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경국가 (2)

by 그린


새미가 죽은 다음 날, 모든 마을 사람들은 광장으로 모여들었다.

이 전례 없는 사고에 의해 그 어느 누구도 마음 놓고 홀로 돌아다닐 수 없는 신세가 되고 만 것이다.


우리 중에 살인범이 있다. 사람들은 이 섬뜩한 명제를 어떻게 해서든 희석시키기 위해 모두가 모두를 볼 수 있는 큰 장소에 함께 모여 있기로 결정했다. 본래 신변을 보호하려는 목적에서 만들어진 자리였지만, 사건의 진상을 밝히고자 하는 목소리가 터져 나오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대체 이게 어떻게 된 겁니까. 누구 아는 사람 있어요?”


처음으로 경험하는 ‘누군가 의도적으로 초래한 죽음’에 살레의 주민들은 한껏 예민해져 있는 상태였다. 누군가 말문을 트자 사방에서 두려움으로 점철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증발이 제때 일어나지 않은 거잖아요, 무슨 문제라도 생긴 걸까요, 한 남성이 물었다.

그러자 거기에 화답이라도 하듯 반대편에서 젊은 여자가 말했다. 칩에 이상이 생긴 건 아닐까요, 다들 칩이 잘 붙어 있는 거 맞죠? 칩이라는 단어가 나오기 무섭게 사람들은 양손을 들어 귀 뒤를 더듬었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칩이 잘 작동되고 있는지의 여부를 확인할 길은 없었다. 우리는 말하자면 인풋만 있고 아웃풋을 띄울 모니터가 없는 데스크톱의 본체에 불과했다. 아무리 키보드를 내리쳐 본들 제대로 입력이 되고 있는지 확인이 될 리가.


국가에 물어보는 게 좋겠어요. 어떻게 물어본단 말입니까? 우리가 이렇게 모여 있는데 무슨 조치라도 취해 주지 않을까요. 그럼 마땅한 대안도 없이 광장에서 밤을 새우자는 말입니까. 몇 날 며칠이고 이대로 서 있자는 소리예요? 그럼 어떻게 해요, 다른 방법이라도 있어요? 혼자 마음 놓고 돌아다닐 수 있다면 그렇게 하세요. 난 여기서 한 발자국도 못 움직여요.


살레 사람들의 말투는 여전히 온건하고 조곤조곤했지만 그 내용의 이면에는 제법 날이 서 있었다. 그때 불문율을 깨듯 잔뜩 격앙된 목소리가 한구석에서 우레와 같이 터져 나왔다.


“이건 국가의 붕괴요. 나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소.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지켜야 하오. 살인범으로부터. 그리고 그 망할 놈의 국가로부터.”


수백 쌍의 시선이 그에게로 메다꽂혔다.


국가를 찾아야겠다며 분연히 일어선 그는 모두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거침없는 걸음을 떼어 인근의 집 대문을 하나씩 열어젖히기 시작했다. 그러나 사람이 없는 빈집에서 정부를 찾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정부 청사도, 공공기관도, 하물며 경찰서도 없는 이곳에서 국가를 어떻게 찾을 것인가? 한없이 온화하던 사람들은 결국 한계에 다다랐는지 언성을 높이며 그를 말리기 시작했다. 남의 집 문은 대체 왜 엽니까? 당신 제정신입니까? 백날 찾아 봐요, 나라가 나오나. 국가가 물건입니까? 멀쩡한 남의 집 뒤지다 보면 나온다나?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달려들어 팔다리를 붙잡고 놓아 주지 않았으나 그의 목청 하나만큼은 누구도 결박하지 못했다.


“이거 놓으시오, 국가원수를 불러야 할 것 아니오?”


그러더니 그는 다시금 입을 열어 거대한 돌 하나를 던져 놓았다.


“내일까지 원수가 눈앞에 나타나지 않으면 나는 온 마을에 불을 질러서라도 그를 불러내고야 말 것이오.”


