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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린 Oct 24. 2021

헌다레, 문화축제

기말고사를 맞이하는 아이들의 속마음은 언제나 한결같다. 시험만 끝나 봐라, 내가 정말 세상에서 제일 나태한 사람처럼 누워서만 지낼 거다. 아주 기숙사 온돌 바닥과 한 몸이 돼야지.

그러나 '기숙사 바닥과 한 몸이 되겠다'라는 다짐은, 시험을 끝내고 이제 좀 쉬어 볼라 치면 어김없이 학교 곳곳에서 우리를 찾는 목소리가 들려오는 탓에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기 일쑤다.  

"바이올린 하는 애들 과학실로 오래."

"방과후학교 해금 듣는 친구들 지금 모이라는데?"

"너 가야금이지? 너네 부서 지금 다 모여 있어. 얼른 가."


방학을 기다리며 한가로운 일상을 즐기던 여름과는 달리, 겨울방학을 앞두고 있는 학교는 바깥의 찬바람이 무색하게 분주한 열기로 가득 차고는 한다. 연말의 가장 큰 행사인 문화축제를 준비해야 하기 때문이다.



오디션에 임하는 마음으로


이 시기에는 정규 시간표가 무의미해지고, 대신 '연습'이 그 빈자리를 채우게 된다. 학생들끼리 주로 만끽하던 길거리 공연과 달리 문화축제는 학생들, 선생님들, 학부모님들, 인근 지역 주민들까지 모두 한자리에 모여 즐기는 큰 공식 행사이기 때문에 만반의 준비를 기해야 하는 까닭이다. 눈이 소복히 쌓인 겨울의 학교를 거닐다 보면 이곳저곳에서 수많은 악기가 만들어내는 서로 다른 선율을 감상할 수 있다.


공연을 앞두고 학교에서는 대규모 '오디션'이 열린다. 사전 심사라는 이름의 이 오디션은 모든 방과후학교 악기 팀이 피해 갈 수 없는 평가 절차로, 이 심사를 통과한 팀에게만 연말 무대에 오를 자격이 주어진다. 그런데 통상적인 사전 심사가 여러 팀의 당락을 결정하고 지원자를 걸러내는 기능을 수행하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우리의 사전 심사는 '모든 팀이 연말 무대에 오를 수 있게끔 하는' 역할을 도맡는다. 심사를 통과해야지만 무대에 오를 수 있다고 했으면서 모든 팀이 연말 무대에 오를 수 있게 한다고? 잘 이해가 되지 않지만 심사 과정을 보면 무슨 뜻인지 대번에 알아차릴 수 있다.  

사전 심사 때는 음악 선생님을 필두로 여러 선생님이 모여 각 팀의 연주를 듣는다. 연주가 끝나면 그 모든 과정을 지켜보던 선생님들의 입에서 '선고'가 흘러나온다.  

"통과."

통과를 받으면 우선 안심해도 좋다. 지금까지 해 왔던 대로 쭉 연습을 이어 나가면 된다. 그러나 모두가 통과를 받지는 못하는 법이다.

"박자 맞추고, 음정 틀리는 거 고쳐 오세요."

"화음이 제대로 들어가는 거 맞나요?"

"다시."

그럼 그 팀은 그날부터 자투리 시간을 쏟아 가며 연습에 매진해야 한다. 즉 사전 심사는 '누가 누가 떨어지나'를 고르는 자리가 아니라, '어떤 팀을 더 굴려야 하나'를 선고하는 자리인 셈이다. 연습이 부족하다는 평을 받은 팀은 말 그대로 '좀 더 굴러야 한다'. 때문에 정규 방과후학교 수업일이 아님에도 학교를 방문하셔서 연습을 감독해 주시는 강사님들까지 존재할 정도다.

 


헌다레: 듣기 좋은 찻물 소리


'다도' 는 우리 학교에 존재하는 특별한 수업 중 하나다. 다도실로 모여 두 명씩 짝을 지어 앉은 후, 한 명이 다른 한 명에게 차를 대접하며 한국 전통 다도를 실습하는 시간이다. 물론 아이들에게는 전통문화 체험과 교양 함양이라는 목적보다 차와 함께 대접되는 다과가 더 중요하게 받아들여지는 법이지만.


헌다레는 일 년의 마지막에 1학년 학생들이 그간 배운 다도를 시연하고 선배들과 선생님들에게 차를 대접하는 작은 이벤트다. 주로 문화축제를 앞둔 날에 열리곤 하는데, 이날에는 학교의 정중앙에 있는 로비에 길게 늘어서 있는 테이블이 차려진다. 정해진 시간에 그 테이블 근처로 가면 1학년 학생들이 배운 대로 차를 우려내어 따라 준다. 

앞에 선생님이나 다른 학부모님들이 앉아 계시면 그나마 괜찮지만, 2, 3학년 선배들이 앉아 있으면 시선이 마주칠 때마다 웃음이 터져 나오는 것을 참을 수가 없다. 평소에 차는 고사하고 농담이나 주고받으며 떠들던 사이인데 한순간에 예의있고 우아한 체 하며 차를 대접하려니 웃음이 흘러나오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그래도 선배들은 우리가 따라 준 차를 천천히 음미하며 맛있다는 칭찬을 건네 주곤 한다. 창문 너머로 흩날리는 눈발을 구경하며 따뜻한 찻물을 들이켜면 그 해의 겨울을 제대로 만끽하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예술의 전당?


