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추 연대기

텃밭의 속사정 ③ 상추

by 황반장

평소 친하게 지내는 동네 형이 웬일인지 기분이 좋다. 어려운 코로나19 시기를 지나고 있는 자영업자인지라 딱히 좋은 일이 있지 않을 것인데 오늘만은 밝은 모습이다. 이유가 궁금해 안 물어볼 수 없었다. 들어 보니 뭔가 좋은 일은 바로 이번에 구청에서 분양하는 상자텃밭 보급 사업에 당첨되었다는 것이다. 이게 뭐 별일인가 싶을 수도 있지만 상당한 경쟁을 뚫고 당첨이 되었고, 구청의 보조가 있어서 아주 적은 금액의 자부담 만으로 텃밭용 상자, 배양토에다 고추, 상추 같은 여러 가지 모종이 생겼으니 수지맞는 일인 것이 분명하다. 아직 상자텃밭을 받지도 않았고 여기서 채소들이 자라려면 한참이나 남은 일인데도 당장 오늘 저녁이라도 싱싱한 상추를 수확해 삼겹살 구워 크게 한 쌈 먹을 계획에 신이 난 듯 보이기도 했다. 이게 뭐라고 이리 좋아할까 싶지만 팍팍한 세상살이에 잠시나마 쉬어갈 수도 있으니 상추 키우기도 나름 의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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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나라 상추는 대개 잎상추 품종으로 색에 따라 청상추와 적상추로 부른다.



우리나라에서 독특한 쌈 문화로 이어져온 대표적인 채소가 바로 이 상추다. 깻잎이나 호박잎도 쌈으로 즐기지만 원래는 목적은 깨와 호박의 이용이다. 이에 반해 상추는 아예 처음부터 쌈으로 이용할 목적으로 키워진다.

상추는 본래 생채(生菜)였다가 발음이 변하면서 상추가 되었다고 한다. 어원으로 봐도 익혀 먹지 않고 생으로 먹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지역마다 부르는 이름이 조금씩 다른데 ‘상초’, ‘상채’, ‘부상추’라고도 하고 ‘부루’처럼 전혀 다른 느낌의 이름도 있다. 표준어가 중간에 바뀌기도 했는데 88 올림픽 이전에는 '상치'가 표준어였지만 발음이 바뀐 것을 표준어로 삼는 규정에 따라 1988년부터는 '상추'가 표준어가 되었다. ‘금추’라고 한 여름이면 반짝 떠오르곤 하는 이름도 있는데 여름철 상추 생산량이 줄고 태풍 피해 등이 겹치면 금처럼 비싸지는 상추 값을 빗댄 말이다. 삼겹살로 상추를 싸 먹는다는 우스갯소리도 함께 등장한다.


어릴 적 모내기가 시작되고 농번기가 되면 논과 밭으로 나가 상추를 곁들인 들밥을 먹는 일이 많았다. 한 마지기 논에 손은 왜 이리 많이 가는지 어머니와 둘이서 땡볕에서 피사리를 마치고 (논에는 잡초와 같은 피가 자란다. 이 피를 제거하는 일을 ‘피사리’라고 한다.) 그늘을 찾아들어 상추 두세 장 겹쳐 식은 밥 얹어 먹으면 그 포만감에 피곤한 노동이 잠시 잊히는 듯했다.

저녁도 마찬가지이었는데 들일을 하고 돌아오신 어머니는 양은 채반에 가득 담은 상추를 상에 올렸다. 해가 져야 끝나는 바쁜 농사일과 상 차리는 일도 버거운 노동을 마치고 나면 물에 씻어 바로 밥을 싸 먹을 수 있는 상추는 준비가 아주 간단하고 요긴했다. 아직 물기가 채 털어지지 않은 상추 잎을 창호지 문에 대고 툭툭 털어 먹으면 창호지가 팽팽해진다는 어머니의 말에 신이 난 듯 따라 하는 어린 아들도 상추를 잘 먹었으니 이 손바닥처럼 생긴 채소는 꽤나 고마운 존재였을 지도 모른다.