그의 말은 광장 한가운데에 던져져, 그 주위로 순식간에 거대한 파동을 일으켰다. 사람들은 그를 중심으로 이리저리 밀고 나아가며 목소리를 높였고, 광장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혼란의 한복판에서 나는 익숙한 얼굴을 발견했다. 새미가 자주 함께 놀아 주곤 했던 유진의 어린 여동생, 소나였다. 그 주변엔 소나의 아홉 살짜리 친구들이 여럿 무리를 지어 두려운 눈으로 주위를 살피고 있었다. 아이들이 보기에 썩 좋은 광경은 아니었기 때문에 나는 아이들을 데리고 조금 조용한 곳으로 잠시 피해 있으려 했다. 때마침 맞은편에 오랜 친구 해리가 보였다. 주위가 시끄러워서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기에 우리는 말을 나누는 대신 서로의 입모양을 읽어냈다. 어디로 가야 하지? 글쎄. 일단 조금 피해 있는 게 좋겠어. 그래도 혹시 모르니 너무 외진 곳으로는 말고. 잠시 생각하던 해리는 광장 한켠에 있는 창고 쪽으로 가 보자며 먼저 나서서 발걸음을 옮겼다.


작은 창고는 마을의 중심지 중에서 가장 변두리에 있는 곳이었다. 우리는 창고 뒤편으로 가 아이들의 수를 세고는 잠시 숨을 돌렸다. 저만치 광장 한가운데에선 여전히 서슬 퍼런 언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창고의 겉면은 다른 많은 담벼락과 마찬가지로 노란색 페인트로 칠해져 있었지만, 혼자 세월을 고스란히 맞은 듯 빛이 눈에 띄게 바래 있었다. 녹슨 자물쇠가 문에 매달려 있었고 문 사이 빈틈으로 낡아 빠진 빗자루의 손잡이가 삐죽 튀어나와 있었기 때문에 평소에는 아무도 그 창고를 열지 않았다. 다들 기껏해야 버려진 청소 도구 보관소쯤 되어 보이는 창고를 굳이 열 필요를 느끼지 못한 것이 분명했다. 물론 어디까지나 어른들에 한해서였다.


갑작스레 들려온 우당탕, 하는 소리에 나와 해리는 누가 뭐라 할 것 없이 동시에 창고 문 쪽으로 달려갔다. 아이들은 친구 중 하나가 자물쇠를 건드렸더니 자물쇠가 바닥으로 떨어져 버렸다고 입을 모아 말했다.

문이 살짝 벌어지며 아슬아슬하게 튀어나와 있던 빗자루가 바깥으로 툭 떨어졌다. 나는 빗자루를 주워 들고 도로 돌려놓기 위해 창고의 문을 천천히 밀어 열었다. 삐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나무 문이 열리자 안쪽에서부터 뿌연 먼지가 피어올랐다. 문에 손을 가져다 대는 순간까지만 해도 스위치가 어디에 있을지를 미리 생각하고 있었지만, 막상 문을 열고 나자 그것은 무의미한 걱정이 되어 버렸다. 창고 안에는 이미 불이 환하게 밝혀져 있었다.


“세상에.”


내 뒤를 따라 들어온 해리는 창고 안의 모습을 보고 짧은 한 마디만을 남겼다. 한동안 우리의 시선은 바쁘게 오갔다. 아주 잠깐 아이들을 들어오지 못하게 막아야 한다는 생각이 스쳤지만, 마찬가지로 그것도 무의미한 걱정이 되어 버렸다. 맨 끝에 서 있던 아이는 곧장 바깥으로 뛰어나가 온 마을에 들릴 정도로 고래고래 외쳤다.


“여기 이상한 그림이 잔뜩 있어요!”


그래, 정말 이상한 그림이 잔뜩 있었다. 사면의 벽을 가득 메운 무수히 많은 모니터들. 각 모니터 하단마다 작은 LED 전구가 달려 있었고 그 아래에는 작은 글자로 사람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모니터들 위에는 저마다 모양이 똑같지만 채색된 바가 다른, 모니터의 수만큼이나 무수히 많은 뇌들이 띄워져 있었다. 뇌, 뇌, 뇌, 이쪽을 봐도 뇌, 저쪽을 봐도 뇌, 천장을 봐도 뇌. 바닥이 뇌로 뒤덮여 있지 않은 게 그나마 다행인 수준이었다.


그 뇌들은 저마다 다른 색과 다른 모양을 한 채 빛나고 있었다. 마치 온도 측정기로 사람을 찍었을 때처럼, 같은 뇌 안에서도 무수히 다른 색의 픽셀이 보였다. 살레에서 이것을 제대로 읽어낼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나뿐일 것이었다. 이건 뇌의 지도였다. 살레 사람들의 뇌.


개중 유일하게 까만 화면을 띄우고 있는 모니터에는 너무나 익숙한 이름이 적혀 있었다.


