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황반장 Jul 06. 2022

제주도에는 녹나무가 자란다.

사적 목공 에세이 ③ 녹나무 (Camphor Tree)

제주도는 늘 설레는 곳이다. 처음 비행기를 타고 제주도에 내린 것이 언제인지 가물가물 하지만 가슴이 두근두근했던 기억만은 또렷하다. 공항에서 내려 처음 보는 이국적인 풍경에는 한 번도 실물을 본 적이 없는 야자수도 한몫했었다. 가지는 없고 높게 자라난 기둥 끝에 커다란 빗자루 같은 잎이 사방으로 달려 있는 모습이 얼마나 생경하고 신기했던지. 심지어 제주도에 심겨 있는 것의 이름은 ‘워싱턴 야자수’다. 높은 태양과 속이 다 들어다 보이는 맑고 푸른 바닷가, 그리고 그 해변에 야자수가 서있는 풍경이 열대의 이국(異國)이라고 굳게 믿고 있던 때이니, 제주도의 야자수는 바다 건너 머나먼 어딘가에 도착했다는 느낌을 충만하게 해 주었던 것이리라.


사실 야자수는 제주도에서 자라던 식물이 아니다. 1980년대에 관광객의 이목을 끌 요량으로 집중적으로 심어진 것이 이제는 제주도를 대표하는 풍경이 되어버린 것이다. 약간의 배신감 같은 걸 느낄 수도 있지만, 제주도에 많은 관광객들이 찾아와 주실 바라는 마음으로 땀 흘려 야자수를 심은 이들이 있을 것이고, 또 그 기대에 부응하듯 많은 사람들이 이국적 청량감을 느낄 수 있었으니 너그러이 지나쳐도 되지 않을까 싶다.   


이상하게도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제주도를 상징하는 나무는 ‘녹나무’다. 우리나라에서는 거의 제주도에서만 자생한다. '장뇌목‘ 이라고도 부르며 사시사철 푸른 상록수다. 제주도에는 녹나무에 대해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가 많다. 대표적인 것이 녹나무가 귀신이 들오는 것을 막기 때문에 집안에는 심지 않았다는 것이다. 언듯 들으면 이상한 점이 있다. 오히려 귀신을 막기 위해서 집안에 심어야 하는 거 아닌가 싶은데, 이러면 제사 때 조상들이 찾아오지 못하게 되니 안된다는 이야기다. 아마도 제주도 귀신들은 사람을 해치지는 않았나 보다 생각하게 된다. 녹나무 가지와 잎을 깐 방에 아픈 사람을 눕히고 녹나무로 불을 때 주면 병이 낫는다는 이야기도 전해지며, 위험한 바다에 들어가야 하는 해녀들은 녹나무로 각종 작업도구를 만들어 사용해 액운을 막았다고 한다. 증빙을 할 수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먹고사는 일에서부터 조상의 제사까지 제주도 삶의 구석구석에 녹나무가 자리 잡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연유로 제주도를 상징하는 ‘도목(道木)’으로 지정된 것이라 유추해본다.


서귀포시 도순동 210번지 일대에는 녹나무 자생 군락지가 있는데 이미 1964년에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바 있다. 녹나무를 볼 수 있는 관광지로는 ‘삼성혈(三姓穴)’을 들 수 있다. ‘고을나’, ‘양을나’, ‘부을나’, 세분의 ‘삼신인(三神人)’이 태어나 탐라왕국을 만들었다는 신화를 간직한 이곳을 오랜 세월 지켜온 나무가 바로 녹나무다. ‘면형의 집’으로 더 알려진 서귀포시 서홍동의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 제주 피정센터’ 앞뜰에는 높이 16.5m, 둘레 4m의 녹나무가 있고, 제주시 삼도이동에 위치한 (구) 제주의료원에도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커다란 녹나무 두 그루를 볼 수 있다. 제주올레 12코스가 지나는 서귀포시 대정읍 신도리에는 ‘녹남봉’이라는 작은 오름이 있다. ‘녹낭’이 자라는 봉우리라는 뜻인데, 이름에서 눈치챌 수 있듯이 녹나무가 아주 많은 오름이었다고 한다. 현재는 이름처럼 녹나무가 많지 않은데 1947년 제주 4.3 항쟁 당시 불태워져 대부분 소실되었고, 이후 살아남은 것들과 새로 심어진 것들이 자라고 있는 것이다.