공연 당일 아침이 되면 모두가 마지막 연습을 하고 공연을 준비하느라 눈코뜰 새 없이 바빠진다. 악기 연습에 더해 축제가 진행될 강당을 미리 청소하고, 의자를 나르고, 학부모님들의 방문을 위해 기숙사의 물품을 정리해 두는 것 또한 우리의 몫이다. 오후에 접어들면 모든 부서가 공연을 위한 메이크업을 하고 무대 의상을 갖춰 입기 시작하는데, 이때 학교를 돌아다니면 마치 예술의 전당 한복판에 와 있는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다. 이쪽에는 오케스트라 단원 복장을 한 현악부 친구가 서 있고, 저쪽에는 화려한 의상을 겉옷 안에 감추고 어디론가 바삐 걸어가는 재즈댄스부 친구가 있고, 고개를 돌려 보면 한복을 차려입은 가야금부 친구가 있고....... 아주 힘주어 꾸민 친구의 낯선 얼굴을 보면 아이들은 이때다 싶어 온 힘을 다해 놀리기도 한다. 


저녁 무렵이 되면 학교로 수많은 사람과 자동차가 들어서기 시작한다. 이따금씩 누군가를 발견하고 부리나케 뛰어가는 아이들도 있는데, 그곳으로 가면 작년 내지는 재작년에 졸업한 선배들이 손을 흔들고 있기도 하다. 학교에 일찍 방문한 학부모님들과 졸업생들은 학교 안을 돌아다니며 학생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미술부가 준비한 전시회를 감상하며 공연이 시작되기를 기다린다. 저녁식사 시간에 식당을 방문하면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수의 사람들이 식당 안에 빼곡히 들어차 저마다 담소를 나누며 식사를 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공연 시작이 코앞으로 다가오면 학교 곳곳에서 보이던 친구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일제히 사라진다. 다들 어딜 갔나 궁금할 때 대기실의 문을 열어 보면 온갖 무대 의상을 갖춰 입은 아이들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몇몇 아이들은 슬며시 무대 뒤쪽으로 나가 동선을 체크하기도 한다. 아침까지만 해도 텅 비어 있던 의자들이 수많은 사람들로 가득 차면 문화축제 시작 시간이 초를 다툴 만큼 가까워졌다는 뜻이다. 

장내의 모든 불이 꺼지고, 웅성거리는 소리가 사방을 가득 메우고, 일순간 사회자 테이블 쪽에 환한 조명이 켜지면 비로소 문화축제의 막이 오른다. 사회자 두 명이 서로를 바라보며 미리 준비한 진행 멘트를 읊으면, 다음 차례를 기다리며 대기하던 친구들이 입을 막고 필사적으로 웃음을 참기도 한다. 

공연의 시작은 주로 사물놀이부가 장식하게 된다. 사물놀이패 의상을 갖춘 학생들이 우렁찬 목소리로 무대를 열면 모두가 무대에 시선을 고정하고 박수를 친다. 흥겨운 가락으로 사물놀이부가 첫 공연을 마치고 나면, 뒤를 이어 수많은 팀들이 차례로 무대에 오르게 된다. 순식간에 장내를 오케스트라 공연장으로 바꾸어 버리는 현악부, 한복을 입고 장구 장단에 맞추어 연주하는 가야금부 등 많은 부서가 정해진 순서대로 공연을 펼친다. 자기 순서가 끝나고 관객석 한쪽에 옹기종기 모인 아이들은 입학식 때 열성적으로 호응하던 경력을 살려 친구들이 무대에 오를 때마다 소리를 지르고 분위기를 띄우곤 한다. 

이런 열띤 리액션이 가장 고조되는 순간은 바로 재즈댄스부의 차례가 다가왔을 때다. 매번 파격적인 음악과 안무를 선보이는 재즈댄스부의 공연은 모두가 가장 큰 목소리로 환호하며 박수갈채를 보내는 무대다. 

1부와 2부로 나뉜 긴 공연의 마지막 순서는 전교생의 합창이다. 모든 학생이 무대에 올라 미리 연습한 합창곡을 부르면, 마침내 그 해의 문화축제가 막을 내리게 된다. 


공연이 끝나면 모두가 바삐 장내를 정리하고 악기를 도로 가져다 놓는다. 무대를 감독하기 위해 학교를 찾아 주신 방과후학교 강사 선생님과 내년을 기약하며 올해의 마지막 인사를 나누기도 한다. 늦은 밤 뒷정리가 마무리되면 아이들은 삼삼오오 모여 기숙사로 돌아가, 학교에서 보내는 올해의 마지막 밤을 지새우곤 한다.




문화축제 다음날 아침이 밝아 오면, 전교생이 모두 강당에 모여 겨울방학식을 진행하게 된다. 분명 어제 저녁까지만 해도 화려한 분장과 의상 때문에 못 알아볼 만큼 번쩍번쩍하던 친구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예의 그 맹한 모습으로 돌아와 자리를 지키게 된다. 학생회에서 만든 영상을 보고, 시상식을 진행하고, 교장 선생님의 짧은 연설까지 모두 끝나면 비로소 한 해가 마무리된 것이다. 모두가 미리 챙겨 둔 짐을 바리바리 들고 눈이 내린 학교 운동장을 가로질러 집으로 돌아가면, 학교는 다시 길고 고요한 잠에 빠져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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