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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명희 May 12. 2024

19세기 단편 속 썸

『수치스러운 사건』

보통 썸타기는 본격적으로 연애를 시작하기 전에 호감이 가는 이성을 알아가는 과정으로 대략 몇 주에서 6개월을 넘기지 않는다고 한다. 구체적으로 썸 타는 단계를 설명하는 글을 보니 첫 단계는 마음에 드는 누군가를 '인지'하고, 그다음엔 호기심이 생겨서 호감 가는 사람에게 둘만의 대화를 유도하고, 세 번째 단계에선 좋아하는 사람이 자신을 좋아하도록 교감한단다. 케이트 쇼팽(Kate Chopin)의『수치스러운 사건(A Shameful Affair)』을 읽으면 20살 밀드레드가 동갑내기 프레드에게 썸타기를 시도한다. 특히 나무위키에 나온 최성호 교수(경희대학교 철학과)의  썸타기 해석은 밀드레드의 마음을 묘사하는 것 같다. "썸타기는... 상대방에 대한 자신의 마음의 불확실성이다. 즉 상대방에게 끌리는 자신의 마음을 자신의 자아로 수용할지, 혹은 탈법적인 침입으로 간주할지 결정하지 못한 상태". 밀드레드가 딱 그랬다.  


밀드레드는 가족과 함께 여름 휴양지로 유명한 내러간셋으로 가는 대신 혼자서 한적한 시골 농장에 간다. 이미 많은 남성의 구애를 거절하고 "인생은 지루한 연애사건이란 확신"을 내리고 있던 터라 브라우닝이나 입센의 책을 읽으며 농장 일꾼들에겐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가 난간에 아무렇게나 놓은 종이가 날아가자 인부 중 한 명이 집어 준다. 잘생겼다. 썸의 '인지'가 시작됐다. 그리고 밀드레드는 며칠간 그를 관찰한다. 금발의 파란 눈, 태양에 그을린 갈색 피부, 넓은 어깨, 튼튼하고 깨끗한 팔다리. 그저 편한 작업복을 입었을 뿐인데 멋지다. 문제는 프레드의 무반응이다. 밀드레드는 프레드가 지나칠 때마다 "동정하는 듯한 작은 미소"로 신호를 보내지만 프레드는 쳐다보지 않는다. 하여 "사탄이 개입하지 않았다면 그 일에 잠시도 몰두하지 않았을 텐데... 여름이고, 딱히 할 일도 없고, 화도 나서 수치스러운 일을 시작했다”라고 고백한다.


그녀는 아마도 이렇게 생각했을 거다. 도시에서 나를 따라다니는 남자가 얼마나 많은데... 예쁘고 똑똑한 내가 그렇게 눈길을 줬건만 어떻게 한 번도 쳐다보지 않지? 프레드, 넌 누구니? 그래서 소위 심리학에서 말하는 반동 형성 방어메커니즘이 발동한다. 마치 어린아이가 좋아하는 아이에게 부러 싫어하는 척하듯이 농장 여주인에게 이렇게 말한다. “그 사람(프레드)은 정말 기분 나빠 보이는 사람이에요. 알지도 못하는 사람을 곁에 두는 건 무서울 것 같아요”. 여주인은 밀드레드의 의도를 눈치채지 못하고 그녀가 아이처럼 사람을 무서워하는 줄 몰랐다고 한다. 밀드레드는 겁쟁이가 아니라는 걸 보여준다며 교회에 갈 때 프레드에게 마차를 끌게 해달라고 부탁한다. 그러나 프레드가 일요일엔 낚시하러 가야 해서 다른 사람을 보내준다고 하자 밀드레드는 교회에 못 가게 됐다고 둘러대고 낚시터로 간다. 둘만의 시간을 갖고 싶은 썸타기 2단계로 접어든 거다. 


