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반장의米식 일기⑥ 안남미
쌀은 크게 인디카와 자포니카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인디카는 말 그대로 인도, 베트남, 태국 등에서 재배되고 소비되는 품종으로 쌀알이 길쭉하고 가늘며 찰기가 적은 것이 특징이다. 반면에 자포니카는 일본과 한국, 중국의 북부 지역에서 주로 재배하고 먹는 품종으로 쌀알이 짧고 통통하고 찰기가 강하다. 일본의 학자가 분류해 발표했기 때문에 이름이 인도 쌀을 연상케 하는 인디카와 일본 쌀을 연상케 하는 자포니카가 되었다.
인디카 쌀과 자포니카 쌀
우리나라가 자포니카 품종만을 먹고 있어서 자포니카가 더 많이 재배되고 소비될 것 같은 생각이 들지만 쌀을 먹는 전 세계 인구의 90%는 인디카를 재배해 먹고 있다. 자포니카를 먹어왔던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인디카는 찰기가 없어 풀풀 날리고 맛이 없는 쌀이라는 인식이 있지만 반면 인디카를 주식으로 하는 사람들에게는 우리나라 쌀은 입안에 달라붙어 삼키기 어렵고 소화가 안 되는 쌀이라는 인식이 있다.
인디카? 안남미?
우리나라에는 인디카를 이름 그대로 부르지 않고 ‘안남미’라는 부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인도의 ‘바스마티’나 태국의 ‘자스민 라이스’ 등 알려진 이름도 있는데 말이다. ‘안남’은 베트남을 칭하는 말로 중국 당나라에서 국경 관리와 베트남 지배를 위해 설치한 기관인 ‘안남도호부’에서 유래했다. 안남미는 말 그대로라면 ‘베트남 쌀’을 의미한다.
안남미라는 표현은 조선시대 말에서 일제강점기를 거치는 기간에 우리나라에 정착됐다. 당시 우리나라 쌀의 일본 반출이 많아져 쌀의 수요가 모자라게 되고 쌀값이 급등하자 쌀 수입을 하게 되는데 이때 수입된 쌀이 바로 안남미다. 1901년 제물포항을 통해 처음 수입된 안남미는 1920년대에는 20배 이상 수입량이 늘어나게 된다. 하지만 쌀 수입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의 식량난은 좋아지지 않았는데, 일본으로 반출되는 쌀은 점점 늘어나고 여기에 곡물 수입상의 농간이 극에 달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백성들이 구할 수 있는 식량은 안남미와 만주에서 들여온 조를 섞은 썩은 쌀뿐이었는데, 중량을 늘리기 위해 모래를 섞어 넣은 것도 있어서 당시 언론에서는 이런 미곡상들을 간악한 장사치라는 ‘간상(奸商)’으로 부를 정도였다.
인디카와 통일벼
이렇게 처음부터 좋지 않은 인상으로 만나게 된 인디카 품종 ‘안남미’는 해방 이후 70년대 통일벼 재배를 통해 쌀 자급을 할 때까지 꾸준하게 수입되지만, 특유의 부슬거리는 식감과 향으로 사람들의 입맛 속에 자리 잡지는 못했다. 인디카 품종의 인상이 굳어지게 되는 또 하나의 계기로 통일벼의 등장을 빼놓을 수 없다. 통일벼는 녹색혁명이라고 불리며 우리나라 쌀 자급의 큰 역할을 했던 쌀 품종들을 통칭하는 말이다. 이 통일벼는 필리핀에 있는 ‘국제미작연구소’에서 국내 연구자들이 개발한 다수확 품종으로 필리핀 품종인 ‘IR8’과 대만의 재배종 ‘TN1’, 그리고 일본 품종은 ‘YUKARA’를 교배하게 탄생하게 된 품종이다. 그런데 이중 일본 품종인 ‘YUKARA’만 '자포니카'이고 나머지 두 품종은 '인디카'다 보니 통일벼는 ‘인디카’ 품종이 되고 만다.
다수확 품종이긴 했지만 추위에 약하고 키울 때 비료가 많이 필요했던 통일벼는 쌀 자급을 이루는 큰 역할을 했지만 밥맛으로는 좋은 인상을 주지 못했다. 통일벼는 유신정권의 몰락과 함께 잦은 태풍과 병충해를 견뎌내지 못하고 사라져 이제는 기후위기에 대응한 연구의 목적으로만 재배되고 있다.
인디카의 재발견
이후 1980년대부터는 다양한 쌀 품종이 개발되어서 지금에 이르고 있다. 오대, 삼광, 신동진, 영호진미, 새일미 같은 국내 개발 품종부터 고시히카리, 추청, 히토메보레 같은 일본에서 개발된 품종까지 다양한 품종들이 각각의 맛을 가지고 전국적으로 재배되고 있다. 모두 자포니카 계열의 품종이다.
그렇다면 120여 년 동안 안남미라는 이름으로 불렸고 맛없는 쌀의 대명사처럼 이야기되던 이 쌀은 정말 이렇게 우리나라에서 사라지는 걸까? 인디카가 국내 재배되거나 대량으로 유통되지만 않지만 맛없는 쌀이라는 인식은 조금씩 변화되고 있는 것 같다. 홍대 앞, 연남동, 가로수길 같은 트렌드를 선도하는 청년들이 모여드는 상권에 자리 잡은 태국 음식점이나 인도 음식점 같은 곳에서 종종 안남미를 맛볼 수 있다. 메뉴판에 안남미인 ‘자스민 라이스’를 사용하고 있다고 강조하는 곳들도 있는데, 현지 음식을 제대로 맛볼 수 있으려면 쌀도 현지 스타일로 사용해야 더 좋은 것이라는 생각을 엿볼 수 있다. 안남미로 만든 인도 커리, 태국 카오팟, 인도네시아 나시고랭이 더 매력적이고 맛있다고 생각하는 젊은 세대들이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외식업소가 아닌 다른 곳에서도 안남미가 눈에 띄는데 바로 작은 농촌 시내의 마트가 그곳이다. 각종 태국 소스에 쌀국수 같은 것을 비롯해 안남미가 포대채로 쌓여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농촌에 거주하는 외국인 노동자들의 영향이다.
이렇게 조금은 서로 다른 곳에서 찾아볼 수 있는 우리 곁의 안남미에 대해 한번쯤 다시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 대한민국이라는 공동체에 120년 동안 굳어진 ‘후 불면 날아간다’는 ‘안남미’가 실제는 역사의 우여곡절이 만든 편견일 수도 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