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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행자 May 25. 2023

죽음에 대한 희망적 수용은 말처럼 쉽지 않다.

암진단을 받은 필리핀인 노동자

40대 필리핀인 여성은 90일 이상 장기체류 비자로 2010년 입국했다.

벌써 10년이 넘었다.

근로계약이 연장되지 않아 비자는 만료되었고 미등록 체류 중이다.


생산직에 근로하며 대략 170만 원의 소득 중 최소한의 생계비를 제외하고 본국에 있는 3명의 자녀에게 생활비를 보내고 있다.


이혼하여 남편에게는 도움을 기대할 수 없지만 자녀들은 장학금을 받을 정도로 학업성적이 우수하여 학비에 대한 지출은 적다고 한다.


수개월째 하혈이 지속하여 가까운 산부인과에서 진료받았고 암이 의심된다는 소견을 듣게 된다.


병원과 필리핀 공동체의 도움으로 1,500만 원에 이르는 수술비를 감당할 수 있었다.


암으로 인한 수술 후에는 항암치료와 방사선치료를 병행하게 된다.

하지만 환자는 비용 부담으로 방사선치료만 받았다.


25회의 방사선 치료는 종료되었지만, 항암치료를 받지 못한 것이 마음에 남아 항암치료 가능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진료를 받았다.


항암치료는 수술 후 최대한 빨리 진행하는 것이 효과적이고 내국인의 경우 방사선치료 후 항암치료를 하는 경우는 드물다고 한다.


수술과 방사선치료의 예후를 확인하기 위해 PET-CT 검사를 했다.


며칠 후 판독 결과 확인을 위해 환자와 통역인이 같이 진료실에 들어섰다.

혹여 의료적 사항에 대해 이해하지 못할 것을 우려하여 나도 함께 진료실에 들어갔다.

의사는 쉽게 말을 떼지 못하고 애꿎은 컴퓨터 마우스만 이리저리 굴린다.

판독 결과를 한참이나 들여다보는 동안 정적이 흐른다.  


"완치의 목적 보다 증상의 완화와 생명 연장의 목적으로 항암치료를 할 수 있습니다."

"처음 4~6회의 항암치료를 고려했으나 지금 상황에서는 항암치료의 횟수와 항암제도 달라집니다."

"성격이 좋지 않은 암으로 판단됩니다."


검사 전 생각했던 치료계획과 검사 후 치료계획이 완전히 달라졌다.


암세포는 몸 곳곳을 파고들었다.

우측 폐, 좌측 쇄골, 경추 4번, 흉추 11번, 요추 3~4번, 우측 갈비뼈 4~5번 등에서 전이암이 확인된다.

유독 심한 전이도 보인다고 한다.


불과 5개월 만에 이렇게 전이가 진행될 수 있는 건가?

나조차도 쉽게 이해하기 힘들었다.


진행이 빠른 암의 경우 항암치료의 효과도 장담할 수 없다고 한다.

말 그대로 '성격이 좋지 않은 암'이다.


통역인도 통역을 중단하고 의사의 말을 듣고만 있다.


의사와 통역인의 표정을 통해 환자는 심상치 않은 일이라는 것을 감지한 듯 긴장한 표정으로 의사의 얼굴만 뚫어져라 바라본다.


왜소한 체구의 필리핀인 여성은 한국에서 10년이 넘은 기간 동안 가족을 위해 돈을 벌었고 최소한의 생활을 하며 버텼다.

가족을 위해 기회를 찾고자 홀로 한국에 오게 되었다.

암 수술 후에도 직장을 잃게 될까 걱정했었다.


항암치료의 효과도 기대수명도 예상할 수 없다.

한국에 남아 치료를 받을지 가족의 곁으로 돌아갈지 결정해야 한다.


환자는 자녀들이 있는 필리핀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필리핀에서 치료받을 수 있는 병원을 수소문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완치는 기대할 수 없다.


그동안 가족들과 떨어져 지내야 했던 시간, 힘들게 생활했던 시간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갈 것이다.


환자가 잘못해서 생긴 병도 아닐뿐더러 한국에 있었다고 해서 생긴 병도 아니다.

수술 후 항암치료와 방사선치료를 제때 받았더라면 결과는 달라졌을까?

영문소견서와 약간의 진통제 처방을 받는다.


당분간은 자녀들에게 건강 상태를 알리지 못할 것이다.

차마 말하지 못할 것이다.


절망의 상황에서 죽음에 대한 희망적 수용은 말처럼 쉽지 않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지만 남겨질 자녀들을 걱정하며 자신을 탓하고 자책할 것이다.

아픈 몸보다 더 무거운 마음의 짐을 지고 남겨진 삶을 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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