LED 전구 중 하나가 일순간 반짝였다. 몇 번 노란색으로 깜빡이던 그 전구에는 이윽고 맑고 예쁜 초록 불이 들어왔다. 소식을 들은 사람들이 창고 앞으로 몰려들고, 문제의 그 남자마저 창고로 들이닥쳐 이게 다 뭐냐고 언성을 높이고, 사람들이 길길이 날뛰는 그를 자택에 억지로 데려다 놓은 뒤 차라리 각자 집에서 문을 걸어잠그고 있는 것이 낫겠다며 흩어질 때까지도 그 초록 불은 꺼질 줄을 몰랐다. 나는 고개를 들어 전구에 불이 들어온 모니터의 뇌를 읽었다. 무언가 다짐하고 있는 듯한 뇌. 전두엽과 편도체 인근이 유달리 새빨개져 있었다.

다음날 그 남자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국가는 여전히 건재했다.


남자는 자신의 증발로써 마지막까지 살레에 큰 돌을 던져 놓고 갔다. 이 돌은 어젯밤 그가 던졌던 그 어떤 말보다도 더 격렬한 파도를 일으켰다. 국가는 붕괴하지 않았다. 불을 지르겠다고 한 남자는 증발했다. 범죄를 막는 야경국가의 책무는 여전히 잘 수행되고 있는 중이었다. 그렇다면 새미의 죽음은 대체 뭘까? 누가 그 애의 등에 총알을 박아넣었는가?


처음에는 사고사가 아닌가 하는 의문이 곳곳에서 제기되었다. 그러나 살레에서 집에 총기류를 구비하고 있는 사람이 애초에 많지 않을뿐더러, 구태여 총을 가지고 무언가를 할 일이 있겠느냐는 지적이 잇따랐다. 차라리 처음부터 새미를 노리고 의도적으로 방아쇠를 당긴 것이라면 모를까.

그러나 분명히 범죄인 것처럼 보이는 정황이 상황을 더 불분명하게 만들고 있었다. 어째서 국가는 새미를 향한 범죄를 막지 않은 것일까. 그때 앞뒤를 생각하지 않고 일단 입 밖으로 말을 꺼내고 보는 성정의 남학생 하나가 이런 말을 내뱉었다가, 뒤늦게 나의 눈치를 보았다.


“대체 왜 막지 않았을까요? 새미는 죽어도 된다 뭐 이런 건가요?”


모두가 눈빛으로 그를 질타했다. 그 남학생은 머쓱하게 고개를 숙여 사과하고는 슬그머니 뒤로 물러났다. 그러나 그가 남긴 말은 엉킬 대로 엉켜 버린 실타래 같은 사람들의 생각을 단번에 툭 잘라내는 힘이 있었다. 새미는 죽어도 된다, 어쩌면 정말 그랬을지도 모르지. 서로의 머릿속에 뭉게뭉게 같은 생각이 피어오르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할 만큼 아둔한 사람은 이곳에 없었다. 오랜 침묵과 의미 없이 겉도는 말들이 거듭 반복된 후에야 누군가 ‘총대를 메고’ 무거운 이야기를 꺼냈다.


“혹시 새미가 예비 범죄자였던 것은 아닐까요.”


폭탄 같은 말에 그 누구도 쉽사리 긍정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동시에 그 누구도 부정하지 않았다.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 같은 이 상황의 부조리함을 명쾌하게 설명해 주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새미가 범죄를 저지를 예정이었기 때문에 국가가 미리 ‘처단’한 것이고, 그 비인간적인 과정을 최초로 들킨 것이 아니겠느냐 하는 의견이 나왔다. 어젯밤 사라진 그 남자도 같은 방식으로 죽지 않았겠느냐며. 거기에 나는 아무런 대꾸도 할 수 없었다. 내가 지닌 유일한 패는 새미는 그럴 아이가 아니에요, 라는 말뿐이었다. 내가 그 말을 입 밖으로 낸다면, 그럼 유진은 그럴 사람처럼 보였느냐 하는 질문이 역으로 날아들 것이었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패였다.


그러나 나는 그 패에 온 마음과 정신과, 그 밖에 나의 비물질적인 요소를 표현할 수 있는 단어란 단어는 모두 걸고 싶었다. 새미는 그럴 아이가 아니었다. 자신의 슬픔 하나조차 남에게 걱정을 끼칠까 그 좁디좁은 방 안에 꽁꽁 가두고 절대 내보이지 않던 아이가 범죄라고? 나는 이미 두 가지를 확신하고 있었다. 첫째는 새미가 차라리 자신을 해치면 해쳤지 절대 남을 해치지는 못할 것이라는 사실. 그리고 둘째는, 새미는 아무리 힘들어도 종국엔 겁이 나고 무서워서 자신을 해치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 결국 그 애가 해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새미의 NRF 시그널을 해석하면 분명 innocent라는 단어가 나올 것이다. 그러나 이를 입증할 방법은 없었다.

