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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는 게 일, 사는 게 일

사는 건 대단한 게 아니라 매일 밥 해 먹는 일

by K 엔젤

냄비 밥과 룸메의 조언

오늘은 밥통 없이 밥을 지어보기로 했다. 냄비를 꺼내 씻고 쌀을 불리고 있는데, 같이 사는 한국인 룸메가 지나가다 나를 보고 말했다.

“줄리 밥통 써도 돼요. 에어프라이어랑 밥통은 줄리 건데, 걔 주 6일 일하거든요. 없을 땐 쓰라고 했어요.”

줄리는 베트남에서 온 룸메다. 룸메 언니의 제안이 고마웠지만 나는 웃으며 말했다.
“괜찮아요. 그냥 제 냄비로 해보려고요. 감사합니다.”

알고 보니 집주인 아주머니가 이 언니에게 밥통을 가져다준다고 했는데, 결국 밥통 대신 돌솥 냄비가 도착했던 모양이다. 그래서인지 룸메 언니는 담담하게 덧붙였다.
“돌솥도 밥 잘 돼요. 줄리가 준 건데 써도 돼요.”

나는 다시 한 번 감사하다고 하고 냄비 밥 짓기에 도전했다. 소리도, 냄새도 낯선 이 부엌에서 냄비에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소리는 이상하게 익숙했다.

룸메 언니는 이 집에 7월부터 살았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이 집의 공기나 사람들 성향을 나보다 훨씬 잘 알고 있었다. 사마야라는 아프가니스탄 룸메는 밥을 지을 때 한 번에 11인분을 한다며,

“사마야 오기 전에 밥 해두는 게 좋아요. 걔는 오래 걸리거든요.”라고 웃으며 조언해줬다.

짧은 대화였지만, 낯선 집에서 이런 소소한 정보는 이상하게 든든하다.


냄비밥과 참치볶음밥의 작은 위로
냄비 뚜껑을 열자 뜨거운 김과 함께 익숙한 밥 냄새가 퍼졌다.


타지에서의 첫 냄비 밥은, 그렇게 룸메의 조언과 함께 시작됐다.

주걱으로 밥을 뒤적이는 게 조금 번거롭긴 했지만, 물양만 잘 맞추면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십 분 남짓, 냄비에서 밥이 완성됐다. 타지의 작은 부엌에서 밥 냄새가 퍼지니 잠시 집 같은 기분이 들었다.

냄비밥을 해보니 냉동밥이 있으면 참 쓸모가 많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밥통이 꼭 필요할까 고민했는데, 오히려 한 번에 넉넉히 밥을 지어두고 오래 보관하는 게 더 편하겠다는 생각으로 기울었다. 작은 냄비와 큰 밥통 사이에서의 선택은 결국 ‘내일을 얼마나 준비할 수 있는가’의 문제 같았다.


오늘 저녁은 그렇게 만들어진 참치볶음밥이었다. 참치에 당근과 계란, 토마토, 양배추를 넣고 후추를 툭툭 뿌려 볶았다. 한 숟갈 떠먹는 순간, 생각보다 맛이 괜찮았다. 별것 없는 식재료들이 모여 만들어낸 한 끼였지만, 타지에서 이런 소소한 밥상은 묘하게 든든하다. 냄비에 남은 밥알을 보며 잠깐 그런 생각이 들었다. ‘살아간다는 건 어쩌면 이런 작은 밥 냄새를 이어가는 일일지도.'


먹고사니즘의 기술

“오늘은 뭐 해 먹지?” 하루가 시작되기도 전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질문이다.

마늘과 당근을 최대한 많이 손질해 오늘 만든 밥과 함께 냉동고에 넣어두었다. 한동안은 이걸로 버틸 수 있겠지. 하지만 이렇게 밥과 재료를 보관하다 보니 컨테이너가 부족하다는 걸 깨달았다. 다음번에는 몇 개 더 사야겠다.

먹고사니즘. 누구나 죽을 때까지 안고 가는 숙제다. 매일 하는 요리는 결국 귀찮을 수밖에 없고, 귀찮아지면 그 순간부터 일이 된다. 하지만 생각을 조금만 바꾸면 어떨까. 이건 누군가를 위해서가 아니라, 내 몸을 위한 일.

귀찮음을 피할 수 없다면 최소한 가볍게, 즐겁게. 매일의 먹고사니즘을 조금 더 편하게 해결하는 방법을 찾는 건 어쩌면 타지에서 살아남는 또 다른 기술일지 모른다. 작은 냄비와 손질한 마늘이 가르쳐주는 건, 사는 건 결국 이런 사소한 준비들의 연속이라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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