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경국가 (3)

by 그린

경비행기가 떠오르는 순간 가장 먼저 들었던 감정은 막연한 공포였다.

남이 나를 해칠 가능성이 있는 세계에, 누군가로부터 억울하게 해를 입을 가능성이 있는 세계에 발을 들인다는 것은 꼭 인큐베이터에서 자진해서 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가는 것과도 같은 느낌이었다.


책으로만 배웠던 다채로운 범죄들이 얼빠진 외지인인 나를 노리지는 않을까. 소매치기, 폭행, 납치, 어쩌면 이유 없는 칼부림도. 하지만 내가 어째서 이 경비행기에 오르게 되었는지 그 전모를 되새기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더 이상 인큐베이터 안도 안전하지 않은 탓이 아닌가. 생각이 거기에 이르자 놀라우리만치 마음이 편안해졌다. 맞은편에 앉은 해리는 내가 연신 손을 꼼지락거리며 생각에 잠겨 있다 한순간 자세를 고쳐 앉는 모습을 말없이 눈동자에 담고 있었다.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을 때 먼저 말을 꺼낸 것은 내 쪽이었다.


“너는 왜 같이 가겠다고 했어?”


해리는 망설임 없이 답했다.


“지도자를 만나 보고 싶어서. 나는 지금 이 국가 형태가 옳은 건지 잘 모르겠거든.”


내가 별다른 첨언 없이 듣고만 있자 해리는 덧붙였다.


“방금 한 말은 사실 좀 과장한 거고. 지도자를 만나 보고 싶기도 하지만, 살레에 그닥 남아 있고 싶지도 않아서 그랬어.”


“왜? 언제 화를 당할지 모르는 건 살레나 바깥이나 똑같아.”


“넌 새미가 없는 살레에 굳이 남아 있을 이유를 느끼지 못했지, 나도 마찬가지야. 새미가 없고 너도 없는 살레에 굳이 남아 있을 이유를 못 느끼겠어.”


그 말을 끝으로 우리는 다시 침묵을 지켰다. 경비행기는 제법 오랜 시간을 그렇게 날았다.






독재국가라는 단어가 풍기는 섬뜩한 느낌 탓에 비행기에서 내려 처음 발을 내딛는 순간은 그렇게 긴장될 수가 없었다. 나와 해리는 약속이라도 한 듯 입을 일자로 굳게 다물고 최대한 다부진 눈빛을 하며 온 신경을 곤두세워 주변을 살폈다.


라울스의 첫인상은 실로 단정하기 그지없었다. 땅 위에 놓인 모든 것이 견고했고 주위를 이룬 모든 선은 일자로 깔끔하게 딱 떨어지고 있었다. 어긋남과 무너짐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그 물샐 틈 없는 깔끔함과 견고함은 오히려 독재국가라는 인상을 더욱 강하게 심어 주는 듯했다. 폭풍 이전에 마지막으로 존재했다던, 우리 가까운 조상의 사회주의 국가가 이랬을까? 그보다 훨씬 더 이전에 있었던 한 작가의 책에서 묘사된 전체주의 국가를 실제로 보면 이런 느낌일까? 그 책의 배경은 정말 세계가 몇 가지의 거대한 국가로 나뉘어 있었다던데. 마치 지금처럼.


정복을 차려입은 사내가 저만치서 걸어와 우리에게 가볍게 인사했다. 이리로 모시겠습니다. 마치 국빈을 안내하듯 깍듯한 태도였다. 그가 안내하는 방향으로 뒤따라 걸어가며 나는 살아생전 처음으로 느껴 보는 생경함에 몇 번이고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내뱉었다.


정복이라니. 우리가 죽었다 깨어나도 볼 수 없는 국가의 상징이었다. 저들의 국가는 손 뻗으면 닿을 수 있는 실재이고 현실이었다.


리무진이 도심 한복판을 미끄러지듯 달렸다. 보이지 않는 운전사는 우리가 라울스의 풍경을 볼 수 있도록 일부러 천천히 차를 몰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창문 너머로 지나치는 풍경은 처음 보았던 깔끔함과 견고함의 연속이었다.


해리는 살레의 언어로, 나만 들을 수 있을 만큼 작게 속삭였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멋진데. 다른 독재국가들이 그런 것처럼 대외 선전용으로 마련된 구역일까?”


그럴지도 모르고, 아닐지도 모르지. 나는 무책임하기 짝이 없어 보이는 대답을 했지만 사실 그것이야말로 정말 내가 머릿속에 유일하게 떠올릴 수 있었던 문장이었다. 외적인 깔끔함은 둘째치고, 그들이 길거리를 걷는 수많은 사람들의 여유로운 웃음까지 꾸며냈다고는 믿고 싶지 않았다. 그건 진짜였다. 언제든 외부에서 온 인사를 응대하기 위해 작위적으로 환하게 지어 보이는 미소가 아니라 정말 기분이 좋아 노래를 흥얼거리며 길을 걸을 때 절로 짓게 되는 그런 종류의 웃음이었다. 나는 그 웃음을 언젠가 본 적이 있다. 살레의 바닷가에서 새미는 꼭 저런 얼굴을 하고 있었지.


