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은 좁아도 도시는 넓다. 돈은… 얇다.
밴쿠버까지 와서 방 안에만 있으려니 몸이 근질근질했다. 며칠 동안은 짐 정리와 적응으로 시간을 보냈지만, 곧 다시 확인한다. 나는 집에만 오래 붙어 있으면 숨이 막히는 성격이다.
운동을 마친 뒤, 며칠 전 걸었던 길과는 반대 방향으로 발길을 돌렸다. 버스 정류장 쪽으로 향하는 길, 작은 가게들과 식당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베트남 쌀국숫집, 한국 식당, 중동 음식점, 일본 음식점. 짧은 거리 안에서 각 나라의 냄새가 겹겹이 풍겼다. 공기 속에 스민 국물 냄새와 향신료의 잔향이 마치 이 동네의 지도를 그려주는 것 같았다.
그중에서도 ‘International Market’이라는 간판이 눈에 띄었다. 이름부터 괜히 호기심을 자극했다. 문을 밀고 들어서자, 공기부터 달라졌다. 선반마다 낯선 글자가 적힌 포장지와 향신료 냄새가 겹겹이 깔려 있었다. 중동과 인도 쪽의 식자재들이 눈에 가장 먼저 들어왔다. 익숙한 듯 낯선, 이주민들의 생활 냄새와 색깔이 층층이 쌓여 있는 공간이었다.
계산대 뒤에는 중동에서 온 듯한 아주머니가 앉아 있었다. 가게 이름은 거창하게 International인데, 둘러봐도 아시안 식재료는 잘 보이지 않았다. 궁금증을 못 참고 웃으며 말을 걸었다.
“이 동네는 인도나 중동 음식이 많나 봐요?”
아주머니는 손을 멈추지 않고 계산기를 두드리며 담담하게 대답했다.
“다 팔아요. 아시안 것도 원하면 주문하면 돼요.”
그 한마디에, 이 가게가 동네의 작은 ‘국경 없는 시장’이라는 걸 그제야 알 것 같았다.
가게를 나와 한 블록쯤 걸었을까. 1분 남짓한 거리에서 또 다른 식료품 가게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큼지막하게 적힌 ‘Buy Low Foods’. 어제 갔던 Save On과 가격대는 비슷했지만, 안으로 들어서자 분위기가 확연히 달랐다. 더 소박하고, 동네 사람들의 발자국이 묻은 공간 같았다. 진열대도 화려하게 꾸민 게 아니라 꼭 필요한 것들만 담백하게 놓여 있었다.
그 옆에는 작은 Tommy's Market이 있었다. 중국인 부부가 운영하는 듯한 가게. 문을 열자 찰칵하고 종소리가 울렸고, 안에서는 부부가 계산대와 진열대를 오가며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괜히 발걸음이 느려졌다. ‘뭐 어때.’ 잠깐 가격을 비교해 봤지만, Save On이나 Buy Low Food나 여기나 솔직히 별 차이 없었다.
그냥 지나치기엔 뭔가 아쉬웠다. 빈 장바구니가 괜히 허전해 보여 두부 한 모, 당근 몇 개, 그리고 마늘 한 줌을 담았다. 손끝에 전해지는 묵직한 감촉이 이상하게 기분 좋았다. 계산을 마치고 다시 걸음을 옮기는데, 이 동네 공기를 조금 더 깊게 들이마신 기분이 들었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우유에 시리얼을 부어 간단히 허기를 달랬다. 씹는 소리가 사라지기도 전에 노트북을 챙기고 가방 한쪽에 녹차가 담긴 텀블러를 넣었다. 손에 들린 그 작은 무게가 오늘 하루의 리듬을 살짝 조율해 주는 것 같았다.
역시 나는 집 안에 틀어박혀 있는 것보다 거리를 걸어 도서관으로 향하는 이 시간이 더 좋다. 발끝으로 바닥을 톡톡 두드리며 가는 길, 공기가 바뀌는 느낌이 있다. 도서관에 들어서 조용한 책장 사이에 자리를 잡으면 혼자라는 사실이 이상하게 덜 낯설어진다. 오히려 고요 속에서 다른 사람들의 숨소리와 책장 넘기는 소리가 살짝 섞일 때, 혼자가 아니라는 묘한 안도감이 스며든다.
이제는 버스를 타고 조금 더 멀리 나가볼까 싶다. 30분쯤 떨어진 다운타운. 낯선 거리와 사람들 틈에 나를 툭 던져 넣고 싶은 충동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아마 이런 걸 두고 흔히 ‘역마살’이라고 부르는 걸까. 같은 공간에 오래 머무르지 못하는 기질. 밴쿠버에 도착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또 길 위를 기웃거리고 있다. 어쩌면 이건 일시적인 기분이 아니라, 내 평생의 리듬 같은 걸지도 모른다. 어디에 발을 딛든 늘 조금은 떠날 준비를 하고 있는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