 종합하면 종합해 볼수록 오히려 어떤 여행인지 더욱 갈피를 잡지 못하게 된다. 대체 '나를 찾아가는 여행'이란 뭘 하는 여행일까?


인문체험학습 당일이 되면 1학년 학생들은 학교와 결연이 되어 있는 수련 시설로 향하게 된다. 이곳은 많은 학교들이 수련회 장소로 즐겨 찾는 청소년 수련원과 유사한 느낌인 듯 조금 다르다. 버스를 타고 몇 시간을 달려 산길을 오르다 보면, 산 중턱에 예상치 못한 평지가 나오면서 그 위로 얼핏 작은 리조트를 연상시키는 건물이 보인다. 사방이 단풍 물든 나무로 가득해 멋진 풍광을 자랑하는 이 시설은 넓은 앞마당과 족구장 등의 운동시설을 함께 갖추고 있다. 1학년 학생들은 이곳에서 3박 4일 동안 머무르며 다양한 인문학 프로그램을 체험하게 된다.


플레이백 시어터

수련 시설에 도착해서 점심식사를 마치고 모두가 강당으로 모이면 '플레이백 시어터' 시간이 시작된다. 플레이백 시어터는 3박 4일 일정의 가장 앞 순서로, 학생들이 스스로의 감정을 살필 수 있는 시간을 마련해 주는 동시에 새로운 장소에 대한 어색함과 긴장을 풀어 주는 프로그램이기도 하다. 맨 처음에는 모두가 손을 잡고 큰 원을 그리도록 선 뒤, 가벼운 무용 동작을 따라하며 분위기를 끌어올리다 점차 강사님의 지시에 따라 보다 어려운 동작을 시도하게 된다. 몸을 움직이며 긴장을 해소하고, 협응이 요구되는 동작을 통해 옆 친구들과 보다 가까워짐을 느끼는 것을 목표로 하는 셈이다. 물론 하하호호 화목함을 추구하는 목표와 실제 우리네 모습이 언제나 일맥상통하는 것은 아니다. 

"팔 좀 그만 잡아당겨......."

"친구야, 네가 내 발을 밟고 있는 것 같은데 확인 좀 해 주겠니?"


무용을 통해 몸을 풀고 나면 '시어터'라는 이름에 걸맞게 서로의 이야기를 연극으로 풀어내는 활동으로 넘어간다. 이때는 아이들들 중 누군가가 자신이 최근에 겪었던 재미있는 일화나 속상했던 이야기를 말하고, 다른 학생들이 즉흥적으로 연기를 통해 그 사연을 다시 풀어내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사연의 주인공은 자신의 사연을 제 3자의 입장에서 객관적으로 바라보며 자신의 감정이 무엇이었는지를 돌이켜보고 마음을 안정시키는 시도를 하게 되고, 연기를 하는 아이들은 어떻게 해야 사연 속 감정을 모두가 생생히 느낄 수 있을지를 고민하며 소통의 방법을 배우게 되는 것이다. 가능한 많은 학생이 무대에 오를 수 있도록 연극 시간이 여러 세션(session)으로 분할되어 있기 때문에 이전에 사연을 말했던 친구가 다음 세션에서 연기를 맡게 되기도 하고, 반대로 이전에 무대에 올랐던 친구가 다음 세션에서는 사연의 주인공으로 나설 수도 있다. 무대가 펼쳐질 때는 여러 색깔의 천과 악기, 소도구들이 함께 제공되는데 아이들은 이를 즉석에서 활용하여 연극을 보다 실감나게 만들기도 한다. 혼신의 연기를 펼쳐 모두를 박장대소하게 만든 아이는, 이후에 이어질 일기 작성 프로그램 시간에 많은 친구들의 일기에 이름이 오르내리며 발표 때 언급되는 영광을 누릴 수 있다.