일순간 몸이 왼쪽으로 쏠렸다. 리무진은 부드럽게 오른쪽으로 방향을 튼 뒤 얼마간 더 미끄러져 갔다가 서서히 멈춰섰다.

도착했습니다. 문을 열어 드릴 테니 잠시만 기다리세요. 운전사의 목소리가 들리기 무섭게 차 밖에서 또 다른 정복을 입은 사내가 다가와 문을 열고 우리를 맞았다. 라울스의 ‘정부 청사’ 앞이었다.


라울스의 정부 청사는 무어라 꼭 집어 말할 순 없지만 폭풍 이전에 쓰였던 건축 양식을 그대로 차용한 것처럼 보였다. 사실 한 초주연합의 정부가 사용하는 건물치고 그리 거대하지는 않았다. 그 언젠가 책에서 비슷한 묘사를 본 기억이 있는데. 니스 해변에 있는 대저택 정도라고 하면 적절한 표현이 될지도 모르겠다.

두 걸음 정도 앞서가며 우리를 안내하는 남자의 정복이 너무도 신기해서 금방이라도 손을 뻗어 옷깃을 움켜쥐게 될 것만 같았다. 어깨에 선명히 박힌 라울스의 상징을 똑 떼어 확인해 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참아냈다. 층계참을 두어 번 거쳐 올라가자 거대한 복도와 거대한 문이 보였다. 정복을 입은 남자는 노크를 한 뒤 조심스레 문을 열어 주었다.


큰 창문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 앞에는 문을 등진 채 창문 쪽을 바라보고 앉아 있는 한 여성의 실루엣이 보였다. 척 보기에도 편안해 보이는 의자에 기대어 한껏 젖힌 고개, 낮은 테이블에 올려 까딱거리고 있는 두 발. 그녀에 대해 일언반구의 언급도 듣지 못한 사람일지라도 바보가 아닌 이상 그녀가 이곳에서 가장 큰 권력을 지닌 사람이라는 사실은 충분히 알아차리고도 남을 것이었다.


그녀가 천천히 의자를 돌리자, 라울스에서 온 답장이 그토록 시원시원하고 군더더기 없었던 이유를 비로소 알 수 있었다. 경비행기를 줄 테니 타고 오라는 그 짧은 문장만큼이나 시원한 인상을 풍기는 젊은 여성이 우리 쪽을 돌아보며 미소를 지었다.


“앉아. 차나 한 잔 들지.”


그녀는 유디스였다.


우리는 집무 공간 한쪽에 마련된 테이블에 앉아 차를 마시기 시작했다. 물론 실제로 차를 한 모금이라도 들이켠 것은 유디스뿐이었고, 나와 해리는 의미 없이 잔을 들었다 놓았다만을 반복하긴 했지만.

유디스는 처음 보는 사람에게도 금세 호감을 살 법한 인물이었다. 솔직히 말해 다른 나라의 지도자가 아니라 그저 같은 생활 반경을 공유하는 수많은 사람 중 하나로 만났더라면 그녀를 친구로 삼고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녀를 앞에 두고 그녀가 묻는 시시콜콜한 질문에 꼬박꼬박 답을 하면서도, 우리는 머릿속에서 살레에서부터 지니고 온 의문을 절대 지우지 않았다. 그녀는 왜 우리를 돕는 걸까. 그녀의 목적은 뭘까. 대가 없는 호의란 우리가 가정할 수 있는 선택지 중 가장 허무맹랑한 것이었다.


오는 길에 불편한 것은 없었는지, 라울스의 첫인상이 어땠는지 등을 묻던 유디스는 차를 한 모금 더 들이켜고는 에둘러 말하는 일 없이 직설적으로 말을 꺼냈다.


“독재국가에 발을 들이는 게 쉽지 않았을 텐데. 누군가 등을 떠밀었나?”


나는 고개를 저었다. “저희가 원해서 왔습니다.”


“오면서 무섭지는 않았어?” 유디스는 특유의 그 털털한 웃음을 터뜨렸다. 마치 살레에서 도는 라울스에 관한 무시무시한 이야기를 이미 모두 알고 있다는 듯이.


“전혀요. 오히려 처음 생각했던 것보다도 더 번듯하고 멋져서 저희가 잘못 알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어요.” 해리가 덧붙였다.


“잘못 알다니?”


“라울스가 폐쇄적인 독재국가라는 사실이요.”


