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체성에 대하여,
나 자신보다 나를 잘 아는 사람은 없다.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나를 잘 아는 사람이라 할 지 라도 내가 혼자 집에 있을 때 무엇을 하는지, 내가 그를 진정으로 어떻게 생각하는지까지는 알 길이 없다.
하지만 여기서 드는 의문 한가지.
여기서 말하는 '나'는 내 존재 그 자체인가 혹은 타인이 인식하고 있는 나의 모습인가.
Peter Bichsel 'Ein Tisch ist ein Tisch.'
'책상은 책상이다.', 페터빅셀
언어의 사회성에 대한 내용이 담긴 책으로 한 남자가 세상과 약속한 단어대로 사물을 부르지않고 본인이 임의로 정한 규칙대로 사물을 지칭하다 결국 타인과 소통하지 못하게 된다는 이야기이다. (이야기 속 주인공은 예를 들어 책상을 의자로, 멋있다를 맛있다로 바꿔 부르며 책상이 멋있다를 의자가 맛있다로 말한다.) 지금부터 이야기 할 내용은 언어와는 상관이 적지만 사회와의 정의 면에서 관련이 있다.
책상은 책상이 아니다. 무언가를 올려두거나 어떠한 작업을 보다 편하게 하기 위해 평평한 판을 사용 목적에 따라 다리와 같은 구조물로 받춰놓은 물체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를 책상이라고 부르기로 약속하였고 이제 책상이 단순히 단어가 아닌 어떠한 개념으로 머릿속에 자리잡혀져 있다. 이처럼 나라는 사람 또한 이름을 빌려 사람들에게 어떠한 개념으로 잡혀있을 것이고 심지어 이름이 바뀐다 하더라고 그 개념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이 시점에서 앞서 가진 의문을 다시 가져와 본다면,
여기서 말하는 '나'는 내 존재 그 자체인가 혹은 타인이 인식하고 있는 나의 모습인가.
무언가를 올려두거나 어떠한 작업을 보다 편하게 하기 위해 평평한 판을 사용 목적에 따라 다리와 같은 구조물로 받춰놓은 물체를 책상이라 인식하는 것처럼 나 또한 그들이 인식하고 있는 나의 모습으로 그들에게 정의되어 있을 것이다. 여기서 문제점은 책상은 우리가 그들을 어떤 것으로 인식하든 상관하지 않는 무사고의 물체이지만, 나라는 존재는 사고를 가진 자기주체적 존재라는 것이다.
이 때문에 때때로 스스로 생각하는 나와 타인이 바라보는 나의 모습 간에 큰 차이가 있음을 인지하게 될 때 나라는 존재 자체에 대한 인지부조화가 일어난다. 인간은 인지 간의 불일치에 상당한 불편함을 느끼는데 심지어 그 대상이 본인의 존재 자체라면 정도에 따라 불편함이라는 감정을 넘어서게 된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사회적 동물인 인간은 크든 작든 이와 같은 경험을 겪을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이러한 인지부조화를 해결(혹은 회피)하기 위해 두 가지 방안 중 선택을 하게 된다.
'타인이 인지하고 있는 본인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과 '스스로 인지하고 있는 본인의 모습으로 나를 바라보는 사람들을 만나는 것'
경우에 따라 선택적이거나 그 정도의 차이는 누구에게나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위와 같은 방법으로 이를 해결하려 한다.
첫째로, 타인이 인지하고 있는 본인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방법을 주로 택하는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소리를 자주 듣는다.
사회성이 좋다
센스있다
성격이 좋다
너는 나랑 정말 잘 맞는 것 같다
이와 같은 말만 들으면 모든 사람과 잘 지낼 것 같지만 그렇지도 않다. 왜냐하면 치명적인 단점이 있기 때문이다. 어느 정신과 의사가 말하길, 인간의 마음은 몸과 같아서 너무 많이 사용하면 닳고 무리가 가며 가용범위가 정해져 있어 한계가 온다고 한다. 쉽게 말해 위와 같은 타입의 방법은 마음이 지치게 되고 그럴 때마다 요령이 없어 오히려 과한 대처로 인간관계에 지장이 생기거나 스스로 상처받는다.
둘째, 스스로 인지하고 있는 본인의 모습으로 나를 바라보는 사람들만 만나는 것.
표현이 다소 극단적으로 들릴 지도 모르겠지만,
"너 싫다는 사람 굳이 만날 필요 없어."
사실 누구나 흔히 사용하는 방법이다. 이러한 방법을 주로 사용하는 이들은 소수의 사람들과 깊은 관계를 맺고 더 많은 감정을 공유하며 감정 노동이 필요한 만남의 빈도가 적다. 하지만 이 방식을 과하게 고집하게 되면 본인에 대한 객관성을 잃어버린다. 스스로 이렇다 생각하고 그 부분에 동의하거나 이해하는 사람만이 주위에 남아있기 때문에 제 3자의 시선에 강한 거부감이 느껴질 수가 있다.
그렇다면 '나'의 기준은 내 존재 그자체일까, 타인이 바라보는 나의 모습일까.
상이한 두 개념 사이에서 부조화가 일어나면 이를 어떻게 극복해야 할까.
최근 몇 년 들어 많은 이들이 알게 된 '멀티 페르소나'에 대한 개념은 생각보다 먼 옛날부터 존재해왔다. 한 여성을 예로 들면 그녀는 누군가의 딸이자 어머니이자 친구이며, 직장에서는 능력 있는 팀장님이, 옆집 아이에겐 친근한 이웃집 아줌마가 된다. 관계에 따라 나의 모습은 달라질 수밖에 없다. 누구나 본인과 좋은 관계의 무리가 있으면서 동시에 나를 유독 싫어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성향 등의 차이도 있겠지만 이해관계에 따라 개개인별로 저마다 다른 포지션을 취하게 된다. 따라서 누구에게나 그저 같은 모습으로 머무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때문에 더더욱 내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한 확실한 인지와 철학이 필요하다. 나는 때때로 현재 관계를 맺고 있는 이들에게 각각 내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 나름의 정의를 둔다. 동시에 아무와도 관계 맺지 않은 나는 어떤 사람인지에 대한 정의까지 함께 정리한다. 다소 피곤한 과정일 수도 있지만 종종 내가 모르는 나의 모습을 알게 되었을 때 드는 불쾌함을 겪는 것보다 자기 전에 투자하는 5분 정도의 시간이 훨씬 낫다. 불쾌함만이 아니라 이와 같은 생각 정리는 자기 객관화, 자기반성에도 좋다. 괜스레 센치해지는 늦은 밤이나 여유로운 주말쯤에 주변 사람들에게 나는 어떤 사람인지 무리를 구분 지어 생각해 보자. 시간이 조금 남는다면 그래서 나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도 생각해 보면 더할 나위 없다.
잊을만할 때 되짚어보는 나의 존재에 대한 생각은 조금 더 나은 어른으로 만들어 줄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이 든다.
위 글은 처음이라 모든 것이 낯설고 어려운 현생 1회 차 한 20대 청년이 기록하는 일, 사람, 환경 등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누군가에게는 유용한 정보가 또 다른 이에게는 공감이 또 다른 이에게는 지난날에 대한 위로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청춘기록 #청춘을글이다 #日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