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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명희 Aug 30. 2023

미국 방송을 보며

좋기도 하고 염려도 되고

미국에 살 땐 한국이 그리웠고 한국에 살면서 미국이 그립다. 비록 한국 뉴스에 나오는 미국은 총기사고나 자연재해 등 안 좋은 소식 밖에 없지만 미국은 여전히 내게 정다운 나라다. 더구나 아들을 비롯해 친척들이 살고 있어서 총기 사고나 동양인 혐오 범죄가 일어났다고 하면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면 세상의 모든 무기를 없애고 싶지만 미국의 경우 총기 소유가 헌법에 명시된 권리고 미국 문화라고 생각한다니 그곳에 살려면 어쩌겠나? 그렇게 사는 거다. 동양인 혐오는? 법으로 해결하고 교육하고 무식한 사람은 어쩔 수 없고. 이렇게 불편한 게 많은 미국이지만 나의 20-30대를 간직한 곳이라 좋은 기억이 많다.   


얼마 전에 미국에 갔다 왔다. 겉으로는 크게 달라진 게 없는 것 같았다. 길이나 집들이 전보다 조금 낡았을 뿐 여전히 조용했다. 큰 도시에서 30-40분 정도만 가면 길도 한가하고 쇼핑하는 사람도 많지 않아 심심할 정도였다. 20-30대에 미국에 살았었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직장에 다녔었다. 30대 중반에 한국에 왔다가 40대 초반에 다시 미국에 가서 학위를 받고 돌아왔다. 많은 경우 남편 없이 혼자서 여기저기 돌아다녀야 했다. 심지어 학교 일로 저소득층이 사는 동네도 방문했다. 혼자 살던 흑인 할머니는 아들이 마약을 해서 걱정이라고 했다. 아들을 만났지만 특별히 위협적이지 않았다. 돌이켜 생각하니 용감했다.


미국이 정답게 느껴지는 이유 중에 하나는 티브이 프로그램이 잘 바뀌지 않아서다. 물론 새로운 프로그램을 많이 만들어지겠지만 지상파 방송국(ABC NBC CBS 등) 아침 쇼는 앵커를 잘 바꾸지 않아 오랜만에 티브이를 봐도 같은 얼굴을 보는 게 좋다. 특히 NBC 투데이(Today) 쇼에서 일기예보를 담당하는 알 로커(Al Roker)는 1996년부터 방송을 진행하는데 이번에 보니 확실히 나이 들어 살이 빠지고 전보다 목소리가 쇠약해졌지만 여전히 밝은 모습으로 일기예보를 전달하고 있어서 반가웠다. 또한, 특정 채널을 틀면 90년대에 방영했던 시트콤 싸인펠드 (Seinfeld), 프레지어(Frasier), 더 골든 걸 (The Golden Girls)부터 수사극 로우 앤 오더 (Law and Order)까지 옛날에 봤던 걸 계속 볼 수 있는데 이상하게 그런 방송을 보면 마음이 편해진다.


나이가 들어서 그런 것 같다. 나이가 들면 변화가 싫다. 싫다기보다 두려운지도 모르겠다. 젊을 때는 새로운 곳에 가서 살 생각도 하고 새로운 기기가 나오면 얼른 사서 배웠다. 그래서 미국에 가서 살기도 했고 개인 컴퓨터가 처음 나왔을 때 거금을 투자해서 열심히 활용했다. 그러나 이제는 한국에서 사는 게 편하고 컴퓨터나 핸드폰도 고장만 나지 않는다면 굳이 바꿀 필요를 못 느낀다. 그러나 벌써부터 너무 편한 것에 집착하면 앞으로 20-30년은 더 살 수 있을 텐데 새로운 걸 경험하지 못할 거다. 사실 새로 나온 기술이 얼마나 시간을 절약해 주나! 핸드폰으로 단어, 정보, 연락을 편하게 할 수 있고 ChatGPT도 재미있다. 한편 절약한 시간만큼 낭비하게 만드는 부분도 없지 않다. 잠깐 핸드폰을 확인한 것 같은데 금세 30분이 훌쩍 지난다. 책을 읽고 글을 써야 할 시간에 편하게 영상에 빠지게 된다. 아무리 영상을 통해 새로운 걸 배운다고 해도 좋지 않은 습관인데... 알면서도 보게 된다. 



시차 적응이 안 된다는 핑계로 저녁 늦게 티브이를 켰더니 전에 보지 못한 프로가 나왔다. 아이크라임(icrime). 사람들이 보낸 범죄 동영상으로 만든 프로였다. 첫 번째 사건. 신호 대기 중에 뒤차가 앞 차를 살짝 박았다. 뒤차 운전자는 앞차 운전자가 괜찮은지 확인하려고 문을 열고 나갔는데 앞차 운전자는 갑자기 뒤차 운전자에게 주먹을 날리기 시작했다. 너무 놀란 뒤차 운전자가 자차로 돌아와 문을 잠그자 앞차 운전자는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다른 사람이 건네준 총까지 들고 갔다. "하지 마. 하지 마." 여성이 간절히 말렸다. 다행히 총은 사용하지 않았지만 뒤쪽 운전자는 병원에 가서 머리를 꿰매고 앞차 운전자는 상해죄로 검거됐다. 다음 영상은 패스트푸드 점에서 일어났다. 여성 손님이 여성 종업원을 구타했다. 이유는 손님이 원하는 세 가지 맛 슬러쉬를 가게 규칙상 못 만들어준다고 해서다. 두 가지 맛 슬러쉬는 메뉴에 있었지만 세 가지 맛은 메뉴에 없었다. 손님은 직원 전용 공간에 들어가서 직원의 머리와 몸을 가격하고 말리는 매니저도 구타했다. 경찰이 오자 조금 진정됐는지 뒤늦은 사과를 했지만 체포됐다. 그다음 영상은 대형 몰 안에 있던 세포라 화장품 가게에서 향수를 훔치는 장면이었다. 도둑 일당은 순식간에 가장 비싼 향수를 싹쓸이해서 도망갔다. 마지막 영상은 가정 폭력에 관한 거였다. 누군가 차를 발로 차며 내리라고 소리친다. 차 안에는 여성과 아이들이 있었다. 소리 지르는 사람은 남편이고 위협당하는 여성은 아내였다. 알코올 중독자인 가장은 장을 보려는 아내에게 술 살 돈을 내놓으라고 위협했다. 프로그램을 마치며 진행자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당신의 비디오를 보고 싶습니다. icrime.tv로 보내주세요. 당부합니다. 경계하고 기록을 세우세요."


왜 이런 걸 만들었을까? 범인을 검거하는 증거 자료는 될 수 있을 거다. 그러나 범죄 예방은 의문이다. 폭력적 범행을 하는 사람은 근본적으로 정신 상태가 온전하지 못하다. 그런 사람이 '누가 날 찍고 있을지도 모르니 범죄를 저지르지 말아야지'라고 생각하겠나? 오히려 '기록을 세우기' 위해 더 잔인한 폭력을 휘두를 수도 있다. 모방 범죄가 일어날 수 있다. 세상이 더 무섭다고 느껴서 총기를 구입할 수 있다. 그래서 만들었나? 물론 아니겠지만 미국 사람들이 잔인함에 무디어지지 않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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