“어어, 그건 제대로 알고 있는 게 맞아. 세간에서는 한 사람이 권력을 독점하고 나라를 입맛대로 다루는 걸 독재라고 하지 않나?”


“하지만 독재국가라기엔 모든 게 너무나 잘 돌아가고 있던데요. 잠깐밖에 보진 못했지만 거리엔 멋진 상점이 즐비하고, 차도와 트램 로드도 굉장히 깔끔하게 정비되어 있고, 사람들도 행복해 보이고.”


“당연하지, 내가 그렇게 했으니까. 나는 나라가 이상하게 돌아가는 꼴은 못 봐.”


우리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던 유디스가 다시 한 번 웃었다.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인데, 묻고 싶은 게 있으면 물어도 돼.”


나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어째서 본인만을 위하지 않으세요?”


언뜻 무례할 수도 있는 질문이었지만 유디스는 새삼스럽지 않다는 듯 대꾸했다.


“내가 그러고 싶으니까.”


본론 이전의 맛보기용 담소는 그렇게 싱겁게 끝났다.


“그래, 정부를 만나고 싶다고?”


“지도자든, 뭐든 좋습니다. 이왕이면 지도자였으면 좋겠고요.” 해리가 예의 바르게 답했다.


유디스는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고 의자에 깊숙이 기대어 앉았다.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던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지도자를 만나고 싶은 이유는 뭐지? 살레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국민이 지도자를 찾은 적이 없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비단 국민이 지도자를 찾지 않았을 뿐일까, 지도자 역시 국민을 찾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생각을 속으로만 삼킨 뒤 말을 꺼냈다.


“국가 차원에서 중재해야 할 일이 생겼습니다. 어떻게 보면 사고라고 할 수도 있고요.”


말을 꺼내면서도 내심 유디스가 그 상세한 내막에 관해 물으면 어떻게 해야 하는 고민이 앞섰다. 유디스에게 살레의 어느 부분까지 내보여도 괜찮을지에 관한 판단을 아직 미처 내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걱정이 무색하게, 유디스는 아무것도 캐묻지 않았다.


“그렇구나.” 그녀는 딱 이 말만 했다. 진중한 표정이 아니었다면 얼핏 심드렁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내가 알기로 살레의 지도자는 젊은 여성이야. 내 또래쯤 될까.”


나는 눈을 크게 홉떴다. 이윽고 몰려온 감정은 충격보다는 안심이라는 분류에 더 적합한 것이었다. 지도자가 있다니. 베일에 싸인 가상의 인물이 아니라 정말 살아 숨쉬는 사람이 우리의 지도자였다니. 적어도 없는 대상에 헛되이 매달리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에 순간 안도감이 찾아들며 온몸의 힘이 빠져나갔다.


“그분을 만나 보신 적이 있나요?” 해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럼. 상당히 호쾌하던데.” 유디스는 재미있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며 답했다.


“그분은 어디에 계신가요?” 이번에는 내가 물었다.


“모르지. 난들 아나? ‘야경국가’ 잖나.” 유디스가 다시 찻잔을 들어 찻물을 한 모금 들이켰다.


“대신 그녀에게 연락을 넣어 볼게, 라울스에서 정식으로 회담을 가졌으면 한다고 말이야. 답이 오는 대로 알려 주도록 하지.”


모든 일이 순조롭게 풀리고 있었다. 전혀 문제될 것 없다는 듯한 유디스의 말투에 어쩐지 평소보다 조금 더 용기를 내 봐도 좋을 것만 같다는 확신이 생겼다.


“하나 더 여쭤보고 싶은 게 있어요.”


유디스는 눈썹 한쪽을 치켜올렸다. 그건 무언가를 흥미로워하는 사람의 눈빛이었다.


“무엇을?”


“어째서 저희를 이렇게 도와주세요?”


어렵게 꺼낸 질문이었건만 유디스는 김이 샜다는 듯 피식 웃어 보였다.


“내가 그러고 싶으니까.”


청사 앞뜰까지 직접 나와 우리를 배웅하며 유디스는 이렇게 말했다. 원한다면 조금 더 머물다 가도 좋아. ‘그’ 살레에서 온 사람들이잖아! 좀처럼 보기 힘든 귀한 손님들이라 우리 국민들이 정말 신기해하더라고. 그리고 그 말을 입증이라도 해 보이듯 유디스는 청사 인근의 호화로운 호텔 객실 하나씩을 우리에게 내어주었다.

우리 역시 기꺼이 머물 의향이 있었다. 아직 혼돈의 한복판에서 벗어나지 못한 살레로 돌아가기가 조금 망설여지기도 했고, 생각보다 라울스가 더 좋기도 했고, 이곳에서 유디스와 함께 있어야 지도자를 만날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높아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의사와 무관하게 살레로 돌아갈 채비를 서둘러야만 했다. 우리 앞으로 살레에서 보낸 한 통의 편지가 도착했기 때문이다. 국가 단위의 우체국에서 직접 배달해 주는 편지를 받는 것은 상당히 이색적인 경험이었으나 그 내용은 결코 이색적이다 따위의 유쾌한 단어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이었다.