그 애의 뇌가 떠 있어야 할 모니터는 이미 꺼져 버렸으니까.


그리하여 나는 그 남자가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말로써 사람들 사이에 큰 돌을 던졌다.


“다른 나라에 도움을 청해 보죠.”


야경국가의 두 가지 책무는 치안과 외교다. 그러니 보이지 않는 우리의 정부를 불러낼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였다. 다른 나라가 공식적으로 정부에 연락을 취하는 것. 우리는 다른 초주연합에 ‘살레 정부와의 면담을 요청할 수 있는지’ 부탁하는 서신을 보내기로 했다.


살레의 민간 우편 사업을 담당하는 노인이 이를 수합했고, 혹시나 싶어 장만은 해 두었지만 지금껏 단 한 번도 쓸 일이 없었던 ‘국제 우편용 드론’을 네 번에 걸쳐 조종했다. 마지막 서신까지 전달된 후에야 사람들은 그나마 무언가 진척이 있었다는 안도감에 발을 뻗고 잘 수 있었다. 그렇게 한동안 살레의 사람들은 표면적으로 괜찮아 보이는 듯한 생활을 이어 나갔다. 평소처럼 아침에 일어나 일터로 나가고, 주위 사람들과 어울리고, 시간이 날 때 취미생활을 즐기다 저녁이 되면 따뜻한 집으로 돌아가는 일상.


그러나 당연하게도 내면까지 평온한 사람은 없었다. 우리를 지탱하던 약속이 깨졌으므로. 우리가 발을 딛고 있던 지반에 금이 가기 시작했으므로. 언제든 범죄의 표적이 되어도 이상하지 않고, 다른 사람이 언제든 아무 이유 없이 나를 해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은 참으로 힘겨운 일이었다. 어쩌면 이것이 살레 바깥의 사람들이 평소에 느끼는 기분일까. 그들은 어떻게 삶을 영위하는 걸까, 언제 어디서 누군가 나를 해칠지 모르는 위험을 한가득 안고서? 이 연약하기 짝이 없는 생활을 무슨 수로 멀쩡히?


며칠이 지나자 답신이 하나둘씩 오기 시작했다. 우편 사업을 담당하는 노인은 모두를 광장에 불러모은 뒤 다른 초주연합에서 온 편지를 하나씩 읽어내려갔다.


우리가 가장 큰 기대를 걸고 있던 선진 민주주의 초주연합 에이덤에서 온 편지는 상냥한 거절이었다. 에이덤의 정부는 오직 자국을 위해서만 움직이며, 타국의 국민을 위해 움직일 여력은 없음에 미리 사과한다는 내용이었다. 덧붙여 난민 신청을 한 뒤 그것이 받아들여진다면 에이덤은 얼마든지 ‘자국 국민’을 위해 나설 수 있다는 말도 함께.


두 번째 초주연합인 리카르도와 세 번째 초주연합인 로베르에서도 마찬가지로 거절의 답신이 왔다. 그들은 에이덤보다 간결하고 에이덤보다 단호하게 ‘우리나라에서는 살레의 정부와 굳이 접촉할 이유가 없다’는 의사를 밝혔다. 이미 예상했던 결과였다. 답장이 제대로 온 것만 해도 고마운 수준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었다.

아직 한 초주연합에서는 답신이 오지 않았지만, 사람들은 외교권을 행사해 정부에 도움을 청하겠다는 생각을 일찌감치 버리기 시작했다. 마지막 남은 초주연합 라울스는 독재국가였다. 단 한 사람의 지도자가 국가의 모든 것을 움켜쥐고 오직 그 자신의 뜻대로 국정을 이끄는 독재국가. 비록 단 한 번도 제대로 된 교류를 한 적은 없었으나 살레 안에서 라울스의 평가는 ‘A.S 이후 도래한 유일한 독재국가’, ‘지구상에 마지막으로 남은 디스토피아’처럼 박하기 그지없었다. 그래서 라울스에서 답신이 왔을 때 사람들은 몹시 놀랐고, 그 답신의 내용이 군더더기 하나 없이 깔끔한 긍정이라는 것을 확인했을 때 사람들은 두 번째로 놀랐다.


지도자와 만날 수 있게 돕겠습니다. 자세한 사항은 만나서 듣도록 하지요. 유디스 A.