뭐, 그다음은 연속극에 나오는 장면이 연출된다. 밀드레드는 낚시를 한 번 해보겠다고 하고, 프레드가 밀드레드를 도와주며 낚싯대를 잡는다는 게 그만 그녀의 손을 잡게 되고 순식간에 키스를 한다. 밀드레드가 키스까지 원했던 건 아닐 수 있다. 그러나 “그 키스가 그녀가 20년 동안 살면서 알았던 것 중 가장 달콤한 것”이어서 혼란스럽다. 한편 프레드는 보통 농장 인부가 아니다. 밀드레드 친구의 편지 내용으로 보아 취미로 막노동을 하는 중산층 청년 같다. 그러나 밀드레드는 키스 때문에 “삶의 외적 조건을 굽히지 않을 거다"라고 다짐한다. 설사 프레드가 중산층이어도 고학력에 고상한 취미를 가진 밀드레드와 결이 다르다. 그녀가 좋아하는 책도 안 읽는다. "단답형으로 대답"하는 프레드가 "바보"같다. 황혼이 깃든 좁고 긴 밀밭 길에서 두 사람은 마지막 대화를 나눈다. 밀드레드. “... 그런 일이 있었다는 사실을 잊고 싶어요...” 프레드. “... 그럼 언젠가 가해자를 용서해 줄 수 있나요?...”밀드레드 “언젠가, 제가 제 자신을 용서하고 나서 그럴지도 모르죠.”


결국 밀드레드는 프레드와 키스하고 "독침이... 입술에서 떠나지 않은" 강한 끌림을 경험했지만 자신과 사회적 신분이 다른 프레드와 사귀지 않기로 결정한다. 이처럼 사람은 썸이 됐든 연애가 됐는 이성교제를 통해 자신의 가치관을 확인하게 된다. 어려운 건 만남을 시작할 때보다 헤어질 때일 텐데, 썸은 연애보다 마음을 덜 다치게 하는 이점이 있는 것 같다. 프레드도 밀드레드랑 사귄 게 아니어서 갑자기 키스한 자신의 행동을 뉘우칠 뿐 밀드레드에게 미련은 없는 것 같다. 아니면 일부러 관심 없는 척해서 그녀가 낚시터까지 쫓아오도록 했나? 아닐 거다. 밀드레드가 자신의 미모를 몰라보는 프레드를 꼬드겨 놓고 제 발이 저려 호들갑이다. 그러나 20살이지 않나? 그때는 앞뒤 안 가리고 누군가를 좋아할 수 있다. 어릴 때 잘 생긴 사람에게 반해보지 않은 사람이 몇 명이나 있겠나? 중요한 건 서로에게 솔직하고 상대방에게 끌려다니지 않는 거다.  


나의 20대를 돌이켜보니 나는 잘 생기고 똑똑한 남성에 대한 콤플렉스가 있었던 것 같다. 주변에서 그런 어른들이 아내에게 잘못하는 걸 보고 자라서 그런 남성을 다 한통속으로 싸잡아 혼내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공부 잘하고 준수한 사람들만 골라 사귀다가 조금이라도 잘난척하는 모습이 감지되면 일말의 여지도 없이 헤어졌다. 내가 사귄 모범생들은 한 명만 빼고 모두 쿨하게 이별을 받아들였다. 오히려 나처럼 자기주장이 강한 사람과 헤어지게 되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나머지 한 명에겐 스토킹 비슷한 걸 당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나도 잘못한 게 있다. 운 좋게 성숙한 성품의 남편을 만나 남성에 대한 마음의 가시가 사라지니 내 행동이 얼마나 유치하고 잘못됐는지 알게 됐다. 그런 의미에서 밀드레드는 곧바로 프레드에게 키스 사건에 대해 자신의 책임과 잘못을 인정했으니 내가 20살 때보단 성숙한 사람인 것 같다.


<참고자료>

https://loa-shared.s3.amazonaws.com/static/pdf/Chopin_Shameful_Affair.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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