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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명희 Oct 15. 2023

좋은 친구란 무엇일까?

<<나의 빛나는 친구>>을 중심으로

옛날 한국 연속극은 단순해서 보기 편했다. 가난하지만 똑똑하고 지혜롭고 성실하고 잘 생긴 주인공이 부잣집 사람을 만나 모든 시련을 극복하고 결혼해서 잘 살게 되었다. 비록 현실에서 모든 걸 갖춘 사람을 만나거나 가난한 사람이 부자가 될 확률은 로또에 당첨되는 것만큼 희박하겠지만 여전히 그런 동화 같은 이야기가 좋다. 그래서 엘레나 페란테(Elena Ferrante)의 <<나의 빛나는 친구(My Brilliant Friend)>>에 금방 빠져 들 수 있었다. 리라와 레누는 반에서 1등과 2등이다. 리라는 다른 친구들이 알파벳을 배울 때 벌써 글씨를 써서 선생님을 놀라게 했다. 어디서 배웠니? 혼자서요. 리라는 누구도 따라올 수 없을 만큼 영민했다. 레누는 2등을 놓치지 않기 위해 성실히 공부했다. 선생님은 리라와 레누의 부모에게 중학교 진학을 설득했다. 둘 다 가난했지만 레누는 중학교에 진학하고 리라는 가지 못했다. 1944년 나폴리 시골 동네에서 태어난 두 아이가 6살부터 16살까지 자라가는 줄거리만 따라가면 한국 연속극 같은 성장 소설이다. 그러나 이야기는 66세 리라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데서 시작한다. 레누의 말이 의미심장하다. "누가 이기나 보자." 레누가 들려주는 어린 시절 이야기엔 두 소녀의 미묘한 경쟁과 우정, 자산 정도에 따라 위계화된 마을, 다양한 폭력에 노출된 아이들과 주변 인물이 어디서 들어본 이야기 같으면서도 낯설다. 


처음에는 레누가 리라에게 집착했다. 학교 가는 게 너무 좋아서 공부를 열심히 했던 레누는 말썽을 피우는 리라가 자기보다 공부를 더 잘해서 놀랐다. 지능이 선천적 결과인지 후천적 결과인자 늘 논란의 중심에 있지만 지금까지 연구된 바로는 80% 가까이 유전자의 영향을 받는다고 한다. 리라는 레누보다 좀 더 선천적으로 지능이 높았던 것 같지만 레누도 리라의 천재성을 알아보고 꼭 붙어서 배워야겠다고 생각한 걸 보면 다중지능 측면에서 인간친화지능이 높았던 것 같다. 그러나 교육도 중요했다. 중학교에 진학한 레누는 시간이 지날수록 도약했다. 모든 선생님이 칭찬할 만큼 글도 잘 쓰고 리라보다 책도 더 많이 읽었다. 그러나 이런 아이들도 마을에서 가장 부자였던 돈 아칠레(Don Achille)의 막내아들에게 지는 척해야 했다. 어른들이 그 집 사람들 심기를 건드리는 일을 하지 않는다는 불문율이 있어서 아이들도 멋모르고 따라 했다. 리라와 레누도 부자가 되고 싶었다. 공부를 열심히 해서 루이사 메이 알코드(Louisa May Alcott)처럼 유명한 작가가 되어 부자가 되는 꿈을 꾼다.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리라는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 읽고 혼자서 라틴어와 그리스어를 학습해서 레누를 도와줄 만큼 잘했지만, 돈 아칠레의 큰 아들 스테파노와 결혼하기로 한 후 레누와 책을 읽으며 토론하기를 멈췄다. 


리라는 스테파노뿐만 아니라 동네의 모든 청년이 좋아했다. 사실 어릴 때는 금발에 파란 눈을 가진 레누가 리라보다 예뻤다. 그러나 사춘기에 접어들며 리라는 살이 찌고 여드름이 나서 밖에 나가고 싶지 않을 정도였다. 게다가 고등학생이 되고 안경까지 껴야 했다. 반면 리라는 어릴 때 깡마르고 가무잡잡해서 아무도 관심을 주지 않았는데 갑자기 세련된 얼굴과 날씬한 몸매의 숙녀로 자라 도시에 가도 사람들이 쳐다볼 정도였다. 레누가 열심히 공부해서 모든 과목에서 만점을 받는 동안 리라는 동네에서 가장 부자인 두 집 아들에게서 구애를 받았다. 레누는 전처럼 리라와 학교 이야기 책 이야기를 학고 싶었지만 리라는 변했다. 레누가 종교과목 시간에 의문이 갔던 이론에 대한 질문을 하자 리라는 이렇게 말했다. "레누, 너는 아직도 그런 것에 시간낭비하고 있니?... 우리를 아프게 하고 죽게 만드는 미생물은 어디에나 있어. 전쟁이 있어. 우리 모두를 잔인하게 만드는 가난이 있어. 매초마다 눈물을 흘릴 만큼 고통을 안겨줄 일이 일어날 수도 있어. 그런데 넌 뭐 하는 거야? 성령이 무엇인지 이해하려는 신학 수업? 됐어. 세상을 만든 사람은 성부, 성자, 성령이 아니라 악마야. 스테파노가 준  진주목걸이를 보고 싶니?"(p. 261). 과연 리라가 정말 학문에 관심이 사라진 걸까? 왜 리라는 겨우 열여섯 살에 결혼을 선택했을까? 


