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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린 Oct 20. 2021

학교로 이사를 가던 날

입학식과 입학 첫 주

입학식 전까지 신입생들은 학교로 짐을 미리 부쳐 둘 수 있다. 학교에서 나누어 준 안내 책자에 적힌 대로 거대한 택배 상자에 물건을 하나씩 채워넣다 보면 마치 이사를 준비하는 듯한 기분마저 든다. 기숙사에서 춥지는 않을까, 밤에 눈이 부셔서 잠을 설치게 되지는 않을까, 가면 빨래를 얼마나 자주 할 수 있을까, 혹시 수건이 모자라려나....... 노파심이 하나씩 피어오를수록 상자 안에 담기는 살림살이도 하나씩 늘어만 간다. 묵직한 걱정을 꾹꾹 눌러 담아 택배를 부치고 나면, 비로소 집을 떠난다는 것이 실감이 난다.   



입학식: 노래와 호응과 맞절이 있는


3월의 첫째 날이 되면, 오리엔테이션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게 학교가 꽉 들어차기 시작한다.


학교 운동장으로 물 밀듯 들어오는 차량 행렬은 일 년의 시작을 여는 신호탄이다. 먼저 수많은 자동차들이 줄지어 학교로 들어와 운동장을 가득 메우고, 자동차들의 수만큼이나 많은 2, 3학년 학생들이 그 안에서 내려 자기 몸만한 택배 박스를 들고 바삐 이곳저곳을 오다. 이리 보고 저리 봐도 사방이 모르는 얼굴들뿐인데다가 다른 학교들처럼 명찰이 달린 교복을 입는 것도 아니건만, 신기하게도 신입생, 2학년, 3학년은 그 자세에서부터 서로 다른 티가 난다.


기본적으로 3학년은 가장 짐이 적다. 다년간의 생활을 통해 학교에 최소한의 물건만 남기는 전략을 택했기 때문이다. 기숙사의 자기 방에 짐을 내려놓고 여유롭게 다른 방으로 향해 친구에게 대뜸 이런 말을 던진다면 그 학생은 열이면 열 모두 3학년이다.

"야, 손톱깎이 있어?" 

"일주일 동안만 치약 좀 같이 쓰자." 

"나 네 수건 좀 쓰려고. 그렇게 됐다."

올해로 세 해째 부대껴 사는 이들에게 내 물건과 네 물건의 경계는 큰 의미가 없다.

2학년은 오랜만에 학교로 돌아와서 그런지 제법 들떠 있다. 입학식 날 친구들을 마주쳤을 때 가장 격하게 서로를 반기는 아이들은 대개 2학년이다. 동시에 2학년들은 1학년에게도 가장 많은 관심을 가지는 학년인데, 처음으로 맞게 된 후배들이 어떤 아이들일지 궁금해 견딜 수 없다는 기색이 너나할 것 없이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그리고 학교 한구석에서는 이런 호기심 어린 시선들을 고스란히 받아내며 안쓰러울 정도로 굳어 있는 신입생들이 보인다. 아직 학교가 어색한데다가 선배들을 마주하는 것도 처음인 신입생들에게는 이런 일련의 광경이 왠지 모를 위압감을 주곤 한다. 가끔 신입생들의 굳어 있는 얼굴을 본 선생님들은 위로 아닌 위로 같은 농담을 던지기도 한다. "너희가 쟤네 눈치 보는 것만큼 쟤네도 너희 눈치를 보고 있을걸?"

당연히 그 말을 들은 아이들은 '지금 그걸 위로랍시고 하냐' 라는 표정을 짓는다. 학교에 제일 막내로 들어와 사방이 눈치 볼 사람들뿐인 입장에서 이런 말은 전혀 도움이 안 되기 마련이니 말이다. 물론 학교의 밥을 하루 이틀 먹다 보면 이 말이 마냥 실없는 농담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차츰 깨닫게 될지도 모른다.


