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려진 감자를 키우는 방법 중에 ‘Lazy Bed’라고 불리는 농사법이 있다. ‘게으른 침대’라고 생각할 수 도 있지만 '게으른 밭'으로 번역하는 것이 맞다. 사실 레이지 베드의 시초라 할 수 있는 유럽에서도 우스개 소리처럼 '게으른 침대'라고도 한다. 밭두둑의 모양이 침대처럼 직사각형인 것과 노동력과 퇴비들이 적게 투입되는 농사법이 특징이니 나름 일리 있다는 생각이 든다. 내용으로 따지자면 ‘게으르고 느긋한 텃밭’ 쯤으로 해석해 볼 수 있겠는데 게을러도 농사가 된다니 바쁘고 시간 없는 도시농부들에게 꽤 흥미 있는 농사법이 아닐 수 없다.
방법은 이렇다. 땅을 갈지 않은 상태에서 씨감자를 한 줄로 길게 늘어놓는다. 그리곤 양쪽의 흙을 파서 말아 올리듯이 덮어주면 마치 침대나 화단 모양의 이랑이 만들어진다. 이런 식으로 밭을 만들어 나가면 평평한 이랑과 지면보다 아래로 파인 밭고랑으로 구성되는 감자 밭이 완성되는 것이다.
땅을 많이 갈지 않아 토양 생태계를 유지하면서도 상층부에는 다양한 유기물을 덮어 땅의 지력과 유효 퇴비 성분을 높이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실제로는 척박한 토양에 적용했던 농사법이다.
△ Lazy potato bed (출처 - 구글 이미지 검색)
물론 현대의 대량 생산하는 감자밭의 이야기는 아니다. 이 농법은 1800년대 유럽의 아일랜드에서 성행했던 농업이라고 알려져 있다. 아일랜드에서는 일 년에 두 번 감자를 수확했는데 봄에 감자를 심어 8월에 이른 감자를 수확하고 다시 10월에 늦은 감자를 수확하는 식이었다. 하지만 낮은 기온과 잦은 강우, 척박한 토양 환경의 문제로 일반적으로 밭을 갈고 다량의 퇴비를 넣고 이랑을 만드는 방식으로는 감자 재배가 원활치 못했기 때문에 이런 감자밭 관리방식이 탄생한 것이다.
△ 감자꽃 - 유럽으로 건너간 감자는 처음에는 관상용으로 재배되기도 했다.
16세기 후반 원산지인 안데스 산맥에서 유럽으로 전해져서 17세기 후반에는 아일랜드에 널리 재배된 감자는 아일랜드인들의 주식으로 자리 잡았다. 1845년에는 인구 800만 중 600만이 하루 세끼, 양으로는 3~6킬로그램의 감자를 먹었다고 한다.
하지만 감자가 다른 곡식에 비해 너무 맛있었기 때문에 주식이 된 것은 아니었다. 영국의 침략과 지배를 받고 있던 아일랜드인들은 재배한 밀과 보리의 대부분을 영국에게 수탈당했다. 많은 사람들의 영국인 지주에게 높은 소작료를 지불해야 했고 이를 대행하는 마름들에게 시달렸다. 영국인들에게 아일랜드인들의 삶이나 농토는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다. 더 많은 밀을 생산 해 영국으로 수탈해 가는 동안 토지는 황폐해졌고 사람들의 삶은 나락으로 떨어졌다.
이런 곤궁한 삶을 그나마 이어갈 수 있었던 것은 감자 덕분이었다. 단위면적당 생산량이 많으니 땅의 면적이 적어도 되고 식사로도 훌륭한 영양소를 가지고 있었으며 보관하고 키우기도 수월했다. 겨울이 지나고 햇감자를 수확하기 전인 5월에서 7월까지의 ‘감자 고개’만 잘 버텨낸다면 말이다.
△ '감자 먹는 사람들' (1885년) - 빈센트 반 고흐 (출처 - 구글 이미지 검색)
하지만 은총은 아일랜드인들을 피해 갔다. 1845년부터 5년간 연속해 아일랜드에는 감자 잎마름병이 돌았는데 이는 감자에 검은 반점이 생기고 시들어 버리는 감자 역병으로 아일랜드 전국의 감자가 일시에 다 썩어버린 것이다. 역사에 ‘아일랜드 대기근 (1845년~1852년)’이라 불리는 사건이다. 주식인 감자를 잃어버린 800만 인구 중 110만 명이 굶주림으로 사망했고 200만 명 이상이 미국과 캐나다 등지로 이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국은 아일랜드에 대한 수탈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감자는 이렇게 깊은 상처를 남기며 유럽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우리나라에서 재배하는 감자는 17세기 후반 네덜란드를 통해 중국을 거쳐 한반도로 유래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조선 후기 실학자 이규경(1788년∼1863년)의 <오주연문장전산고>에 의하면 순조 24년 만주를 통해 처음 감자가 전해졌다고 기술되어 있고 1862년에 쓰인 김창한의 〈원저보>에서는 네덜란드 선교사에 의해 씨감자와 재배방법이 전해졌다고 한다.
