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번째 이야기
3월은 우리의 호칭이 '예비 신입생'에서 '신입생'으로 바뀌는 달입니다. 입학식을 마치고 나면 우리는 정식으로 학교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대접받게 될 것입니다. 몇 시간뿐인 행사지만, 입학식과 그 전후의 분위기를 통해 앞으로의 일 년이 어떻게 흘러갈지 조금은 가늠해볼 수 있겠죠?
입학식 당일이 되면 학교는 오리엔테이션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시끌벅적해집니다. 멀리서부터 들려오는 드드득 소리도 배로 늘어나고, 자기 몸만한 여행가방을 들고 학교로 들어오는 학생들과 온갖 자동차, 택시들이 운동장을 가득 메웁니다. 이때 학교 곳곳을 돌아다니면 장소를 불문하고 형형색색의 택배 상자와 거대한 가방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꼭 이삿짐센터를 방불케 하는 광경이 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택배 상자 사이를 헤치고 나아가다 보니, 상자마다 네임펜으로 독특한 낙서가 되어 있는 것이 보입니다. 누군가 텅 빈 학교에 들어와 낙서를 해 두고 도망치기라도 한 걸까요?
이 낙서들은 방학 직전 기숙사에 있는 짐을 정리할 때 학생들이 기숙사 각 방을 돌아다니며 서로의 택배 상자 위에 그림을 그려 주는 전통 아닌 전통의 산물입니다. 상대적으로 접점이 적었던 친구에게는 특별히 미적 감각을 발휘해 정성 가득한 메시지와 그림을 그려 주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도리어 친한 사이일수록 상자의 그림은 빈약한 가로 획과 세로 획이 난무하는 거침없는 추상 낙서로 변하곤 하죠. 상자 위의 각종 그림 덕분에 별다른 표시 없이도 학생들은 알아서 어떤 상자가 자기 것인지 알아보고 짐을 풀곤 합니다. 방학이 지나고 오랜만에 학교로 돌아와 반갑게 인사하며 능숙하게 짐을 푸는 2, 3학년 학생들과, 오리엔테이션 때 배운 노래가 살짝 가물가물해지기 시작한 1학년들이 한자리에 모두 모이면 비로소 입학식이 시작됩니다.
지금은 강당을 겸한 체육관 건물이 세워졌지만, 새로운 건물이 세워지기 이전까지 입학식은 줄곧 따뜻하고 널찍한 공간을 자랑하는 여학생 기숙사의 홀(로비)에서 치러지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여학생 기숙사 로비는 마치 오페라 극장과도 같은 구조로, 1층에 넓은 공간이 있고 2층 바닥은 가운데가 뻥 뚫린 직사각형 모양으로 벽을 빙 둘러싸고 있기 때문에 2층에서 1층 로비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습니다.
입학식은 식순 안내와 신입생들의 선서로 그 막을 열게 됩니다. 신입생들이 연단에 서고 그 중 맨 앞에 선 학생이 대표로 선서문을 낭독합니다. 이후 교장 선생님의 짧은 연설을 비롯해, 새내기들을 맞이하는 여러 인사들의 축사가 이어집니다.
축사가 끝나면 모두가 고대하던, 신입생들이 입학 전부터 학교에 와서 준비했던 합창을 선보이는 시간입니다. 신입생들이 부르는 노래는 두 가지 정도가 있는데, 하나는 노랫말에 신입생들의 이름을 모두 넣은 '자기소개용' 노래이며 다른 하나는 말 그대로 일반적인 합창곡입니다. 자기소개 노래는 모든 학년이 같은 멜로디를 공유하고 각자의 노랫말만 다르기 때문에, 지금 자리에 앉아 노래를 구경하는 선배들 중 아무나 붙잡고 '자기소개 노래 불러 봐!'라고 말해도 지금 신입생들이 부르는 노래와 같은 멜로디를 흥얼거릴 것입니다. 입학 이후에도 출석을 부르거나 빠진 인원을 찾을 때 이 자기소개 노래가 유용하게 사용된다고 하니 앞으로 삼 년 내내 이 노래를 잊어버릴 일은 없을 것으로 생각하면 편하겠군요.
신입생들의 노래 순서로 접어들 때, 여학생 기숙사의 오페라 극장 구조는 비로소 순기능을 다하게 됩니다. 2층에는 주로 2, 3학년 학생들이 앉아 있는데, 1학년 신입생들이 로비에 모여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면 위층에서 선배들이 우르르 모여 고개를 쭉 빼고 새로 들어온 후배들을 구경하기 시작합니다. 축사와 연설이 진행될 때는 연신 하품을 하던 학생들까지도 신입생들이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면 열띤 리액션을 보여주곤 하죠. 신입생 합창이 끝나면 1학년 학부모님들이 무대에 오르실 차례입니다. 학부모님들은 1학년 학생들을 향해, '너희들의 앞날을 응원한다', '너희가 행복하길 바란다' 와 비슷한 노랫말이 담긴 노래를 불러 주십니다. 어린 나이에 집을 떠나 부모님과 멀리 떨어져 살며 스스로 생활을 꾸려 가게 될 자식에 대한 묘한 감정으로 눈물을 훔치는 학부모님도 계십니다.
입학식의 마무리는 신입생, 선배들, 학부모님들과 선생님들이 서로 번갈아 가며 마주보고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하는 것입니다. 함께 살게 될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새로운 일 년을 잘 부탁한다는 의미의 인사입니다.
