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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없는 유학생

독립은 자립의 다른 말, 그리고 가난의 시작

by K 엔젤
조용한 집에서 시작하는 작은 생활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부엌으로 향했다. 냉장고를 열어보니 어제 남은 햇반과 참치캔, 그리고 양배추가 있었다. 별다른 재료는 없었지만, 참치는 언제나 든든한 친구다. 햇반과 양배추를 후다닥 볶아 간단한 한 끼를 해결했다. 혼자 사는 집의 첫 아침치고는 꽤 알찬 시작이었다.


오후 2시쯤, 벨소리가 울렸다. 캐나다의 당근마켓 같은 마켓플레이스에서 연락한 한국인 아주머니가 스탠드 램프와 프라이팬, 냄비, 전기포트를 직접 집 앞까지 가져다주셨다. 덕분에 부엌이 조금 더 ‘살림집’ 같아졌다. 곧 밥통도 받을 예정이다. 이렇게 하나씩 필요한 물건들이 채워지는 걸 보니, 아직 낯선 집이 조금씩 내 공간이 되어가는 기분이다.


BC 주 운전면허증으로 바꾸기 위해 예약도 했다. 어차피 온타리오주 면허증은 이제 쓸 일이 없으니 미련은 없다. 9월 3일 오전 11시 50분, 예약 완료. 여기서는 예약 없이는 업무를 아예 볼 수 없다는 사실이 새삼 캐나다의 ‘절차의 나라’ 이미지를 실감하게 했다.


4시쯤에는 신용카드 문제를 해결하러 RBC 은행에 갔다. 온타리오에서 학교 다닐 때 학생비자로 발급받은 카드였는데, 졸업과 동시에 6월부터 사용이 중지된 상태였다. BC주에서는 워크퍼밋을 제출해야만 새 카드를 발급해 준다 했다. 은행 직원은 내 계좌가 있는 온타리오 베리 지점으로 메일을 보내 승인받아야 한다고 했다. 새 카드는 집으로 배송되는데 2주에서 길게는 한 달. 캐나다에서 살려면 이 정도 불편함은 감수해야 하나 보다.

은행 바로 옆에 퍼블릭 라이브러리가 있었다. 구글맵으로 보던 것보다 가까워서 기분이 좋았다. 도서관에서 두 시간쯤 앉아 책장을 넘겼다. 조용한 공간에서 책 냄새를 맡고 있으니, 이사로 어수선했던 마음이 조금 가라앉았다.

도서관 근처에는 버스 노선도 잘 되어 있었고, 맥도널드와 카페, 슈퍼마켓도 눈에 띄었다.


집에 돌아오는 길, Save On Foods에 들러 식료품을 샀다. 바나나, 시리얼, 아몬드 우유, 토마토, 땅콩버터, 식빵. 계산대에 찍힌 숫자는 28불. 베리에 있을 때보다 확실히 비싼 것 같았다. 아니면 내 돈이 직접 빠져나가는 게 체감돼서일까. 혼자 사는 사람의 장바구니는 이렇게 작아도 무겁다.


아빠가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에 내 손에 쥐여준 1070불이 생각났다. 안 받아도 된다고 했는데 끝내 넣어주고 가셨다. 미국 달러와 캐나다 돈이 섞인 그 봉투는 지금 내 짐가방 한쪽에 고이 자리 잡고 있다. 그 돈을 펼쳐보면서 새삼 느꼈다. 이제는 진짜 혼자다.


오랜만에 내 모든 돈을 다 꺼내어 계산해 봤다. 카드에 얼마가 남았는지, 동전 하나까지 세어가며 정확히 파악했다. 미국 달러는 따로 묶어 보관하고, 당장 쓸 캐나다 달러만 지갑에 넣었다. 카드도 다시 분류해 정리했다.

혼자 살면, 가장 먼저 배우는 건 경제관념이다. 돈은 버는 것보다 쓰는 게 더 어렵다는 어른들의 말이 떠올랐다. 한 푼 한 푼 아껴야 한다는 사실이 실감 났다. 앞으로는 절대 허투루 쓰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이 집에서, 이 첫날의 긴장감이 오래도록 내 소비 습관을 잡아주길 바라면서.

저녁으로 간단히 양배추와 계란을 볶아 누룽지와 함께 먹었다. 한 입 먹는 순간, 베리에서 매일같이 해 먹던 새우 요리가 생각났다. 씹는 맛이 없으니 뭔가 허전하다. 조만간 냉동 새우를 꼭 사야겠다.


밤이 되니, 조용한 집과 방이 주는 평화가 찾아왔다. 이 집은 내 집이 아니지만, 이상하게도 내 집 같은 기분이 든다. 리모델링을 마친 이 공간이 정말 내 집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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