지금이야 새로운 강당 건물이 증축되었지만 그 이전까지 입학식은 여학생 기숙사에서 진행하는 것이 전통이자 관례였다. '무슨 기숙사에서 입학식을 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여학생 기숙사는 마치 오페라 극장과도 같은 구조를 지니고 있어 입학식과 같은 큰 규모의 행사를 진행하는 것이 무리 없이 가능하다. 기숙사의 1층 한가운데에는 넓은 로비가 있고 그 사방을 가운데가 뻥 뚫린 직사각형 모양의 2층이 둘러싸고 있기 때문에 2층에서 1층 로비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다. 입학식 당일이면 넓은 1층은 신입생과 학부모님들의 공간이 되고, 2층은 2, 3학년 재학생들의 관중석 역할을 한다.


입학식의 시작은 평범하다. 먼저 신입생들이 연단에 서고 그 중 맨 앞에 선 학생이 대표로 선서문을 낭독하는 것으로 막이 오른다. 이후 교장 선생님의 입학 축하 연설을 비롯해, 새내기들을 맞이하는 여러 인사들의 축사가 연이어 이어진다. 그러나 오리엔테이션도 처음 얼마간은 '평범하게' 여겨졌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오늘도 어김없이 '제법 무난하게 끝나겠는데?' 라고 생각하게 될 무렵 다음과 같은 멘트를 듣게 될 것이다.


"지금부터 신입생들의 자기소개 무대가 있겠습니다."


올 것이 왔다. 오리엔테이션 때부터 연습했던 능청스럽고 뻔뻔한 동작을 모두의 앞에서 선보일 시간이다.


신입생들이 쭈뼛쭈뼛 모두의 앞에 나서 대형을 갖추면 피아노 반주가 채 흘러나오기도 전에 2층에서 우레와 같은 함성소리가 터져 나온다. 소리의 근원지를 바라보면 2, 3학년 선배들이 단체로 호응을 하고 있는 모습이 눈에 띄는데, 어찌나 열성적인지 사전에 선생님들이 모종의 압력을 넣은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다. 하지만 이 모든 함성은 자발적으로 터져 나오는 흥겨움이니 오해해서는 안 된다.

노래가 시작되면 여학생 기숙사의 오페라 극장 구조는 비로소 그 순기능을 다하게 된다. 2층에 앉은 재학생들은 난간 가까이에 우르르 몰려 고개를 쭉 빼고, 신입생들이 한 명 한 명씩 노래를 부르며 하트를 날리고, 브이를 해 보이고, 전방을 향해 자세를 취해 보일 때마다 배를 잡고 웃기도 하고 환호를 하기도 한다.

신입생들의 노래가 끝나면 다음은 신입생 학부모님들이 무대에 오를 차례다. 학부모님들은 1학년 학생들을 향해, '너희들의 앞날을 응원한다', '너희가 행복하길 바란다' 와 같은 노랫말이 담긴 노래를 불러 주신다. 이때 어린 나이에 집을 떠나 부모님과 멀리 떨어져 살며 스스로 생활을 꾸려 가게 될 자식에 대한 묘한 감정으로 눈물을 훔치는 학부모님도 더러 계시고, 마찬가지로 집을 떠나 살게 되었다는 생각에 울컥하는 아이들도 있다. 하지만 그 마음을 이미 다 알고 있다는 듯 입학식을 진행하는 선생님들은 하나같이 입을 모아 이렇게 말씀하신다.

"지금이야 우리 애가 언제 집에 오나 하면서 귀가 날짜만 하염없이 기다리게 되겠지만, 딱 1년만 지나도 어련히 알아서 잘 살고 있겠거니 하면서 귀가 날짜조차 가물가물해지실 겁니다. 간혹 나도 모르는 사이 아이가 집에 돌아와 있어서 '너 언제 왔냐?'하고 묻는 학부모님도 계세요. 물론 반쯤은 농담 섞인 이야기지만, 정말 아이들은 놀랄 만큼 스스로의 삶을 잘 꾸려 나갑니다. 그러니 걱정보다는 믿음으로 뒤를 지켜봐 주세요."


