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이라고 하면 딱 떠오르는 풍경이 하나 있다. 논두렁 밭두렁이 구불구불 이어져 있고 큰길에서 마을로 들어가는 갈림길에는 수백 년 그 자리에 오롯이 있었다는 느티나무가 우뚝 서 있는 모습이다. 요즘의 건널목 신호등 앞 그늘용 파라솔보다 최소 열 배쯤은 더 커다란 그 느티나무 아래에는 평상이 하나 놓여있고, 노인들이 모여 앉아 장기를 두거나 부채를 부치고 있는 모습이 더해지면 이 머릿속 풍경이 완성된다.
하지만 이건 내가 경험한 풍경이 아니다. 아마도 어릴 적 텔레비전에서 보았던 ‘전원일기’ 같은 농촌 드라마나 '6시 내 고향‘ 같은 방송에서 본 것을 기억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이렇게 마을, 논밭, 느티나무로 이루어진 풍경을 실제 본적은 스물이 넘어서 전라도 어디쯤으로 갔던 ’ 농촌활동‘ 때였을 것이다. ’이런 풍경이 진짜 있구나 ‘ 했었다.
내가 자란 경기도 파주도 논밭이 굽이굽이 있고 마을이 있지만 커다란 느티나무는 없었다. 통일로 주변으로 미군부대와 한국군 부대가 줄줄이 이어져 있고, 이 부대들을 중심으로 마을들이 자리 잡았기 때문에 느티나무가 있을 법한 곳은 군대의 위병소(衛兵所)가 차지하고 있었다. 주말이면 읍내에는 쏟아져 나온 미군들과 외출이나 외박을 나온 군인들, 총을 든 헌병들이 열을 맞춰 순찰을 돌았다. 읍면리로 부르는 지명은 똑같지만 다른 지역, 시골과는 완벽하게 다른 곳이었다.
그래도 수백 년 된 느티나무를 볼 수 있는 곳이 파주에도 있었는데 바로 ‘자운서원(紫雲書院)’이다. 이곳은 율곡 이이 선생의 업적을 기리고자 광해군 7년(1615년) 창건되고, 효종 원년(1650년) 사액을 받은 사액서원이다. 하지만 고종 5년(1868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철거되었다가 1970년대 복원되어 지금에 이른다. 율곡 선생과 양친의 묘, 그러니깐 신사임당의 묘도 이곳에 있지만 우리나라 화폐에도 등장하는 두 분의 지명도에 비해 관광지나 유적지로 크게 알려지지는 않았다. 지금은 복원된 서원 건물들과 기념관 등으로 구성된 ‘율곡선생 유적지’ 이지만 이전에는 작은 마을이 있었는데 1970년대 복원사업 당시 인근으로 이주하였다. 이런 역사를 고스란히 지켜본 것은 유생들이 공부하던 건물인 ‘강인당’ 양쪽에 자리 잡은 수령 450년의 느티나무 두 그루다. 내 주변에 별로 많지 않았던 작은 평화 공간이 이 느티나무 그늘이었다.
자운서원의 느티나무
느티나무는 우리나라에서 오랜 세월 동안 자리 잡은 나무다. 보통 20미터 이상 자라고 둘레는 3미터가량이 된다. 수령 천년이 넘는 고목도 이십여 그루나 된다. 꿋꿋하게 잘 자라며 넓은 가지와 잎으로 커다란 그늘을 만들어 주는 정자나무로 마을의 희로애락을 함께 했다. 뿐만 아니라 장롱과 밥상, 뒤주와 도마도 느티나무로 만들었으니 사람들 사연은 느티나무가 더 잘 알고 있지도 모른다.
건축용으로 소나무가 많이 쓰였을 것이라 생각하지만 오랜 세월을 지켜온 것은 느티나무다. 그 유명한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의 배흘림기둥이 느티나무고, 구례 화엄사 대웅전과 합천 해인사의 팔만대장경을 보관하는 법조전도 느티나무로 지어졌다.
부석사 무량수전의 배흘림기둥
화엄사 대웅전
며칠 전 공방 회원들과 함께 도마용 나무를 사러 갔다. 몇 차례 방문하면서 늘 느티나무 한두 점을 샀는데 이번에도 어김없이 하나 골랐다. 단단해서 휘거나 썩는 일이 적고, 칼자국이 잘나지 않기 때문에 국물이 스며드는 것도 적어 도마로 이점이 많다고 하는데 사실 내가 느티나무를 선택하는 이유는 다른데 있다. 굽이굽이 흐르며 켜켜이 쌓인 느티나무의 무늬 때문이다.
이번에는 내가 직접 사용할 요량으로 도마를 만들었다. 오일로 마감을 하고 ‘환대’라고 새겨 넣었다. 도마를 쓸 때마다 늘 그곳에 있는 느티나무 같은 '환대(歡待)’를 이루는 제법 거창한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