이 즈음인 1980년대의 전국적인 상추 생산량은 5만 톤을 조금 상회하는 정도였다. 이후 1990년에는 8만 8천580톤, 2000년에는 20만 3천509톤으로 급격히 생산량이 증가했다. 아마도 1980년대 중후반부터 살림살이가 점점 나아지고 이에 따라 급격히 증가한 육류 소비량, 특히 삼겹살 소비의 폭발적 증가가 상추의 생산과 소비에도 한몫했으리라 생각된다. 이런 유행이 최고조에 달했던 2000년대 초반에는 고깃집이 아니더라도 웬만한 식당에는 휴대용 가스버너에 돌판이나 솥뚜껑 같은 불판을 얹고 삼겹살 구워 먹는 메뉴를 내놓았었다. 그리고 채반 가득한 상추가 무한리필로 제공되었다. 이후 상추 생산량은 조금씩 줄어들어 2019년에는 9만 5천582톤이 생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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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쌈채소를 먹는 것은 우리나라만의 독특한 음식문화다.




덩달아 생겨난 식품이 있는데 바로 쌈장이다. 쌈장이 없던 시절, 우리 집은 상추쌈에 고추장을 더해 먹었고, 된장을 더해 먹는 집이 더 많았다는 것은 나중에 알게 되었다. 지금은 누구나 먹는 쌈장이 상품으로 등장한 것은 1983년이다. 중소기업인 삼원식품(현 CJ 해찬들)에서 된장과 고추장을 섞은 ‘삼원 쌈장’을 판매하기 시작했는데 우후죽순처럼 생겨나는 삼겹살집의 인기와 함께 고기쌈에 곁들이는 국민 소스로 자리 잡게 되었다.


우리가 격변하는 시대를 살아오며 꾸준히 먹어온 상추는 대개 잎상추 (Leafy lettuce) 품종이다. 좀 더 판판한 모양의 상추는 치마를 닮았다 하여 치마상추라 하고 꼬불꼬불한 것은 축면상추라 부른다. 여기에 색에 따라서 청치마, 적치마, 청축면, 적축면으로도 불린다. 토종 상추는 거의 치마상추 종류지만 축면상추는 일제강점기 이후 일본과 외국에서 도입된 품종들도 많다.

이 잎상추들은 모두 속이 차지 않는 비결구 상추이며 결구되는 상추 품종은 보통 양상추라고 부르고 먹는 방법도 조금 달라 쌈이 아니라 샐러드나 샌드위치, 버거 등에 이용된다.


최근 부쩍 눈에 띄는 품종은 로메인 상추 (Romain Lettuce) 라도 불리는 품종이다. 원산지가 지중해이고 코스 섬에 재배되었다 해서 코스상추로 부른다고도 한다. 로마 사람들이 먹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 하고 외국에서는 시저 샐러드의 주 재료 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특유의 쌈 문화의 영향으로 모둠 쌈채소 중 하나로 인식되는 경향이 강하다. 잎상추가 좀 더 부드럽고 고소 쌉싸름한 맛이라면 이 로메인 상추는 굉장히 아삭아삭하고 시원 달달한 맛이 좋다. 몇 해 전 여러 채소 모종을 사려고 화훼 공판장에 갔더니 상추 모종에 절반은 '로메인'이었다. 아삭한 상추로 쌈으로도 먹고 무쳐 먹어도 맛있다는 설명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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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봄이면 동네 꽃집에서도 로메인 상추 모종을 판매한다.



코로나로 미래가 보이지 않지만 사람들은 상추 심을 준비를 했다. 연초에 일찌감치 분양하는 텃밭을 배정받은 도시농부들은 부지런히 상추씨를 뿌리고 모종도 심는다. 상자 텃밭을 배정받은 사람들은 베란다를 치워 놓고 분양을 기다리고 있고 오래된 골목에는 어김없이 스티로폼 상추밭이 등장했다. 봄이 완연하다는 확증이고 질기게 이어지는 상추의 연대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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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해에도 어김없이 골목길에 스티로폼 상추밭이 놓였다.





<초보 도시농부들을 위한 상추 재배법>


- 봄, 가을 두 번 키울 수 있다. 실패해도 다시 기회가 온다.

- 노지뿐만 아니라 토심이 15cm 이상만 되면 상자에서도 잘 자라니 베란다나 자투리 공간에서도 키울 수 있다.

- 모종만 심어 보았다면 이번엔 씨앗을 뿌려보시라고 권한다. 새싹이 올라오는 것을 보는 희열도 있고 어린잎을 솎아 부드러운 상추 무침을 먹을 수 있는 도시농부만의 기쁨도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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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시텃밭의 상추. 씨앗으로 뿌리면 시간대 별로 다양한 생김새의 상추를 얻을 수 있다.





이 글은 '서울농부포털(도시농업)' 에 실린 글입니다.


[작물인문학3] 상추연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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