자아를 성찰하는 글쓰기

낮이고 밤이고 '인문학'을 부르짖는 학교답게, 인문체험학습 프로그램에도 글을 읽고 쓰는 활동이 반드시 포함되어 있으리란 것을 아이들은 어렵지 않게 짐작해내곤 한다. 실제로 인문체험학습 프로그램의 핵심 일정 중 하나는 바로 '자아를 성찰하는 글쓰기' 시간이다.

'자아를 성찰하는 글쓰기'란 최근 나 자신에게 급격한 감정의 변화를 불러왔던 순간을 일기 형식의 글로 적고, 그 순간이 있기 이전의 마음과 이후의 마음을 비교하며 감정 조절법을 객관적으로 생각해 보는 시간이다. 각자 편안한 마음으로 글을 쓰고, 원하는 학생들이 돌아가며 자신의 글을 발표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이 글쓰기는 3박 4일 내내 규칙적으로 열리는 프로그램이기 때문에, 간혹 그 짧은 시간에 투닥거리며 다툼을 벌였던 친구들이 싸웠던 일과 미안하다는 말로 일기를 꽉 채워 발표하고 서로 어색하게 화해의 눈빛을 보내는 경우도 종종 있다. 선생님께 한소리를 들은 친구들은 혼난 일에 관한 감정 변화를 일기로 쓰고 발표해서 선생님이 머쓱한 웃음을 터뜨리게 만들기도 한다. 


등산

"우리 학교는 진짜 산 좋아하는 것 같아."

이튿날의 일정을 확인한 아이들은 혀를 내두르며 이렇게 말하곤 한다. 과연 우리의 학교는 글과 더불어 산을 오르는 일도 정말 좋아하는 모양이다. 둘째 날 아침에는 수련원이 위치하고 있는 산의 등반 코스를 따라 등산을 하는 일정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지리산만큼은 아니지만 제법 체력적으로 뒷받침이 되어야 하는 등반 코스이기 때문에, 모든 아이들은 아침식사를 든든히 한 후 도시락과 몇몇 장비를 챙겨 숙소를 나서게 된다. 

학교에서 열 달 정도를 살고 나면, 이제 아이들은 산악등반 체력단련 기간에 지겹도록 연습했던 대형으로 일사불란하게 모이는 데에는 도가 트게 된다. 대형을 갖추어 준비운동을 마무리하고 나면 비로소 모두가 가벼운 마음으로 산을 오르기 시작한다.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부지런히 산길을 오르다 보면, 배에서 대찬 신호를 보내는 점심 무렵 딱 맞춰 정상에 도착하게 된다. 잠시 땀을 식히면서 정상에 앉아 주변을 둘러보면 단풍이 절정인 멋진 산의 풍광을 만끽할 수 있다. 이후 내려오는 길목에 위치한 넓은 풀밭에 앉아 도시락을 먹고 나면 등산을 성공적으로 마친 것이다. 친구들과 단체로 다녀오는 단풍 구경이라고 해도 좋겠다.


마음껏 뛰어놀아라!

'놀고 싶은 대로 노는 시간' 역시 나름 중요한 일정 축에 속한다. 그 어떤 전자기기나 오락 시설도 없는 이곳에서 자유롭게 하고 싶은 것을 하도록 내버려두면 아이들은 학교에서 놀던 감각을 되살려 저마다 바닥에 선을 그어 피구를 하기도 하고, 족구장에서 족구 경기를 하기도 하고, 동심으로 돌아가 술래잡기를 하기도 한다. 오로지 넓은 바닥 하나와 여러 친구들만 있으면 얼마나 무궁무진한 놀이를 할 수 있는지 알 수 있는 시간이다. 가끔은 아이들끼리 놀다가 작은 다툼이 벌어지기도 하는데, 주로 어색한 시간이 조금 지속되다가 자아 성찰 일기를 쓰는 시간에 누구 하나가 그날의 일을 쓰면 비로소 화해의 장이 마련되곤 한다. 