지금도 이런 선택을 하는 사람이 있을 거다. 가난한 가족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사람. 중학교에 가고 싶다고 박박 우기는 딸을 창문 밖으로 "물건처럼"(p. 82) 던저서 팔을 부러뜨린 아버지. 구두 제조를 더 이상 하지 않겠다고 하자 손찌검을 했던 오빠. 리라는 이런 가족을 지킬 사람은 자신 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올리비에로 선생님은 리라의 선택이 못마땅했다. "리라는 어린 시절 가지고 있던 아름다운 지성이 출구를 찾지 못하고 얼굴, 가슴, 허벅지, 엉덩이로 갔어. 그런 건 마치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곧 사라지는 건데 말이야."(p. 277). 리라를 좋아했던 공사장 노동자 파스칼도 리라가 스테파노와 결혼하는 건 "자신을 판" 행위이며 리라를 비롯한 온 가족이 어용(kept) 신세가 될 거라고 비난했다. 리라도 당연히 알고 있었다. 아니 마을에서 가장 똑똑한 리라가 왜 자신의 선택을 고민하지 않았겠나? 그래서 레누에게 말한다. "내가 결혼하는 게 실수라고 생각하니?... 넌 무슨 일이 있어도 계속 공부해. 절대 멈추지 마. 내가 돈을 줄 테니 계속 공부해... 넌 나의 빛나는 친구야. 넌 모든 남자 여자 중에서 최고가 되어야 해." 레누는 리라 결혼식에 온 동네 사람을 보며 비로소 올리비에로 선생님이 말한 서민(plebs)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명확히 알게 된다. 그러나 과연 레누는 교육을 통해 가난을 벗어날 수 있을까? 


피에르 부르디외(Pierre Bourdieu)는 개인이 어떤 집단이나 계층에 속하면 그룹의 문화, 가치관, 실천 방식 등이 내재화된 아비투스(habitus)를 갖게 되고 어떤 상황을 인식학고 행동을 선택할 때 무의식적으로 적용한다고 했다. 따라서 아비투스는 사회생활의 관행과 규제를 만들어 개인이 자신의 조건에서 할 수 있는 걸 원하고 할 수 없는 걸 포기하게 만들어 사회적 재생산에 기여한다고 했다. 그래서 리라와 레누처럼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면 공부하기가 더 쉽지 않았을 거다. 공부보다 한 푼이라도 더 벌어서 집에 보탬이 되는 게 옳다고 생각할 수 있다. 리라 아버지도 동네 사람에게 리라가 똑똑하다고 자랑하면서도 여성은 교육받을 권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왜 여자인 네 동생이 학교에 가야 하니?"(p. 69). 그건 레누 엄마도 마찬가지였다. 레누가 만점을 받은 성적표를 보여줘도 "의미 없고 시간 낭비 한다"(p. 315)고 생각하며 스테파노와 결혼하게 된 리라를 부러워했다. 과거 한국도 이런 때가 있었는데 지금은 전 국민이 대학교육에 너무 많은 가치를 부여해서 이 또한 사회적 이동을 어렵게 만드는 게 아닌 가 싶다. 2023년 인터넷에 나온 와이스보터(wisevoter) 통계에 따르면 한국이 전문대학교 이상 고등교육을 마친 사람의 비중이 69%로 세계에서 1위였다. 반면 이태리는 28%에 그쳐서 놀랐다. 


리라와 레누를 보면 알 수 있듯이 교육은 중요하다. 아무리 똑똑하게 태어났어도 교육을 받지 않으면 역량을 충분히 발휘할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의 교육열은 나쁘다고 볼 수 없다. 그러나 그렇게 공부를 많이 한 사람들이 책을 많이 읽지 않는다는 건 아이러니하다. 이 책에서 어린 시절을 가장 많이 떠올리게 하는 부분은 두 소녀가 책을 읽으며 많은 이야기를 나눈 거다. 중고등학교 때 몇몇 친구와 세계 명작 소설과 한국 근대 소설을 읽었던 게 기억난다. 당시 책을 무척 좋아하던 친구가 있었는데 그 아이가 소설 이야기 하는 게 멋있어 보여서 잘 이해하지 못하면서 경쟁적으로 읽었다. 돌이켜보니 내게 좋은 친구란 앤(제인 오스틴의 소설 <<설득(persuasion)>>의 주인공)이 말한 것처럼 “영리하고 박식하며 많은 대화를 나누는 사람”이었다. 리라와 레누도 그랬던 것 같다. 앞으로 이 둘은 어떻게 될까? 엘레나 페란테는 이 책을 시작으로 리라와 레누 이야기를 3권 더 썼다. 작가의 실제 이름은 모른다. 엘레나 페란테는 필명이다. 다만 작가가 나폴리에서 자랐고 소설 속 레누가 엘레나라는 공식 이름도 있어서 소설은 작가의 어릴 적 경험이 아닐까 싶다.  


<참고문헌>

Ferrante, E. (2021). My Brillian Friend (A. Goldstein, Trans.). Europa Editions. (Original work published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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