입학식이 끝나면 학년별로 몇 가지 일정을 더 진행한 후, 각자 기숙사로 돌아갑니다. 오리엔테이션 때는 조금 적막했던 기숙사 로비에 사람들이 가득 차고 저마다 새롭게 배정된 방으로 짐을 옮기느라 바쁩니다. 박스 접는 소리와 테이프 뜯는 소리가 사방을 채우는 와중에도 같은 방을 쓰게 된 선배들과 신입생들은 인사를 나누며 말문을 트곤 합니다.
같은 방을 쓰는 선배에게 인사를 건네 볼까요? 우리는 갓 초등학교를 졸업한 열네 살 언저리의 학생이 되었으므로, 그 나이대 학생들이 보고 배운 바대로 선배들에게 공손히 인사를 하기로 합니다.
"안녕하세요."
그러면 인사를 받은 선배가 굉장히 난감하고 어색한 표정을 지을 것입니다. 왜 공손하게 인사를 했는데 난처해하는 걸까요? 바로 그 인사가 '공손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지내게 될 학교에서는 선후배 간에 존댓말을 쓰지 못하도록 합니다. 불필요한 위계질서를 없애고 한가족 같은 관계를 지향하는 까닭입니다. 존중은 하되 두려워하지는 않는 마음을 담아, 가볍고 밝게 "안녕!"이라고 인사하면 됩니다. 후배가 조심스레 인사하고, 선배가 편하게 반말을 해도 된다고 말하는 비슷한 상황은 기숙사의 각 방에서 일어나는 입학식 날의 전형적인 풍경 중 하나입니다. 같은 방 선배들과 인사를 하고 짐을 바삐 옮기다 보면 이삿짐센터 한복판에 놓인 듯한 하루가 순식간에 지나갑니다.
입학식 다음날이 밝았습니다. 2, 3학년 학생들은 늘 그랬듯 익숙하게 하루 일과를 시작하고 있군요. 그럼 신입생들은 무엇을 하게 될까요?
입학식 이후 며칠 동안, 신입생들은 수업을 듣는 대신 앞으로의 학교생활에 적응하기 위한 특별한 코스들을 거치게 됩니다. 이 기간에 진행되는 활동들은 학교가 어떤 방향성을 추구하는지, 앞으로 어떤 방식의 수업과 프로그램들이 기다리고 있을지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게끔 해 주는 시간입니다.
일정 중 하나는 오리엔테이션 때보다 훨씬 규모가 커진 '학교 인근 탐방'입니다. 신입생들은 1학년 담임을 맡게 된 선생님들과 함께 학교 바깥으로 나가 동네를 돌아다니며 근처에 어떤 곳이 있는지 자세히 살펴보게 됩니다. 시내로 향하려면 어디로 가서 몇 번 버스를 타야 하는지, 저만치 보이는 한옥들은 무슨 용도로 세워진 건물인지, 학교 소유의 밭은 어디에 있는지 등을 익히는 시간입니다. 어렵게만 느껴지던 선생님과 대화를 나누며 거리감을 조금 더 좁혀 볼 수도 있는 시간이니 궁금한 것이 생기면 주저 없이 질문하는 것이 좋겠죠?
도서관에서 보내는 시간도 빼놓을 수 없는 핵심 활동입니다. 이 시간에는 도서관에서의 활동을 주관하는 연구원 선생님과 함께 도서관 홀에 모여 다양한 주제로 자유롭게 글을 쓰고 이야기를 나눕니다. 연구원 선생님이 미리 나누어 주신 각종 책의 발췌 대목을 읽는 것과 더불어 인문학과 연관된 주제의 다양한 영상 자료를 시청하기도 합니다. 물론, 모두가 완벽한 집중력을 보이지는 않습니다. 자유롭게 글을 쓰도록 주어진 시간에 도서관 이곳저곳을 잘 살펴보면 쓰라는 글은 안 쓰고 건너편에 앉은 친구의 조는 모습을 그리다가 들키는 학생이 보이기도 하고, 도서관에 놓인 바퀴 달린 의자로 레이싱을 하다가 적발되는 학생도 볼 수 있습니다.
과목별 교실 중 하나를 학급 교실로 배정받은 후 그곳에서 학급별 모임을 가지기도 합니다. 담임 선생님과 함께 앞으로의 학급 생활에 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학급 관련 업무를 하나씩 맡는 <두레>를 정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대개 학급에서의 역할이라면 출석부 관리 담당, 교실 뒷정리 담당 등을 생각할 수 있지만 두레에는 '이런 것까지 맡나?' 싶을 정도로 독특한 역할들이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교실 화이트보드에 한 달 일정 정리하기 담당', '친구 생일 때마다 롤링페이퍼 돌리기 담당', '아침독서 시간에 독후감 쓰자고 말하기 담당', '매일 저녁 기숙사에서 다음날 숙제 알려주기 담당' 등이 있습니다.
학교 구조와 학교 인근 지리를 모두 파악하고, 도서관에서의 시간을 통해 앞으로 학교에서 접하게 될 인문학적 수업의 방향성을 헤아려 보고, 학급에서 오롯한 자기 역할까지 맡으면 비로소 학교생활을 시작할 준비를 마친 것입니다. 입학 첫 일주일은 적응의 시간이었다면, 지금부터는 정말로 학교에서 '살아갈' 시간입니다.
이제 신입생의 하루에서 1학년의 하루로 넘어가 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