유디스는 라울스 최고 지도자의 이름이었다. 처음에는 모두가 그것이 위조된 문서는 아닌지, 누군가 라울스의 지도자를 사칭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했다. 그러나 서명은 명확했고 편지지에 특수한 잉크로 인쇄된 라울스의 상징은 명증했다. 그러나 뜻밖의 수확에 기뻐할 새도 없이 누군가 또 다른 문제점을 제기했다.


"알다시피 다른 초주연합과 변변찮은 교류가 없었던 우리가 아닙니까, 살레에는 공항이나 항구가 없잖아요. 무슨 수로 우리가 라울스의 지도자를 만납니까?"


과연 그 말에는 틀림이 없었다. ‘저희를 도와주세요. 그런데 저희는 움직일 수 없는 몸이니 직접 비행기를 보내 주시어 저희를 데려가 주셔야 합니다.’라는 염치없다 못해 얼토당토않기까지 한 부탁을 들어 줄 나라가 어디 있겠는가. 그리하여 우편 사업을 담당하는 노인은, 우리에겐 변변찮은 이동 수단이 없습니다, 라는 다소 침울한 내용이 담긴 편지를 다시금 운송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상태로 다시 평온한 체하는 며칠이 지났다.


경비행기를 지원해 줄 테니 타고 오세요, 유디스 A.


라울스에서 돌아온 답신은 이전보다 훨씬 더 놀랍고 간결했다.


무언가를 요구하는 말도, 별도로 달린 조건도 없었다. 그 시원하기 이를 데 없는 답장은 오히려 많은 사람들을 의심에 빠뜨렸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선뜻 도와주겠다고 나서니 뭔가 찜찜한데요. 누군가 가장 온건한 표현으로 걱정을 내비치자 사람들의 온갖 추측이 조금 더 노골적인 언어로 그 뒤를 이었다. 분명 무슨 꿍꿍이가 있는 게 틀림없어요, 우리 중 누군가가 발을 들이면 곧장 억류하고 뭔가 요구할 심산은 아닐까요, 아니면 살레의 비밀을 캐려는 수작일 수도 있어요, 어쩌면 다시는 그곳에서 나오게 될 수 없을지도 몰라요. 수많은 말들이 광장 한복판에서 끓어오르자 나는 때를 보았다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제가 갈게요.”


예상했던 대로 좌중은 조용해졌다. 그렇겠지, 아무도 쉽사리 말을 얹을 수 없을 것이었다. 상황을 타개하려면 누군가는 저 수상쩍은 경비행기에 올라야 한다는 것을 모든 사람이 알고 있었고, 그럼에도 누군가더러 네가 가라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꺼낼 수 있을 만큼 대담한 사람은 아직까지는 없었다. 굳이 꼽자면 온 도시에 불을 지르겠다고 선포한 그 남자 정도가 마지막이었을까.


나는 다시금 입을 열어 못을 박았다.


“제가 갈게요. 저는 동생이 죽고 그 범인이 아직 잡히지 않은 상태인 이곳에 계속 머무는 것보다 차라리 다른 초주연합으로 나가서 도움을 갈구하는 편이 더 마음이 편해요.”


합리적인 이유를 제시해 주자 그제야 사람들의 얼굴에 안도하는 빛이 돌았다. 모두가 걱정하는 말 반, 조심히 다녀오라는 말 반을 적절히 섞어 앞다투어 내게 건넸다. 나는 옅은 미소를 지은 채 그들을 조용히 바라보기만 했다. 어쩐지 방문을 열고 나오는 매 순간마다 입가에 새로운 미소를 걸고 있던 새미의 마음을 알 것도 같았다. 입꼬리를 끌어올리는 건 남들을 안심시키기 위해서, 내게 별일이 없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보다는 그저 상황이 예측하지 않은 방향으로 튀어나가는 것을 감당할 기력이 없어 모든 것이 이대로 무난하게 지나갔으면 하고 비는 바람에 가까웠다. 새미의 기분은 새미만이 알았겠지만 적어도 나의 기분은 그랬다. 이대로 무난하게.


살레에서 내게 잘 다녀오라는 말을 건네지 않은 사람은 오직 한 명이 유일했다. 해리였다. 그 애는 잘 다녀오라는 말 대신 자신도 같이 가고 싶다는 말을 꺼냈다. 물론 그것을 말릴 만큼 대담한 사람 역시 살레에는 없었다.


그래서 나와 해리는 살레의 역사상 처음으로 다른 초주연합으로 보내지게 되었다. 자국에서는 닿을 수 없는 자국의 정부를 만나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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