이곳 수련원의 가장 큰 장점은 밥이 아주 맛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마지막 날 아침이 되면, 아이들 모두가 더 이상 이 맛있는 밥을 맛볼 수 없음에 아쉬워하며 마지막 만찬을 즐기고는 한다. 보통 체험학습은 귀가를 하는 주말을 바로 앞두고 끝나게끔 일정이 마련되어 있기 때문에, 3박 4일 간의 일정을 마치면 저마다 집으로 돌아가 안락한 휴식을 즐길 수 있다.






우리는 우리가 먹은 밥그릇을 우리가 씻는다. 우리가 사용한 장소는 우리 손으로 청소한다. 거기다 우리 학교의 밭에서 나는 잡초도 우리가 뽑고, 우리가 먹을 콩은 우리가 직접 턴다. 그럼 겨울이 살며시 다가올 무렵 런 생각이 스멀스멀 차오르는 것도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지금 내가 먹고 있는 이 김치도 직접 담근 거 아냐설마 우리더러 김치도 담그라고 하는 건 아니겠지?


학교에서 나누어 준 탁상 달력을 넘겨 11월 일정을 확인하면, 아이들은 반쯤 농담처럼 지나갔던 그 '설마'가 사실은 농담이 아니었음을 알게 된다. 11월의 한복판에 두 글자가 자랑스럽게 적혀 있기 때문이다.

<김장>.



김장: 우리가 먹을 김치는 우리 손으로


말했듯, 우리의 학교는 스스로 삶을 꾸려 나가는 힘을 기르자는 취지에 맞게 일부 식자재를 직접 생산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그리고 직접 만들기에 단연 김치만큼 좋은 식자재가 없그리하여 매년 11월이면 온 학교가 다음 일 년 동안 먹을 김치를 담그기 위한 김장 준비에 돌입하게 다.

보통 11월의 한 주를 김장 주간으로 정한다. 김장 주간에는 많은 학부모님들이 독립한 자식의 집에 반찬을 놓고 가는 마음으로 학교를 방문하여 손을 빌려 주시기 때문에, 학교에 많은 차와 사람들이 드나들며 평소보다 더 북적이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


"1학년 2반 나오래!"

보통 아이들은 학년별로 순서를 정해 김장에 동원되는데, 이때는 수업을 빠질 수 있는 합리적인 핑계가 생기는 셈이다. 교실에 앉아 수업을 듣다가 김장을 하러 가라는 안내를 듣게 되면 아이들은 아, 춥겠다, 귀찮다 하면서도 내심 속으로 쾌재를 부르면서 바깥으로 나간다. 학교 건물과 식당 사이를 잇는 큰 야외 길목으로 들어서면 못 보던 천막들이 줄지어 서 있고, 천막 아래에는 조리대가 일렬로 길게 놓여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 낯선 천막들과 조리대가 김장 작업을 위한 거점 역할을 하게 된다.


첫날의 일은 힘을 합쳐 배추와 무를 비롯한 각종 식재료를 나르고, 차가운 물을 이용해 채소들을 씻고 다듬는 것다. 각자 자신의 고무장갑과 비닐 캡을 챙겨 조리대에 자리를 잡고 작업을 시작하면 다. 11월의 추운 날씨에 야외에 오래 머물며 차가운 물에 내내 손을 담그고 있는 것은 꽤나 고된 일이다 보니, 반복적인 작업을 하다 보면 사방에서 이런 말들이 심심찮게 들려오곤 한다.

"야, 나 손이 빨갛게 얼었어."

"선생님. 저희 손에 감각이 없어."

"저희가 김치를 조금 덜 먹도록 노력해 볼 테니까 어떻게 안 될까요?"

그러나 옆에서 함께 무를 손질하는 선생님도 손에 감각이 없는 건 마찬가지다. 김장 작업을 돕는 학부모님들이 커피와 차를 드실 수 있도록 마련된 온수기는 이때 제기능을 톡톡히 발휘한다. 아이들이 더는 안 되겠다 싶을 때 온수기 앞으로 달려가 따뜻한 물에 손을 녹이곤 하는 것이다.