제주시 삼도이동의 녹나무 (이미지 출처-문화재청 국가 문화유산 포털)


도순리 녹나무 자생지 (이미지 출처 - 문화재청 국가 문화유산 포털)


녹나무는 우리나라의 제주도와 남해의 일부, 일본, 대만, 중국 남부, 인도네시아 등에서 자생하는 나무다. 높이는 20m, 둘레는 5m 이상 자란다. 우리나라에서는 ‘녹나무’, 일본에서는 ‘쿠스노키(クスノキ)’라 하고 영어로는 흔히 ‘캄포(Camphor Tree)’라고 부른다. 특유의 모습과 독특한 향을 가지고 있어서 다른 나무와 쉽게 구별되는 편이다. 녹나무 원목, 가지, 잎을 수증기로 증류하면 얻을 수 있는 기름을 ‘장뇌(樟腦)’라고 하는데 향료와 방충제, 의약품을 만드는 원료가 된다. 이 ‘장뇌’가 영어 이름으로 ‘캄포(Camphor)’다. 진통, 소염작용이 있어 우리가 잘 아는 물파스의 원료이고 동남아 여행 가면 하나씩 사 오는 호랑이 연고(Tiger Balm)도 이 녹나무 장뇌로 만든 것이다. 의약품 말고도 영화 필름의 원료로 사용되기도 한다. 수요가 많아 장뇌 산업도 발전했는데 특히 대만은 풍부한 녹나무 자원을 가지고 있어 천연 장뇌 산업이 매우 발달했었다.


일본은 이 ‘쿠스노키(クスノキ)’ 즉 녹나무를 상당히 신성시하는데 우리도 잘 아는 애니메이션 ‘이웃의 토토로’에 그 면모가 드러난다. ‘토토로’가 살고 있는 곳이며, 토토로가 '사츠키’와 ‘메이’를 태우고 날아 오르는 장면에 등장하는 거대한 나무가 바로 녹나무다. 마을을 지키는 나무로 우리나라의 당산나무 같은 의미를 가진 것처럼 그려졌다. 제주 올레를 벤치마킹한 ‘규슈 올레’에서 만날 수 있는 ‘다케오 신사 거대 녹나무(武雄の大楠)’도 그중 하나이고 ‘오키나와’의 신사 근처에서 많은 볼 수 있는 녹나무들도 그렇다. 하지만 녹나무에 자신들의 안녕과 평화를 기원했던 것과는 달리 일본은 대만에서 녹나무를 차지하기 위한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다. 청일전쟁 이후 대만을 점령하고 총독부를 세운 일본은 녹나무를 이용한 장뇌 생산을 독점하기 위한 여러 사건을 벌였다. 녹나무 벌채를 금지하고 이곳 원주민들을 강제 이주시키는 과정에서 대규모 학살을 자행하기도 했으니 그 기원(祈願)이라는 게 오직 자신들만을 향하였다면 무슨 소용일까 묻지 않을 수 없다.  


목공에서는 거의 대부분 ‘캄포’라는 명칭을 쓴다. 원목 도마에 좀 관심이 있는 사람들도 대부분 ‘캄포’라고만 알고 있지 녹나무는 오히려 생소하다. 아마도 호주산 캄포 원목이 워낙 유명세를 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제주도를 비롯한 동아시아가 원산지인 녹나무가 호주로 전래된 것은 1820년 즈음으로 알려져 있는데 녹나무가 자라기 좋은 환경 때문에 호주 전역에 급격히 퍼져나갔다고 한다. 환경적인 문제가 야기될 정도로 많은 개체가 자라나자 호주는 이 캄포를 목재로 활용하면서 적극적인 수출정책도 펴게 된다. 많은 양의 목재가 쏟아지니 가격도 하락하게 되었다. 아마도 미국 기업 듀퐁이 화학적으로 '장뇌'를 합성해 대량생산이 가능해진 것도 캄포를 목재로 사용하게 된 하나의 원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이런 관계로 다양한 캄포 목제품이 양산되기 시작했다. 우리나라에도 몇 년 전부터 호주산 캄포 도마와 목제품들의 인기가 높은데 그 뒤에는 이런 사연이 있다.


목공방 입구에서부터 특유의 짙은 향이 풍기면 누군가가 ‘캄포’ 원목으로 작업을 하고 있는 것이다. 공방 앞을 지나는 사람들도 느낄 정도로 향이 강하다. 나도 늘 느티나무 도마만 만들지 말고 다양한 수종으로 작업을 해보자 생각하고 있었는데  때마침 캄포원목 몇 점을 얻게되었다. 역시나 캄포는 나뭇결의 색상 차이가 도드라지고 화려하다. 소위 '빵도마'라고 부르는 '플레이팅 보드'로 좋은 나무다. 잘 다듬고 오일 마감을 해놓고 곰곰이 생각하다가 ‘평화’라고 새겨 넣기로 했다. 살아가는 일들에 치어 이제는 좀 어색한 단어가 되었지만, 그래도 녹나무 숲에는 평화만이 그토록 푸르기를.




이전 02화 나는 참나무가 애달프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