입학식의 마무리는 신입생, 재학생, 학부모, 그리고 선생님들이 서로 번갈아 가며 마주보고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하는 '맞절' 시간이다. 함께 살게 될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새로운 일 년을 잘 부탁한다는 의미의 인사인 셈이다.


입학식이 끝나면 모두 자신이 배정된 방을 확인하고 기숙사에 짐을 마저 풀게 된다. 그런데 로비에 게시된 방 배정표를 눈으로 훑어 내 이름을 찾다 보면, 같은 방에 나를 제외한 네 명의 이름이 더 적혀 있는 것이 보인다. 분명 한 명의 이름은 입학식 노래 가사에서 들은 기억이 있는데, 나머지 세 명은 뭐지? 풀리지 않는 궁금증을 안고 방으로 들어가면 학교에서 십 년은 산 것처럼 태평한 표정과 자세로 드러누워 있는 사람들이 우리를 맞이한다. 2, 3학년 선배들이다. 이게 뭔가 싶어 같은 방에 배정된 1학년 친구를 쳐다보면 어김없이 그 애도 나와 같은 표정을 짓고 있다. 안 봐도 서로의 머릿속이 훤했다. '우리 어떡하지?'


한 방에는 여러 학년이 고루 배치되는 것이 원칙이기 때문에, 신입생들은 짐을 편히 내려놓기도 전에 같은 방을 쓰게 된 선배들에게 좋은 첫인상을 주어야 한다 부담감에 사로잡히기 마련이다. 선배들하고 같은 방을 쓴다고? 불편해서 잠은 어떻게 자? 잘 때 잠꼬대 한 번이라도 하면 잔소리 엄청 듣는 거 아냐? 무수한 걱정을 애써 숨긴 채 아이들은 큰 마음을 먹고 인사를 건넨다.

"안녕하세요."

그런데 이렇게 공손히 인사를 건네면 선배들은 난감해한다. 인사에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걸까? 표정이 건방져 보였나? 모두 아니다. 선배들이 어색한 표정을 짓는 이유는 바로 그 인사가 '공손하기' 때문이다.


이곳에서는 선후배 간에 절대 경어를 쓰지 않는 것이 원칙이다. '선배님' 내지는 '선배'라는 호칭도 절대 사용하지 않는다. 불필요한 위계질서를 없애고 한가족 같은 관계를 지향하는 까닭이다. 후배가 조심스레 인사하고, 선배가 진땀을 빼며 편하게 반말을 해도 된다고 말하는 비슷한 상황은 기숙사의 각 방에서 일어나는 입학식 날의 전형적인 풍경 중 하나다. 같은 방 사람들과 인사를 하고 짐을 바삐 옮기다 보면 이삿짐센터 한복판에 놓인 듯한 하루가 순식간에 지나가곤 한다.


기숙사에서 잠드는 첫날밤에는 오만 가지 감정이 교차한다. 내 집 안방 같은 편안한 자세로 잠들어 코까지 고는 2, 3학년 선배들을 옆에 두고, 신입생들은 정자세로 누워 한참 동안이나 천장의 전등을 응시하다 어렵사리 오지 않는 잠을 청하곤 한다. 본래 이사 첫날이란 그런 법이다.



입학 첫 주: 이 작은 세상에 적응할 시간을


입학 첫 주에는 수업을 하지 않는다. 대신 바깥과 전혀 다른 또 하나의 '작은 세상' 같은 이곳에 신입생들이 충분히 적응할 수 있도록 다양한 활동들이 마련되어 있다. 이 기간에 진행되는 활동들은 학교가 어떤 방향성을 추구하며, 앞으로 어떤 방식의 수업과 프로그램들이 기다리고 있을지를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게끔 해 주는 나침반 역할을 한다.