‘새미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지도 모른다’.


다음 날 아침이 되자마자 우리는 그 길로 라울스를 떠났다.






살레의 사람들은 따뜻한 마음으로 새미의 방을 찾았다. 무언가 흔적을 찾아내면 수사에 진척이 있지 않을까 싶어서였을 것이다. 새미의 죽음에 관한 진상을 밝혀 줄 국가가 없으니 직접 나서서 실마리를 찾고자 했을 것이다. 해리와 내가 살레에 도착했을 때 우리 집의 초록 대문은 활짝 열린 상태였다. 새미의 방문이야 말할 것도 없었다. 새미가 꼭꼭 슬픔을 감추어 두었던 개인적인 공간이 그 속살을 고스란히 내보이고 있는 것을 두 눈으로 확인하자 울화가 치밀었다. 살레의 사람들은 몰지각하게도 새미의 방을 뒤졌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몰지각한 행동 덕분에 새미가 지독한 우울증을 앓고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사람들은 새미가 우울증을 앓고 있었노라고 이야기했다.


나는 그야 당연하지 않냐며, 육 년을 만난 연인이 한순간에 예비 범죄자가 되어 마을에서 사라졌는데 이를 멀쩡한 정신으로 감당할 사람이 몇이나 되겠냐며 일갈했다. 새미는 한참 동안 우울과 싸우고 있었지만 우울을 이겨내고 다시 살아가려는 마음이 충분했다고,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고 본인 입으로 말했다고도 덧붙였다.

사람들은 새미의 일기장을 눈앞에 들이밀었다. 나조차도 생전 처음 보는 일기장이었다. 새미와 가장 가까운 건 나였고, 그 일기장을 살레에서 가장 마지막으로 확인하게 된 것 역시 나였다. 일기장 안에는 죽음에 이르는 온갖 방법을 정리한 메모 더미가 끼워져 있었고, 사람들은 그 메모 중 하나가 ‘총을 이용한 방법’이었다는 것을 근거로 새미가 자살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래, 자살이라고 치자, 그럼 등 뒤에 박혀 있던 총알은 어떻게 설명할 텐가? 새미의 방에서 나온 수많은 죽음의 방법 중 하나로 총이 있었다고 해서, 새미가 바닷가에 서 있는 자신의 등에 먼 거리에서 총알을 박을 수 있었다는 뜻이 되는 것은 아닌데도. 그러나 나와 생각을 같이하는 사람은 없었다.

새미가 예비 범죄자라는 가설 이후 다시금 나온 설득력 있는 주장에 사람들은 모두 매료된 것처럼 보였다. 이번에도 반대 패를 지닌 사람은 오직 나뿐이었다. 아, 해리도 내 말을 믿는 눈치였으니 두 명이었다. 사람들은 내가 새미의 자살을 믿지 않자 슬슬 한계에 도달한 것 같았다. 여전히 사람들의 말투는 나긋하고 부드러웠지만 누가 봐도 그들은 화를 꾹 억누르고 있었다. 모든 상황을 명료하게 만들어 버릴 수 있는 하나의 해답을 놔두고 다른 길로 자꾸만 돌아가니 내게 화가 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들은 나를 둘러싸고 새미가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만 했을 이유에 대해 한 마디씩 얹기 시작했다. 먼지 쌓인 도서관의 책 속에서나 보던 ‘성난 군중’을 여기서 보게 되다니. 그러나 책과 현실이 다른 점이 있다면, 책에서 그저 무수한 익명의 따옴표로 처리되었을 말은 현실에서 내가 너무도 잘 아는 사람들의 입을 타고 흘러나오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유진이 자주 들르던 빵집의 아저씨’가 말했다. 유진이 사라진 이후 새미가 집 바깥으로 한 발자국이라도 나오는 걸 못 봤어. 얼마나 우울했으면 그랬겠어.

‘자전거 가게 아들’이 말했다. 새미처럼 마음이 여린 아이는 한순간에 잘못된 선택을 하기도 쉽죠.

‘옆집에 사는 리나 아주머니’가 말했다. 인정하기 싫겠지만, 여기서 새미의 목숨을 앗아갈 만한 사람이 새미 말고는 없잖아?

‘이전에 우리 집에서 모종삽 하나를 빌려 갔던 이웃집 남자’가 말했다. 그래. 새미를 죽인 건 새미가 맞아.


사방에서 쏟아지는 확신에 해리는 참지 못하고 입을 열어 무어라 외치려 했다. 그 순간 나는 해리의 손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해리의 손바닥에 한 자 한 자 또렷이 적었다.


8시. 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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