평소 힘 좀 쓴다는 소리를 듣는 친구들은 배추와 무를 나를 때 가장 선두에 서서 작업량에 크게 일조하곤 한다. 찰랑거리는 물 소리, 바쁘게 오가는 발걸음 소리와 열심히 수다를 떠는 친구들의 목소리가 김장 첫 날의 길목을 가득 채운다.


이튿날에는 누가 시키지 않았는데도 자연스럽게 배추를 썰어서 소금에 절이는 배추 담당 팀과, 김치 속에 들어갈 재료를 손질하는 김치 속 팀으로 작업이 분배되는 경향이 있다. 다만 이건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순전히 자기가 자리를 잡은 조리대에 배추가 오느냐 속 재료가 오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작업이기 때문에, 간혹 자신의 적성과 전혀 맞지 않는 팀에 배치될 수도 있다. '난 여기는 못해먹겠다!' 싶은 아이들이 합의 하에 자리를 바꾸고 새로운 적성을 찾는 이직 시장이 활발해지기도 다.

배추를 절이는 팀은 각자 고무장갑을 끼고 머리에 위생캡을 쓴 뒤, 열심히 배추를 자르고 커다란 대야 안에 넣어 배추를 소금에 절여야 다. 간혹 요리에 타고난 감각이 없는 친구들이 아무런 생각 없이 소금을 마구 뿌려 대면, 옆에서 다년간의 김장 경험을 지닌 학부모님들이나 식당 조리사님들이 "아이고~!" 라는 말로 시작하며 노하우를 일러 주시기도 다.

김치 속 재료를 준비하는 팀도 마찬가지로 고무장갑과 위생캡으로 완전무장한 뒤 열심히 재료를 썰고 다듬다. 쌀쌀한 날씨에 오래 바깥에 있다 보면 코에 감각이 없다고 외치는 소리가 어김없이 사방에서 들려다. 이때 농땡이를 피웠다가는 바람을 오래 맞아 성정이 사나워진 주위 친구들에게 뭇매를 맞을 수 있으니 주의하자. 평소 같았으면 한두 마디로 나무람을 들었을 일로 서너 시간 동안 줄곧 욕을 얻어먹게 될지도 모르니, 잔꾀를 부리지 말고 최대한 빠르고 정확하게 작업을 마무리해야 한다. 그날의 작업을 마무리하고 다함께 뜨끈한 기숙사 바닥에 드러누우면 밀려오는 노곤함에 저절로 잠이 쏟아진다. 


셋째 날은 3학년들, 선생님들, 학부모님들 등 숙련된 경험자들이 대거 투입된다. 이날은 정말 말 그대로 '김장'을 해야 하는 날다. 미리 준비된 재료들을 갖은 양념과 함께 섞어 속을 만들고, 절여진 배추에 꼼꼼하게 속을 채 버무려 주면 다. 양념이 곧 김치 맛을 결정하는 생명인 만큼 당연히 양념 간이 적절한지 맛을 보는 것이 중요한데, 으레 그렇듯 간을 본다는 핑계로 자꾸만 뭔가를 홀라당 집어먹는 아이들도 왕왕 생겨나곤 한다. 그래서 셋째 날에는 코가 빨개졌네, 손에 감각이 없네, 하는 말보다 더 자주 들려오는 말이 있다.

"그만 집어먹어! 우리는 일 년 동안 뭐 먹으라고!"


김치를 담그는 기나긴 작업이 완료되면, 모두가 기다려 오던 김장의 하이라이트인 점심식사가 시작다. 김장 마지막 날 점심 메뉴는 무조건 수육이다. 점심시간이 되기 한참 전부터 식당에서 솔솔 풍겨나오는 냄새는 전교생을 홀리기에 부족함이 없다. 수육에 갓 만든 김장김치를 곁들여 친구들과 함께 '이거 내가 절인 배추야', '이 양념 내가 버무린 거야' 하고 너스레를 떨며 먹으면 비로소 김장을 마무리지었다고 할 수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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