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못 하겠어요."

80대 폐암환자의 딸

by 여행자

폐암과 만성질환으로 외래진료나 입원 치료가 잦다.

배우자는 치매로 장기 요양 서비스를 받고 있다.

환자도 치매가 있어 때때로 의사소통이 안 되고 요양원에서 생활하고 있다.


"인제 그만 죽었으면 좋겠어요."

"왜 이렇게 저를 괴롭히는지 모르겠어요."


남편과 사별 후 3명의 자녀를 양육하고 있는 딸은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하다.


"아무것도 안 했으면 좋겠어요."

"아무것도 못 하겠어요."

"이제 할 수 있는 것이 없어요."


간호사에게 호소하고 딸은 병원을 떠나겠다고 선언했다.

간호사는 다급히 사회복지팀에 의뢰했다.


더는 어찌할 수 없다는 무기력한 표정의 딸과 상담했다.

예민했고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은 표정이었다.


"환자와 가족을 돕기 위해 상담을 하고 있습니다."

"상담 내용 중 민감한 사항은 의사나 간호사 등 누구와도 공유하지 않습니다."

"다만 치료에 필요하다고 판단하는 내용은 공유할 수 있습니다."

"지금 상황을 정확하게 말씀해 주셔야 해결 방법을 찾을 수 있습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것 같던 딸은 격양된 목소리로 그동안의 울분을 쏟아냈다.


3남 2녀의 자녀가 있었지만, 두 명의 아들은 사망했고 나머지 아들과 딸은 연락조차 닿지 않는다.

첫째 딸이 모든 것을 감당하며 부모를 봉양하고 있다.


넉넉하지 않았지만 부족하지도 않았다고 한다.

첫째 딸은 평소 몇 번이고 자녀들에게 재산을 상속하지 말라고 당부했다고 한다.


환자의 아들은 인테리어 사업을 했다.

그러던 중 사망했다.


환자는 딸에게 알리지 않았지만, 아들의 사업을 도우려고 재산을 쏟아부었다.

가족에게 남은 것은 갚을 길도 막막한 빚뿐이었다.


"동생이 죽고 알아보니 부모님은 거지가 되어 있었어요."

"그만큼 재산을 자녀들에게 상속하지 말라고 말했는데."


상의할 가족이 없어 모든 것을 혼자 알아봐야 했다.

부정확한 정보는 너무 많았고 혼자 해결하기 역부족이었다.

부모를 봉양하는 것에 매달리다 보니 자녀를 양육하는 것에 소홀할 수밖에 없었다.

내 삶이, 내 인생이 없어졌다고 한다.

점점 혼란스러웠고 지금은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다고 한다.


입원 초기, 직접 병간호했었다.

생계를 위해 돈을 벌어야 했고 간병인을 고용했다.

그럼에도 버는 돈보다 지출이 많았다.


부모의 재산 한번 구경해 본 적이 없다는 첫째 딸은 신용불량이다.

신용카드 사용과 대출이 막혔고 더는 병원비와 간병비를 구할 수 없다.

신용회복을 신청했지만, 소득이 전무해서 앞으로도 걱정이다.


요양원은 질환 관리와 일상생활을 돕기 위한 노인의료복지시설이다.

현대판 고려장이라는 인식이 있지만 효도라는 명목으로 가정에서 보호할 경우 환자를 더 위험하게 만들 수 있다.

하지만 더 적극적인 질환 관리나 치료가 필요한 경우 요양원보다 병원을 이용해야 한다.


요양원에는 의사가 상주하지 않고 계약 형태의 촉탁의가 있지만 적극적인 치료는 불가능하다.

아무도 그런 정보를 알려주지 않았다.

요양원에서도 질병 치료가 우선인 경우 병원이나 요양병원을 안내했어야 한다.


병원비가 지출되는 동안 보건소를 통해 도움받을 수 있는 제도를 안내받지 못했다.

보건소에 신청하니 하루 만에 병원비 지원이 결정되었다.

신청주의 원칙의 한계이기는 하지만 이렇게 쉬운 걸 몇 년간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다.


병원비는 해결이 되었고 이전 병원비까지 소급하여 지원받을 수 있게 되었다.

퇴원 후 요양병원을 알아보기로 했다.


환자는 말기 암이었기에 임종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장례 절차나 방법도 미리 생각해 볼 수 있도록 했다.


초기 상담에서 대략적인 방향을 제시했다.

병원에서는 환자가 최우선이지만 가족의 삶을 배제할 수 없다.

가족의 지지나 관심에 따라 환자의 치료나 회복에도 차이가 있다.


2시간이 넘는 상담이 끝난 후 딸에게 문자 메시지가 왔다.

"돌파구를 찾은 것 같아 너무 감사합니다."


또 하루가 지났다.

평정심을 찾은 것 같다던 딸에게 연락이 왔다.

환자가 임종했다는 소식이다.


인제 그만 죽었으면 좋겠다던 말과 다르게 딸의 목소리가 떨린다.

장례비용을 조금이라도 줄여보기 위해 다급히 장례봉사단 연락처를 확인하고 딸에게 안내했다.


미리 알았더라면 이만큼 힘들지 않았을 것이다.

가족들이 함께했다면 이렇게 헤매지 않았을 것이다.

조력자가 있었다면 더 쉬웠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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