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모르겠는데"

환자경험평가-인생병원

by 여행자

1960년 이후 환자 권리 운동의 하나로 환자 중심 의료성의 개념이 대두되었지만 2000년대에 들어 WHO, OECD 등에서 환자 중심성을 의료 질의 핵심 요소로 규정하면서 본격적으로 사용되었다.


미국의학원(IOM)이 정의한 환자 중심성은 의료제공자, 환자, 환자 가족 간 동반 관계를 구축하여 의사결정 과정에서 환자의 바람, 필요, 선호가 존중되고 환자가 자신의 의료에 관해 결정하고 참여하는 데 필요한 교육과 지원을 보장하는 것이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 2015)


우리나라는 2012년 OECD로부터 의료의 질 개선을 위해 환자경험평가 체계가 필요하다는 권고 이후 2017년 상급종합병원 및 500 병상 이상 종합병원을 대상으로 평가를 시작했다. 이후 100 병상 이상 전체 종합병원으로 확대하여 2023년 4차 평가까지 진행되었다. 2025년부터 병의원은 물론 외래환자까지 평가하는 것으로 대상을 확대한다는 방침이다.


의료 자체의 질적 수준도 높아야겠지만 환자가 겪는 경험 전체를 평가하여 환자 중심 의료문화 정착과 확산을 도모한다는 목표다.


병원은 좋은 평가 결과를 얻기 위해 의료시스템을 환자 중심으로 재설계하고 전문 기관에 컨설팅을 받기도 한다. 환자는 치료뿐만 아니라 편안하고 안전하며 존중받는 경험을 원하지만, 병원 입구부터 주차 대란을 경험한 고객이 좋은 평가를 할 리 없듯 모든 고객의 주관적인 평가를 컨트롤할 수 없다.


특정 영역에 불만이 있지만 다른 영역에 만족도가 높아 불만이 상쇄되기도 하고 애초에 높은 기대치를 가지고 입원한 환자는 평가 점수를 짜게 주기도 한다.


‘나에게 맞는 병원’이라는 말이 있듯 같은 병원도 누군가에게는 좋은 병원이고 누군가에게는 안 좋은 병원으로 느껴질 수 있다. 예를 들어 의사 영역에서 높은 점수를 받은 병원도 의사에 따라 환자를 응대하는 방식도 다르고 고객의 만족도도 다르다. 환자의 질병이나 연령, 교육 수준, 타 병원 이용 경험 등 복합적인 요소가 평가에 영향을 준다.


4차 환자경험평가는 입원 경험 6개 영역(간호사 영역, 의사 영역, 투약 및 치료 과정, 병원 환경, 환자 권리 보장, 전반적 평가) 및 개인 특성(입원 경로, 주관적 건강 수준, 교육 수준), 24개 설문 문항을 모바일 웹을 통해 조사했다. 특히 평가가 거듭될수록 종합 점수에서 고득점을 받는 병원이 늘어나고 있다. 많은 병원에서 그만큼 철저하게 대비하고 환자 중심의 의료문화를 만들고 있다.


아직 순위까지 발표되지 않았지만 내가 근무하는 병원은 평가 점수 90점 이상 상위 15개 병원에 포함되었다. 고득점을 받아 기분은 좋지만 지속적으로 유지하는 것에 대한 부담이 남기도 한다.


문항마다 질문의 구체성은 떨어져 주관적인 판단이 많이 작용할 것으로 생각되어 논란은 있지만 설문에는 간호사와 의사 영역에 ‘존중/예의’, ‘경청’과 관련된 문항이 있다.


얼마 전 교통사고로 아버지는 재활치료를 받고 있다.

다른 병원에 입원 중이었지만 갑작스러운 복통의 원인을 알지 못해 어쩔 수 없이 내가 근무하는 병원에 다시 오게 되었다.


내가 근무하는 병원 소화기내과 의사는 인술을 펼치는 의사로 환자들에게 정평 나 있다. 매일 진료 예약은 포화상태고 진료 시간도 짧지 않다. 처음 진료를 받는 환자는 대기시간이 길어 불만을 호소하기도 하지만 한 번이라도 진료를 받아 본 환자라면 그런 불만은 없다. 왜 진료 시간이 긴지, 왜 대기시간이 긴지 환자도 이해하기 때문이다.


소화기내과 진료 후 약 처방을 받았고 이틀 만에 복통은 사라졌다.

한결 밝은 표정의 아버지는 의사에 대해 한마디 하신다.


“그 의사 정말 대단하더라.”

“처방해 주는 약을 먹었더니 언제 그랬냐는 듯 이틀 만에 싹 나았다.”

“모니터에 손을 짚어가며, 얼마나 꼼꼼하게 한참을 설명해 주시는지 설명만 들어도 속이다 후련하더라.”


“그래서 의사 선생님은 뭐라고 하시던가요?”


“잘 모르겠는데. 기억이 안 나네.”

“아무튼 진찰 잘하시더라.”


이런 상황은 진료를 잘했다고 해야 할까? 잘못했다고 해야 할까?


환자나 보호자가 알아듣기 쉽게 설명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의사가 얼마나 환자를 이해하고 공감했느냐의 차이일 것이다.


누구든 질병을 확인하고 낫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병원을 찾지만, 그전에 환자가 겪는 고통을 충분히 이해받기를 원한다. 고장 난 기계가 아닌 인간적인 대우와 존중을 원한다.


질병으로 고통받는 환자는 예민할 수밖에 없다. 평소 아무렇지도 않았던 상황에도 날이 서기 마련이다.

치료 과정에 협조하지 않는 환자로 비칠 수도 있겠지만 경청과 공감을 통해 치료 순응도를 높일 수 있을 것이다.


다만 병원에 근무하는 의사와 간호사를 포함한 의료인들이 물리적이든 정신적이든 여유가 있어야 한다. 빡빡하게 짜인 일정과 업무가 있고 수많은 과정과 절차를 지켜야 한다. 반복하는 진료와 설명에 본인도 모르게 무감각, 무표정으로 응대하기도 한다. 이미 지쳐 더는 설명할 힘조차 없다는 직원도 있다. 하지만 환자는 질병이 아니라 한 명의 사람으로 불리길 바란다는 것을 알기에 없는 힘도 짜내 응대하는 직원도 있다.


의료 환경의 개념이 완전히 바뀌어 고객 중심의 병원 운영전략과 마케팅 전략이 절실히 요구되지만, 많은 인력과 시설, 장비 등을 유지해야 하는 병원에서 다양한 사회적 요구를 수용하면서 유기적이고 탄력적으로 대응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어려움 속에서도 한 명의 환자에게 ‘인생병원’이 되기까지 환경부터 프로세스를 포함한 모든 의료시스템을 재설계하는 것이 병원이 생존하기 위한 필수 요소이다. 앞으로도 급속한 기술혁신과 정보화, 사회적 현상이나 가치관의 변화에 따라 의료 환경은 변할 것이고 병원도 변화를 위해 노력할 것이다.


이런 노력에도 의료인의 인식과 태도가 바뀌지 않는다면 아무리 좋은 시설과 장비도 환자를 만족시킬 수 없다. 환자 또한 이런 노력을 알아줬으면 좋겠다. 개선방향에 대해 함께 고민해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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