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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파를 심은 사람들

텃밭의 속사정 ⑲ 양파

by 황반장

‘외래종’, ‘도입종’, ‘귀화종’, ‘침입종’ 같은 말이 있다. 어떤 경로이던지 우리나라로 들어와 정착한 식물, 또는 작물들을 말한다. 지금 우리가 키워 먹는 작물이나 채소의 상당수는 외국에서 들어온 것들이다. 국경 인근의 교류를 통해 유입되는 경우도 있고 국가가 종자를 도입해 보급하는 경우도 있다. 외국과의 교류나 무역을 할 수 있었던 부류의 사람들이 씨앗을 가지고와 보급한 경우도 많다. 비단 최근의 일만이 아니라 아주 오래전부터 이런 식물들의 교류가 있어왔다.


가장 많이 알려진 이야기는 중국에서 목화씨가 도입되는 과정이다. 고려말 문신이었던 문익점이 붓두껍 속에 목화씨를 숨겨 들어와 재배에 성공했다는 이야기로 유명하다. 하지만 이 이야기에는 조금 과장된 것이다. 실제로는 어렵지 않게 목화씨를 가지고 왔다는 것이고, 붓두껍 이야기는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만들어진 영웅담 같은 것이라는 게 정설이다. 물론 문익점이 목화씨를 가지고와 장인 정천익과 함께 재배에 성공했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사람들은 문익점의 목화 도입으로 인해 시작된 생활의 긍정적은 변화를 이런 서사로 기억하는 것이 아닐까?


이런 극적인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외국에서 도입된 문물이나 농산물을 구별해 부르는 경우가 많았다. 중국에서 들어온 작물들은 ‘호(胡)’자를 붙여서 이름을 지었다. ‘호밀’, ‘호배추’, ‘호도’ 등이 그렇다. ‘호도’는 발음이 변해 이제는 ‘호두’라고 부르고, 토종배추와는 달리 속이 차는 ‘호배추’는 이제는 주종이 되어 그냥 ‘배추’라 부른다.


일본에서 도입된 작물들은 대개 단어의 앞에 ‘왜(倭)’자를 붙였다. 일본에서 들어온 ‘고구마’는 ‘왜감자’ 라고 불렀다. 단무지를 만드는 기다란 무는 ‘왜무’, 작물은 아니지만 일본식 간장은 ‘왜간장’이라고 따로 불렀다.


이렇게 앞에 ‘호(胡)’나 ‘왜(倭)’가 붙는 이름들은 주로 조선 중기 이후부터 많이 생겨난 것으로 보인다. 이 두나라 말고 주로 서양 국가들로부터 도입되거나 그 원산지가 서양인 작물들은 ‘양(洋)’자를 붙였는데 주로 조선 말기, 개항 이후에 전해진 것들이 많다. 특히나 이 이름들은 지금도 그대로 사용되는데 ‘양배추’, ‘양송이’, ‘양상추’, ‘양파’ 같은 것들이다.




우리나라에 언제부터 양파가 심어지고 먹어왔는지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없다. 농촌진흥청에서는 조선 말기 미국과 일본으로부터 도입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1906년 뚝섬 원예시험장이 설치되면서 양파에 대한 연구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1908년 조선중앙농회보에도 양파재배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다. 또 일제강점기인 1910년대에는 일본으로부터 상당량의 양파가 수입된 것으로 확인된다. 아마도 국내에 들어오는 일본인들의 수가 늘어나면서 이들의 식생활에 많이 사용되었던 양파 역시 수입량이 늘어난 것으로 볼 수 있겠다. 이후 1920년에서 1940년대 걸쳐 일본에서 도입한 양파 품종에 대한 수량 및 품질에 대한 연구가 꾸준히 진행되었다.


우리나라의 양파 최대 산지인 전남 무안에 양파가 도입된 사연에서도 이런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무안군 청계면 사마리에 살던 강동원 씨는 일제 강점기인 1930년경 집을 떠나 일본의 양파채종농가에서 일하게 된다. 강동원 씨는 1932년에 양파종자 1홉과 재배기술서적을 고향에 있는 숙부 강대광 씨에게 보냈고 이를 바탕으로 강대광 씨는 양파 재배에 성공하게 되었다.


하지만 판로가 마땅치 않아 고민하던 중 이를 본 일본인 무안 우체국장이 일본인들의 양파 수요가 많으니 목포로 나가 팔아보라 권유해 주었다고 한다. 강대광 씨는 곧바로 우마차에 양파를 싣고 목포중앙시장에서 판매를 시작했다. 목포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은 한국에도 양파가 있다며 비싼 가격으로 구매해주었는데 당시 보리농사의 5배에 해당하는 금액이었다고 한다. 이후 이웃과 함께 양파농사를 지어 지금의 무안이 양파농사를 짓게 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는 이야기다.


전남 무안과 함께 양파의 주산지 중 하나이며, 양파의 시배지라는 경남 창녕의 양파 재배 확산 과정도 전남 무안과 비슷하다. 경남 창녕 영산에 살던 주수홍 씨는 상인들이 일본인을 상대로 양파를 파는 것을 보고는 양파가 돈이 되는 환금성 작물이라 생각했다는 것이다. 이후 일본에서 양파 종자를 구해와서 재배하기 시작한 것이 창녕 양파 재배의 시작이라는 것, 해방 이후에도 소규모 양파재배가 계속되다가 1953년 서울에서 고향으로 내려온 대지면 석리의 성재경 씨가 양파 재배를 하면서 대지면 중심으로 양파 재배면적이 늘어나 현재에 이르고 있다는 것이다.


무안 양파와 창녕 양파 모두 그 시대를 살아낸 농민들의 수고와 애환의 역사임이 분명하다. 농사를 지어 가족들과 먹고살고, 자식 교육도 시켜야 하니 환금성 작물을 잘 선택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을 것이다. 보리농사 보다 양파가 더 돈이 된다고 하니 양파를 심어 조금 더 나은 살림을 꾸려보려고 이리저리 마음이 흔들리는 일을 겪었을 것이라 짐작해 본다. 처음에는 재배기술의 습득이나 종자를 채종 하는 일도 쉽지 않았을 것이고, 경쟁도 생겨나 혼자서는 감당하기 벅차 작목반이나 조합도 만들어야 했으리라. 그래서 이런 이야기에 늘 시작한 사람과 성공한 사람이 등장하는 것은 자신들의 생존을 기억하고 이어가려는 투쟁이기 때문일 것이다.


100년이 훨씬 더 지난 2022년에도 양파를 심는 사람들의 삶은 흔들려 보인다. 최저생산비도 보장받지 못해 올해에만 양파밭을 네 번이나 갈아엎었다는 농민들의 바람은 ‘농사지어서 먹고살게 해 달라’는 것이라는 기사를 또 읽게 된다.





<도시농부를 위한 양파 재배 TIP>


-10월 중순에서 11월 중순 사이에 모종을 심어 겨울을 나게 한다.

모종은 이 시기에 화훼시장이나 종묘상에서 판매한다.

- 포기 간격은 15cm 정도가 적당하며 보온 덮개를 해준다.

- 3월에 양파가 커지면 웃거름을 준다.

- 5월경 양파의 줄기가 70% 이상 쓰러지면 수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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