텃밭에 속사정 ⑳ 무
장다리꽃이 피어야 비로소 봄이었다. 어릴 적, 우리 집 앞마당 한 편에는 제법 큰 은행나무가 있었는데 그 아래에 연보라, 진노랑 장다리꽃이 만발했다. 은행나무가 새 잎을 밀어내기도 전이었다. 분명 그 자리는 상추나 열무 같은 푸성귀를 심는 엄마의 텃밭이었는데, 신기하게도 봄이면 기다란 장다리가 솟아오르고, 꽃이 흐드러지게 피는 꽃밭이 되곤 했던 것이다.
이 꽃밭은 사실 엄마가 무, 배추의 씨를 받기 위해 장다리를 키우는 밭이었다. 연보라는 무꽃, 진노랑은 배추꽃이다. 무, 배추의 씨앗을 받으려면 겨울을 지내야 한다. 배추는 씨를 받을 목적으로 이 밭에 따로 씨를 뿌려둔 것이다. 얼어 죽은 듯 보였지만 봄이 되면 다시 푸른 잎을 펼치고 꽃대를 올린다. 이게 배추 장다리다. 무는 더 신기하다. 초겨울, 김장을 위해 수확한 무 중에서 제일 실한 것 몇을 골라 얼지 않게 땅에 묻어 둔다. 봄이 되면 꺼내서 밭으로 가져가, 무가 심어져 있던 모양 그대로 다시 심는다. 그러면 무청을 잘라냈던 자리에서 또 잎이 나고, 그 가운데에서 기다란 꽃대를 올린다. 그리고 연보라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난다. 이 꽃이 지고 나면 꼬투리가 생기고 씨앗을 맺는다.
지금은 그때그때 씨앗을 사서 쓰니 이렇게 씨앗을 받는 채종포를 보기 어려워졌지만, 예전에는 농촌 집집마다 텃밭 어느 한편에 꼭 자리 잡는 풍경이었다. 엄마는 이렇게 씨앗을 받아 배추며 무를 키워 식탁에 올렸다. 특히나 무는 일 년 내내 식탁에서 빠지는 법이 없었다. 초겨울이면 김장으로 깍두기와 동치미를 담갔다. 무와 무청을 말린 무말랭이와 시래기도 없어서는 안 되는 요긴한 반찬이 됐다. 봄이 오면 열무와 알타리를 심어 먹었고, 여름 무도 심었다. 가난한 밥상이라도 온갖 종류의 무가 있어서 지탱해낼 수 있었으리라. 무 장다리꽃은 그렇게 엄마의 늘어나는 주름과 함께 해를 이어갔다.
이런 무는 언제부터 우리 식탁에 자리 잡았을까?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중국을 통해 들어와 삼국시대 때부터 키워진 것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무를 중국어로는 ‘나복(蘿蔔)’이라고 하는데 지금이 ‘나박김치’라는 이름이 여기에서 유래되었을 것으로 본다.
‘홍길동전’으로 유명한 ‘허균’이 17세기 초에 편찬한 ‘한정록(閑情錄)’ 16권 ‘치농편(治農篇)’에서도 무에 대한 언급을 찾을 수 있다. "무는 다달이 심어 다달이 먹을 수 있다. 땅이 비옥해야 하고 물을 자주 주라. 여러 채소 중 무가 가장 좋다". 당시에도 무가 여러 계절에 걸쳐 심어졌고 다양하게 이용되었음을 유추해 볼 수 있는 대목이다.
1910년대의 기록을 보면, 부산, 대구, 밀양, 서울, 평양 등지에서 무가 많이 재배되었고 이중 ‘서울 무’가 맛이 좋았다고 한다. 특히 동대문 밖의 밭에서 키운 무가 이름나 있었는데 뚝섬에서 나는 무가 단맛이 많아 으뜸으로 쳐주었다고 한다. 이런 토종무들은 일제 강점기에 크기가 큰 일본 무의 도입으로 점차 사라져 갔지만, 사람들은 특별히 ‘조선무’라고 부르며 그 명맥을 유지해오고 있다. 경주의 '계림 '무, 진주의 '진주 대평 무', 전남의 '백양사 무', 그리고 앞서 언급한 '서울 무' 같은 것이지만 이젠 흔히 보기는 어렵다.
해방 이후 신품종으로 개발로 ‘조선무’는 점차 사라져 갔고 최근에 들어서는 대부분 'F1 품종'이 주종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F1 품종은 우리말로는 1대 잡종 품종이라고 하는데 형질이 우수한 부모 종자를 교배해 나온 1세대 자식 종자를 말한다. 이 1세대에는 생장과 발육이 왕성하고 균일한 성질의 농산물을 얻을 수 있다. 이런 특성을 이용해 단기간에 새 품종을 개발할 수 있지만, 씨앗을 받아 다시 심은 2세대, 즉 F2가 되면 다른 형질이 나타나서 F1과는 모양도 다르고 맛도 다른 작물이 돼버린다. 이러니 농민의 입장에서는 씨앗을 받아서 사용할 수 없게 된다. 같은 농작물을 생산해 판매하려면, 종자 회사로부터 매년 씨앗을 구매해야 한다.
최근에는 김장용 무, 저장 무, 동치미 무, 시래기 생산용 무와 같은 용도별로, 또 내한성, 내병성을 가져 키우기가 수월한 재배 특성별로 개량된 F1 무 품종들이 개발되어 보급되고 있다.
이제는 봄이 되었다고, 무 씨앗을 받기 위해 겨울 동안 저장했던 무를 다시 심는 일은 없다. 대부분이 F1 종자니 부질없는 일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식탁에서 무가 없어진 건 아니다. 김장 때면 어김없이 배추 속을 만들고, 깍두기며 동치미를 담근다. 열무나 알타리로 밥상을 채우고, 무말랭이나 시래기는 철을 가리지 않고 구할 수 있다. 심지어 클릭 몇 번이면 단 하룻밤만에 유명 식당 소고기 뭇국이 문 앞으로 배달되는 세상이다. 더 쉽고 편하게 무를 사서 먹을 수 있는 세상이 되었고, 그 시절 만발했던 장다리꽃은 이제는 아련한 기억으로만 남았다.
<도시농부를 위한 김장 무 재배법>
- 8월 중하순에 씨앗으로 심는다. 요즘 도시에선 무 모종도 판매하지만 재배가 안정적이지 않아 추천하지 않는다.
- 퇴비를 충분히 넣은 밭에 30cm 간격으로 구멍을 파고 무 씨앗 3알을 넣어 흙을 덮어준다.
- 본잎이 나오면 실한 것 하나를 남기고 솎아주도록 한다.
- 11월 중순 서리가 내리기 전에 수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