감자는 여러 다른 이름으로도 불리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이미 일본을 통해 들어온 ‘고구마’를 ‘감자’ 또는 ‘감저’라고도 부르고 있었기 때문에 혼동을 막기 위해 북방에서 들여왔다 하여 '북방 감저' (北方甘藷)라고 불렸다고 한다. 또 말에 달아주는 방울처럼 생겼다 하여 '마령서'(馬鈴薯)라고도 불렸다 하는데 감자를 키우다 보면 흙속의 덩이줄기인 감자알보다는 지상부에 생기는 감자 열매가 더 방울 모양으로 생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감자 열매 - 우리가 알고 있는 감자는 땅속줄기가 커진 것이다. 감자도 꽃이 지고 나면 열매를 맺는다.
‘마령서’도 독특한 이름이지만 제주도 방언인 ‘지슬’도 흔치 않은 감자의 또 다른 이름이다. 일반적으로 잘 알려져 있지 않았지만 4.3 제주 민중항쟁을 그린 영화 ‘지슬’ 이 2013년 개봉해 주목을 받으면서 한 번쯤 들어본 이름이 되었다. 사실 영화의 배경이 된 1947년 4월 3일에 제주도에는 감자가 많이 재배되고 있지는 않았다. 하지만 제주도는 가을에 씨감자를 심어 겨울을 나고 봄에 수확했으니 배고픈 춘궁기를 견뎌내게 해주는 고마운 작물이었을 것이고 감자 ‘지슬’이 4월 3일 그날에 제주도에 닥친 상황을 대변하게 된 이유가 된 것이 아닐까 싶다.
△ ‘지슬’은 감자의 제주도 방언이다. (이미지 출처 - 네이버 검색)
한때 제주도는 우리나라에서 3번째로 감자를 많이 생산하는 지역이기도 했다. 1980대부터 생산량이 늘어 1990년대에는 최고치를 경신한 것이다. 하지만 그 이후 감자 생산량이 줄기 시작했는데 단일작물의 연작피해와 냉해 때문인 것으로 알려졌다. 참고로 감자 하면 강원도를 떠올리는 분들이 대부분이지만 ‘고랭지 감자’에 국한된 이야기다. 2020년 기준으로 봄감자의 최대 산지는 경상북도이고 전라남도와 충청남도가 그 뒤를 잇는다.
감자의 원산지인 안데스 산맥에는 4,500 품종이 넘든 다양한 감자가 존재한다. 페루의 국제감자연구소( Centro Internacional De la Papa)에 따르면 감자는 쌀과 밀 다음으로 중요한 식용작물로 전 세계적으로 10억 명이 감자는 먹고 있고 총생산량은 3억 7천4백만 톤이 넘는다. 연구소는 전 세계 가난한 사람들에게 척박한 환경에서도 쉽게 키울 수 있는 가장 신선한 상태에서 섭취할 수 있는 감자를 보급하고 있다.
다시 봄이 오고, 올해도 어김없이 감자를 심었다.
또 감자꽃 피기를 기다린다.
<도시에서 감자를 키우는 Grow Bag 농사법>
- 적은 면적의 텃밭에 다양한 작물을 키우는 도시농부들에게는 노지에 심는 것보다 그로우백 (Grow Bag)이나 포대 등을 이용하는 것이 유용하다.
- 흙과 퇴비를 잘 섞어 배수구멍을 뚫어준 포대에 담아준 후에 씨감자를 심는다.
△ 4월 7일에 포대에 심어 4월 21일에 싹 이난 감자 (사진제공 : 김수향. 텃밭강사, 도시농업 활동가)
△ 5월 12일 제법 감자답게 올라온 잎과 줄기
△ 5월 26일, 포대 가득 지란 감자, 6월 말이면 수확이 가능하다.
이 글은 '서울농부포털(도시농업)' 에 실린 글입니다.
[작물인문학2] 감자의 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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