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반장의 米식 일기 ⑦ 토종벼의 역사
한반도의 벼
1900년대 초반 경기도 여주에는 ‘조동지’라는 지금은 생소한 이름의 벼가 많이 키워졌다. 농민들 사이에서 평이 좋았던 벼 품종으로 여주뿐만 아니라 인근 지역에서도 많이 재배된 품종이다. 특히 수확량이 많아 인기였는데, 1905년 조사한 바에 따르면 단보 당 2.55석이 수확된 걸로 기록되어있다. 지금으로 치면 약 300평에서 367kg 정도가 생산된 것이니 당시로서는 꽤나 수확이 좋은 품종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 ‘조동지’라는 특이한 이름의 벼는 1896년 경기 여주 금가면에 사는 독농가 (篤農家) 조중식 씨가 자신의 논에서 우연히 발견한 우량 이삭을 몇 년에 걸쳐 육종 해낸 품종이다. ‘조동지’라는 이름도 밥맛 좋고 키우기 수월하면서 생산량도 많은 벼를 육종해 주변에 나누어준 조중식 씨의 행동에 감사해 인근의 농민들이 붙여준 것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하지만 조선 후기에서 일제강점기 초기까지 경기도에서 많이 키워진 것으로 알려진 이 ‘조동지’는 1930년대가 되면서 한반도에서 자취를 감춘 것으로 보인다. 일본의 산미 증식 계획과 일본 벼 품종 도입 정책 때문이었다.
일제의 토지조사업과 산미 증식 계획
일본은 우리나라에 대한 식민통치의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대대적인 토지조사사업을 벌였다. 1910년에는 조선총독부에 토지조사국을 설치하고 1918년까지 전국적인 토지소유권 및 토지가격조사 사업을 진행했다. 그런데 우리나라 농민들이 토지소유권을 인정받기 위해서는 상당히 까다롭고 복잡한 절차를 거치게 해 상당수 농민들의 기한 내에 신고하지 못하는 일이 속출했다. 이렇게 신고하지 못한 토지는 모두 강제로 소유권을 빼앗기게 되었다. 또한 공동소유 문제로 신고에서 누락된 문중 소유의 토지와 공유지, 대한제국 정부와 왕실 소유의 공전도 모두 국유지로 편입되었다.
그 결과 조선총독부는 우리나라 국토의 임야, 전답의 40%를 소유하게 되면서 한반도의 최대 지주로 등극했다. 또한 동양척식(拓植) 주식회사는 2대 지주가 되었고 상당수의 토지가 일본인들의 차지가 되었다.
토지조사사업으로 식민통치의 경제적 기반을 마련한 일본은 1920년부터 ‘산미 증식 계획’을 진행한다. 이 계획은 당시 일본 국내의 쌀 부족 현상 해결을 위해 우리나라를 쌀을 생산하는 병참기지인 ‘미단작지대화’ 하는 것을 목표로 진행되었다. 산미 증식 계획은 토지개량사업과 농사개량사업 두 가지로 나누어 진행되었다.
토지개량사업은 말 그대로 토지를 개량하는 사업으로 조선총독부 식산국에 토지개량과를 두어 이를 총괄하게 하였다. 이후 동양척식 주식회사와 조선 식산은행을 통해 사업을 진행해나갔고, 전국적으로 수리조합을 만들어 관개 개선, 지목전환, 개간과 간척을 진행하였다.
농사개량사업은 일본의 개량 농업을 도입하는 사업으로 우리나라 재래의 벼 품종을 일본 품종으로 전환하고 비료 사용을 늘려 생산성을 확보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이 사업은 '조선농회‘를 설립하여 추진토록 하였는데 이는 일본의 ’제국농회‘를 본 따 만든 조직이다.
일본 벼 품종 도입과정
일본은 식민지배 초기부터 조선총독부 산하의 농업연구기관인 ‘권업모범장 ’을 설치하여 한반도 농업에 농업에 대한 조사 사업을 벌였는데, 1911년과 1913년 두 번에 걸쳐 한반도 전역에서 농민들의 재배하던 벼 품종을 수집했다. 이를 정리한 것이 ‘조선도 품종 일람 ’으로 여기에는 논벼 1,259종, 밭벼 192종, 총 1451종의 벼 품종이 기록되어있다. ‘조동지’, ‘자광도’, ‘버들벼’, ‘졸장벼’, ‘조정도’, ‘북흑조’ 같은 이름의 벼들이다.
일본은 이 조사를 바탕으로 한반도의 환경에 적응하고 오랜 세월 농민들의 손으로 키워온 한반도의 벼들은 생산성이 떨어지는 품종으로 치부하였다. 그리고 비료를 많이 사용하고 생산량이 많은 자신들의 벼 품종을 소위 우수 품종이라는 이름으로 우리나라에 재배하기 시작했다.
일본인들이 운영하던 대농장을 중심으로 일본 도입 품종을 확산시켜 나갔는데 ‘와세신리키’, ‘다마니시키’, ‘가노메오’ 같은 일본 품종이 전통적으로 한반도에서 키워지던 벼 품종을 밀어내고 아주 빠르게 우리나라 논에 심어지게 되었다. 이 시기를 거치면서 1912년 우리나라 총재배 면적에 2.8%에 밖에 되지 못했던 일본 도입품종 이 단 8년 만인 1920년에는 52.8% 에 도달했고 10년 뒤인 1930년대 에는 대부분의 토종벼 품종은 사라지게 되었다.
1930년대에는 전 세계적인 대공황과 농업 공황으로 토지개량사업은 폐기되었으나 농사개량사업은 계속 진행되었다. 소위 농촌진흥운동을 통해 소작쟁의를 관에서 조정해 나가도록 했으며 식민통치의 안정화를 꽤 하였다. 1930년대에는 ‘권업모범장’에서 이름을 바꾼 ‘농사시험장’을 통해 한반도 내에서 직접 새로운 벼 품종을 개발하기 시작했는데 일본의 ‘긴보즈’ 품종을 도입해 개량한 ‘수원 1호’가 그것이다. 이를 기점으로 해방 전까지 남선 13호, 풍옥, 서광 등 13종의 신품종을 개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다시 기억해야 할 쌀의 역사
최근 일제강점기 사라졌던 토종벼에 대한 관심이 커져가고 있다. 10여 년 전부터 토종벼를 키우는 농부들이 생겨나고 있고 지자체나 기관에서도 관심을 나타내고 있다. 관심을 받으며 찾는 사람도 조금씩 늘고 있는데, 다행스럽고 고무적인 일이다. 여기에 한반도를 수놓았던 그 많은 토종벼가 사라지게 된 일련의 과정을 기억하고 복원하는 것도 빼놓지 말아야 한다. 그래야만 수천 년 동안 한반도에서 키워진 토종벼들이 가진 역사의 그 의의를 온전히 복원해 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라고 했던 저항시인 이상화의 시를 다시 한번 새겨볼 일이다.
- 참고
- 근현대 한국 쌀의 사회사 (들녘, 김태호 지음)
- 한국독립운동의 역사 (한국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 2018 토종벼 하이라이트 (전국 토종벼 농부들, 이근이 글. 정리)
- 거대한 감옥, 식민지에 살다 (민족문제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