주요 일정 중 하나는 오리엔테이션 때보다 훨씬 규모가 커진 '학교 인근 탐방'이다. 신입생들은 1학년 담임을 맡게 된 선생님들과 함께 학교 바깥으로 나가 동네를 돌아다니며 근처에 어떤 곳이 있는지 자세히 살펴보게 된다. 이제 막 기지개를 켜기 시작한 봄날의 따스함, 새로운 장소에 대한 호기심, 그리고 수업을 하지 않는다는 만족감이 한데 어우러져 모두가 너나할 것 없이 붕 떠 있는 시간이기도 하다. 선생님들은 아이들을 데리고 이곳저곳을 다니며 제법 실용적인 정보들을 알려 주시는데, 이를테면 외출을 나갈 때 시내로 향하려면 어디로 가서 몇 번 버스를 타야 하는지, 저만치 보이는 한옥들은 무슨 용도로 세워진 건물인지, 학교 소유의 밭은 어디에 있는지 등의 이야기들이다. 물론 잔뜩 들뜬 아이들의 귀에 그 중 얼마나 많은 단어가 제 의미를 다하며 들어갈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도서관에서 보내는 시간도 빼놓을 수 없는 핵심 활동 중 하나다. 이 시간에는 도서관에서의 활동을 주관하는 연구원 선생님과 함께 도서관 홀에 모여 다양한 주제로 자유롭게 글을 쓰고 이야기를 나누게 된다. 학교 인근 탐방을 하며 들었던 생각을 마음대로 적어 보기도 하고, 앞으로의 삼 년을 맞이하는 마음가짐이 어떤지 글로 표현해 보기도 하고, 각종 책의 발췌 대목을 읽거나 인문학 관련 영상 자료를 시청한 후 느낌을 글로 남기기도 한다. 대개 글에는 사람의 성향이 고스란히 묻어나기 때문에 서로가 쓴 글을 읽어 보며 '이 친구는 이런 사람이겠구나'하고 지레짐작해 보는 것도 가능하다.

아, 물론 모두가 완벽한 집중력을 보이는 것은 아니다. 자유롭게 글을 쓰도록 주어진 시간에 도서관 이곳저곳을 잘 살펴보면 다양한 직업을 가진 인간 군상을 확인할 수 있다. 쓰라는 글은 안 쓰고 건너편에 앉은 친구의 조는 모습을 그리다가 들키는 명화백이나, 도서관에 놓인 바퀴 달린 의자로 레이싱을 하다가 적발되는 카레이서 등이 대표적이다. 


교실 중 하나를 학급 교실로 배정받은 후 그곳에서 학급별 모임을 가지기도 한다. 학급모임에서는 스무 명 남짓한 반 아이들이 담임 선생님과 함께 앞으로의 학급 생활에 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두레>를 정하는데, <두레>라는 그 생소한 이름이 대체 뭘까 고민하고 있노라면 희망 두레를 적어 내는 양식이 아이들 사이를 돌고 돌아 어느덧 내 앞으로 오게 된다. 학급에서의 역할이니 출석부 관리 담당, 교실 뒷정리 담당 정도가 있겠지? 하고 종이를 받아들면 '이런 것까지 맡나?' 싶을 정도로 독특한 역할들이 우후죽순 눈에 들어온다. '교실 화이트보드에 한 달 일정 정리하기 담당', '친구 생일 때마다 롤링페이퍼 돌리기 담당', '아침독서 시간에 독후감 쓰자고 말하기 담당', 심지어는 '매일 저녁 기숙사에서 다음날 숙제 알려주기 담당'에 이르기까지 실로 다양한 역할들이 있다.


학교 구조와 학교 인근 지리를 모두 파악하고, 도서관에서의 시간을 통해 앞으로 학교에서 접하게 될 인문학적 수업의 방향성을 헤아려 보고, 학급에서 오롯한 자기 역할까지 맡으면 비로소 학교생활을 시작할 준비를 마친 셈이다. 입학 첫 일주일은 학교에 '적응할' 시간이었다면, 지금부터는 정말로 학교에서 '살아갈' 시간이다.


이제 신입생의 하루에서 1학년의 하루로 넘어가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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